소설리스트

92화 (92/107)
  • “도착했습니다.”

    황태자의 보좌관이 문을 열었다. 엘리아는 해란의 중심에 위치해 요즘 성황을 이루고 있다고 들은 찻집 앞에 도착했다.

    “이런, 우리가 너무 일찍 온 모양이군요.”

    등 뒤에서 황태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아는 그의 말에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에 이어 기사단과 보좌관, 시종들이 뒤따랐다.

    미리 자리를 비워둔 것인지, 찻집에 손님은 없었다. 그에 제법 많은 인원들이 들어갔는데도 전혀 복작거리지 않았다.

    엘리아는 황태자의 인도에 따라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주위를 기사단이 굳건히 서서 지키고 있었다.

    “솔직히, 좀 의외였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엘리아는 맞은편에 앉아 느긋하게 미소 짓는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제가 이능을 쓴 날 이후로 경계를 꽤 심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한데 무엇이 부인을 움직이게 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청회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엘리아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북부와 제국이 함께 힘을 키워 나가는 건 굉장히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예전엔 아무것도 못 하고, 가만히 있던 걸 늘 후회하기만 했거든요. 그래서 온 거예요.”

    “흐음.”

    한참 턱을 쓸던 황태자의 눈꼬리가 휘었다. 그는 잠시 엘리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얼마 안 있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황태자가 보좌관을 대동한 채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를 마중하러 가는 건가,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딸랑.

    맑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전 나갔던 황태자와 이사벨라였다.

    ‘오늘 만날 귀족 중에, 이사벨라도 포함되어 있었던 걸까. 공작도 아닌 영애가 왜…….’

    이사벨라는 엘리아에게 악감정이 제법 크게 남아 있을 터였다.

    황태자와 이사벨라가 의문을 지우지 못한 엘리아를 향해 다가왔다. 황태자의 에스코트에 따라 이사벨라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두 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죠. 저는 다른 분들을 모셔오겠습니다.”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길.

    돌아서 나가는 황태자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엘리아가 이사벨라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예전과 다르게 사뭇 상냥한 얼굴로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에요, 로이드 부인.”

    분명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는데, 보랏빛 눈동자는 전혀 생기가 없었다.

    “로렌츠 영애. 괜찮으신 거예요? 안색이…….”

    이사벨라는 창백하리만치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취한 사람처럼 흐리멍덩한 눈빛과 풀어진 입술을 보며 엘리아가 걱정을 내비쳤다.

    “괜찮…… 우웁!”

    이사벨라가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입을 가린 채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영애!”

    엘리아가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였다.

    덥석!

    억척스러운 손길이 엘리아의 가는 손목을 붙잡았다.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이사벨라가 고개를 들며 울먹거렸다.

    “화, 화장실 좀…….”

    “그래요, 그게 좋겠네. 어서 가요!”

    주변을 둘러보니 도와줄 하녀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에 있는 거지…….’

    엘리아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이사벨라의 몸을 부축해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 끼이익, 쾅!

    낡은 경첩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퍽.

    이사벨라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거칠게 엘리아의 몸을 벽으로 밀쳤다.

    우당탕탕.

    “윽, 로렌츠 영애! 이게 무슨 짓……!”

    엘리아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달칵, 순간 화장실 문이 잠겼다.

    “……영애?”

    문을 잠그고 돌아선 이사벨라가 멍한 눈빛으로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샌가 작은 검집이 들려 있었다. 서슬 퍼런 칼날이 검집에서 천천히 나와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작은 단도였다.

    툭, 검집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이사벨라가 엘리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엘리아는 말을 더듬었다. 상황을 파악하던 그녀가 이사벨라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아까는 미처 알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니 눈동자 위로 붉은 기운이 스며 있었다.

    당했구나.

    보기 좋게 황태자에게 농락당한 것이구나.

    “로렌츠 영애. 정신 차려요!”

