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07)
  • “엘리아 님?”

    어머니가 보였다. 어머니는 새하얘진 얼굴로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지난번 꿈에서 보았던, 남자가 서 있었다.

    “왜! 왜 여기에 계신 거예요!”

    “다행이네, 다행이야…… 쿨럭!”

    새빨갛게 물든 배를 움켜쥔 어머니가 핏물을 토하며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엘리아 님!!”

    제레미가 소리쳤다. 그리고 그건 어머니를 안아 든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으아악. 어머니!!”

    * * *

    “안 돼!!”

    벌떡 일어선 제레미가 두 눈 가득 고인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젯밤 함께 잠들었던 엘리아는 곁에 없었다.

    “엘리아 님!”

    칭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가를 마구 비벼대던 제레미는 침대를 벗어나 맨발로 복도를 내달렸다.

    엘리아를 찾지 못한 제레미는 1층에서 들리는 대화 소리에 얼른 계단을 내려갔다.

    “그게, 대공님의 답신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무슨 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

    “엘리아 님!!”

    타다다닥!

    한껏 목소리를 높인 제레미가 계단을 후다닥 뛰어 내려왔다.

    그 목소리에 엘리아와 앤드류가 동시에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제레미! 그러다 다치겠어. 무슨 일이 있었니?”

    양팔을 벌린 엘리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제레미를 다그쳤다. 엘리아의 품에 폭, 안겨 든 제레미가 치마폭에 파묻혀 얼굴을 비볐다.

    “……어디, 어디 가요?”

    “으응, 잠깐 일이 있어서. 우리 제레미, 잘 기다리고 있을 수 있지?”

    엘리아의 말에도 아이는 도리질 치며 허리를 꼭 껴안은 채 도통 놔주질 않았다.

    “제레미……?”

    “가지 마요. 네……?”

    “금방 돌아올게. 약속해, 응?”

    엘리아는 금세 아이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도까지 떼를 쓰는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난처한 듯 눈을 깜박이던 엘리아가 제 옆에 서 있는 앤드류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제레미, 왜 울고 그래. 정말 잠깐 나갔다 오는 거야.”

    아이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본 엘리아가 손수건을 꺼내 무릎을 굽혔다.

    “흑, 흐윽, 싫어요.”

    “반나절뿐인데? 응? 더 금방 올 수도 있어. 우리 제레미가, 좀만 기다려 줄 순 없을까? 대신 갔다 오면 하루 내내 제레미랑 놀 테니까.”

    “……엘리아 님, 훌쩍.”

    “응?”

    “가슴이, 가슴이 막 답답해요. 무섭고, 겁나. 흐어어엉.”

    제레미는 서럽게도 울었다. 작은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덩달아 눈가를 붉힌 엘리아가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어느샌가 아이가 자연스럽게 엘리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제레미, 그거 아니? 시간을 되돌아오기 전에 나는 네게 그리 좋은 어머니가 아니었어. 나는 꼭꼭 숨어 다니기 바빴는데. 제레미, 넌, 넌 내게 항상 다정한 아이였어.’

    엘리아는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이야기해 주며 작은 아이의 몸을 더 힘껏 끌어안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엉엉 울던 제레미의 울음소리가 옅어졌다.

    *** “제레미, 맨날 떼어놓고 가서 속상했지?”

    “…….”

    “미안해. 제레미를 놓고 어디 가는 건 이게 정말 마지막일 거야. 이번만 이해해 줄 순 없을까?”

    “훌쩍, 훌쩍.”

    아이가 코를 훌쩍이며 도리질 쳤다. 엘리아의 어깨 위로 축축한 물기가 스몄다.

    “……싫어?”

    아이가 말없이 엘리아에게 두른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제레미, 엄마가 많이 사랑해.”

    “……!”

    순간 아이의 몸이 경직됐다. 엘리아는 다정한 손길로 아이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었다.

    “많이, 많이 사랑해.”

    내 목숨 따위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널 사랑해.

    제레미는 말이 없었다. 천천히 몸을 떼어낸 엘리아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홍조 띤 얼굴 위로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이의 눈꺼풀이 깜박일 때마다 또륵, 반짝이는 눈물이 한 방울씩 떨구어졌다.

    한참 그 어여쁜 모습을 지켜보다가, 손수건을 들어 눈물 자국을 닦아주었다.

    “제레미가 항상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조금은 덜 불안하지 않을까?”

    “…….”