    제발 로렌츠 영애에게 제 말이 닿기를. 그러나 소용없었다. 엘리아의 외침에도 이사벨라의 눈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머리끝까지 손을 치켜든 이사벨라가 다소 투박한 동작으로 단검을 내려 휘둘렀다.

    빠르게 몸을 일으킨 엘리아가 가까스로 이사벨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으윽, 로렌츠 영애.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이사벨라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엘리아의 얼굴을 향해 날카로운 단검을 들이밀었다.

    우당탕!

    이사벨라의 거센 힘에 엘리아의 몸이 바닥에 눕혀졌다. 손목을 잡은 엘리아의 손이 파들파들 떨려 왔다.

    ‘더는 못 버티겠어…….’

    쾅쾅!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북부 기사단 중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철컥, 철컥!

    밖에서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비 전하! 공녀님! 계속 대답 없으시면, 강제로 문을 개방하겠습니다!”

    기사단의 목소리와 웅성이는 소리, 그리고 이사벨라의 거친 숨소리가 화장실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으윽, 내 힘으론 도저히 안 되겠어.’

    “사, 살려, 줘…….”

    기사단을 향해 소리치려는 순간, 이사벨라의 보랏빛 눈동자 위로 말간 물기가 스며들더니 그녀가 입을 뻐금거렸다.

    “네? ……영애?”

    “제발, 싫, 그것만은…….”

    이사벨라가 횡설수설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단검을 들이밀던 손이 일순간 멈췄다.

    휙, 이사벨라가 갑자기 단검의 방향을 자신 쪽으로 돌리더니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영애!!”

    놀란 엘리아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단검 손잡이 끝을 움켜쥐었다. 잔뜩 힘을 주어 끌어당긴 탓인지, 순간 이사벨라의 손아귀에 힘이 빠졌다.

    “하아, 하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 뻔한 건가. 엘리아가 단검을 손에 든 채 아득해진 정신을 차리려 할 때였다.

    푸욱!!

    이사벨라가 엄청난 힘으로 단검의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그대로 몸에 칼을 박아 넣었다.

    검을 놓지 않아 이사벨라 쪽으로 몸이 기울어진 엘리아의 손에도 칼이 심장에 박히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커헉, 헉, 허억, 끄윽, 끅.”

    엘리아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뻐끔거렸다. 뜨거운 핏줄기가 손과 얼굴은 물론이고, 드레스 전체를 적셨다.

    꿀럭, 꿀럭.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이사벨라의 옆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단검에 심장이 꿰뚫린 이사벨라가 눈을 뜬 채 사지를 벌벌 떨고 있었다.

    콰직! 쾅!

    “안에 무슨 일입니까?!”

    안에서 계속 답이 없자 바깥에서 급기야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제일 처음 황태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비가, 공녀를 살해했다!”

    웅성웅성.

    큰 목소리로 소리친 황태자의 말에 굳어 있던 엘리아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쿵, 쿵, 쿵!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아아, 아…….”

    다급하게 단검에서 손을 뗀 엘리아는 핏물에 가려져 붉어진 시야를 지우려 손을 들어 눈을 문질렀다. 고개를 숙이자 핏물이 흥건한 손과 드레스가 보였다.

    “공녀!”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황태자가 엘리아의 몸을 구석으로 밀쳐냈다.

    화장실 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갑작스럽게 닥친 충격에 입 한번 벙긋하지 못했다.

    “대공비! 아무리 로렌츠 영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절규에 가까운 황태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상황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잔뜩 내리깐 목소리와 다르게 황태자는 움찔움찔, 입꼬리를 끌어 올릴 듯 말 듯 떨고 있었다.

    “……!”

    그 모습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내가, 황태자의 농락에 놀아난 거야…….’

    엘리아는 석상처럼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황태자는 쓰러진 이사벨라를 안아 들었다. 그의 시선은 이사벨라보다는 주저앉은 엘리아를 향해 꽂혀 있었다.

    “뭣들 합니까. 공녀를 살해한 대공비를 연행하지 않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