    아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대신 눈꺼풀과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길 반복했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아이가 다시금 눈물을 쏟아냈다.

    “엄……, 흐윽…….”

    “응?”

    “훌쩍, 끅, 흐윽, 흑 엄마…….”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던 엘리아의 손길이 일순 멈추었다.

    “엄마?”

    “흐으흑, 엄마!”

    엘리아는 입술을 꽉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그래, 그래. 고마워 제레미. 엄마 여기 있어. 울지 마.”

    울컥한 엘리아가 결국 제레미의 볼을 쓸다가 눈물을 떨구었다.

    “고마워, 제레미. 그렇게 불러줘서.”

    엘리아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끼이익-.

    “대공비 전하, 그만 가실 시간이십니다.”

    중앙 정문으로 들어선 황태자의 보좌관이 허리를 숙이며 말을 전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엘리아가 제레미의 작은 손을 꼭 잡으며 일어섰다.

    “제레미, 엄마 배웅해 줄 수 있겠니?”

    “……네, 훌쩍.”

    아이는 뺨에 흐르는 눈물을 한 손으로 닦아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고작 반나절의 헤어짐인데, 이렇듯 떼어놓고 가기가 힘들었다.

    성 밖으로 나오자, 황태자가 마차 앞에 서서 엘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뒤로 보이는 커다란 황금 마차에는 제국의 깃발과 상징이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가 엘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레미, 엄마 갔다 올게.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정말, 정말 금방 올 거죠?”

    “그럼, 정말 금방 올 거야.”

    아이가 엘리아와 황태자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시무룩한 얼굴로 살며시 엘리아의 손을 놓아주었다.

    “……약속이에요.”

    “그래, 약속.”

    엘리아는 아직까지 손을 내밀고 있는 황태자의 손을 잡았다. 마차에 오르는 내내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제레미에게 꽂혀 있었다.

    마부가 말에 오르자, 제레미의 눈동자 위로 물기가 가득 스미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 엄마!”

    마차가 움직이자 제레미가 목청껏 엘리아를 불렀다.

    “도련님, 마님께선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앤드류의 만류에도 제레미는 마차를 쫓아가며 소리쳤다.

    “엄마아!!”

    그리고 그 모습을 내내 지켜보던 엘리아의 두 뺨에도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되겠어요. 저 못 갈 것 같아요. 아이가, 제레미가…….”

    “부인, 이 모든 일이 다 제레미를 위해서란 걸 왜 모르십니까.”

    황태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엘리아를 달래며 손수건을 건넸다.

    “그건 그렇지만…….”

    “제레미가 로이드 부인을 마치 친어머니처럼 따르는군요.”

    고개를 작게 끄덕인 엘리아가 손수건 위에 얼굴을 묻고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덜컹, 덜컹.

    마차의 움직임 소리만 들려올 때였다.

    “……로이드 부인께선 형님과 제레미가 그리도 좋으십니까?”

    뜬금없는 황태자의 질문에 엘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웃는 낯이었다.

    “네.”

    “하하, 단호히 말씀하시네요. 전 대공비도 그랬습니다. 릴리 애보트 말이에요. 익히 들어서 알고는 계시겠죠?”

    “알고 있어요.”

    엘리아의 대답에 황태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생각하듯 무릎 위에 얹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왤까. 항상 생각했어요. 왜 하필 형님일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엘리아가 의구심 어린 얼굴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다지 여자들이 좋아할 성미는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감성보단 이성을 중시하는 분이시니.”

    그가 풋, 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이성적인 분이니까, 릴리 대신 제레미를 선택하지 않았겠습니까.”

    “…….”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엘리아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 전 평생 이해할 수 없지만, 형님은 사랑하는 아내보단 후사가 더 중요했겠지요.”

    “……아니요. 대공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다정해요. 모든 일에 성실하고. 그런 사람이 아내보다 후사가 중요해서 아이를 선택했다는 말을 믿을 수 없군요.”

    “……이런 이런, 애보트 후작가가 왜 북부와 인연을 끊었는지 모르시나 보군요.”

    황태자의 눈빛이 살짝 날카롭게 변했다.

    “……대공님의 이야기는 대공님에게 듣겠습니다.”

    그는 잠시 헛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듯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 이후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단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엘리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고 황태자는 눈을 감고 연신 무릎 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날이 어두웠다.

    이능을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북부의 하늘 위로 잔뜩 먹구름이 꼈다. 곧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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