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07)

“그래도 다행인 건, 전 폐하와 생각이 아주 다르다는 겁니다. 형님께선 황권에 관심이 전혀 없으시니, 북부가 제국과 함께 힘을 키워 나가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엘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황태자의 청회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장난스러운 눈빛이 진지하게 바뀌어 있었다.

“제가 부인에게 그간 장난을 많이 치긴 했습니다만, 그건 그저 형님의 관심을 끌기 위한 아우의 투정이었습니다. 사실 전 형님이 좋습니다. 우리 사이의 간격이 언젠간 좁혀지길 바라고 있죠.”

“…….”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동안 폐하께서 수많은 전쟁을 치르신 터라, 제국도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국의 권력을 쥐고 있는 귀족들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모임을 도모 중입니다.”

분명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엘리아는 그의 말이 조금은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제가 어떤 도움이 된다고요.”

“폐하의 뜻을 꺾기 위해 형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형님께선 도통 제 말을 들어주질 않아서요. 부인의 부탁이라면 적어도 듣긴 하겠지요.”

“…….”

“물론 의심하는 부인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북부 해란에서, 귀족들과의 만남이 있을 겁니다. 함께 가서 이야기를 들어본다면 제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해란이라면, 엘리아에게도 익숙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한참 고민하던 엘리아는 어느샌가 식어버린 찻잔 속 찻잎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엔 두둥실 떠 있던 찻잎이 밑으로 가라앉아 일렁거렸다.

“……북부 기사들과 동행이 가능하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럼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면 지난 시간 벌어졌던 제국의 침공에서 황태자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지금 그가 이러는 이유가 뭘까. 의중이 궁금하기도 했다.

‘혹시 모르니, 미리 말은 전해두고 가야겠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엘리아는 맞은편에 앉은 황태자의 비릿한 미소를 미처 보지 못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그는 곧장 웃음기를 거두고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카타미아 왕국에서 들여오는 물건들 말입니다. 그것에 대한 논의 역시 모임에서 함께하도록 합시다. 제국의 귀족들은 이득 없인 움직이지 않는 치들이라. 제법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될 것 같네요.”

“물건, 이요?”

“듣기론 꽤나 쓸 만한 것들이 많다고 하던데요? 이를테면, 향신료와 황금 같은.”

씨익,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는 황태자가 보였다.

애초부터 그걸 노렸던 걸까?

엘리아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화 협정을 맺는다면, 어쩌면…….’

성사만 된다면 당장이든, 몇 년 후든 일단 제국이 북부를 침공할 일은 없다는 뜻이 되었다.

“그럼,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부인?”

황태자가 잠시간의 정적을 깼다. 엘리아는 여전히 고심 어린 표정으로 찻잔을 매만졌다.

“……잠시만요.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건 좀 어렵겠습니다. 귀족들이 다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 바로 내일이라서 말입니다.”

“……너무 일러요.”

엘리아의 대답에 황태자가 굳은 표정을 한 채 손가락으로 아래턱을 쓸었다.

“하는 수 없군요. 애석하게도 모두가 비밀리에 모일 수 있는 시간이 내일밖에 없어서 말입니다.”

고개를 절레, 저은 황태자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펠릭스에게 서신을 보내 그이의 의견을 듣고 싶었는데……. 그래. 내일 오전까지는, 빠르게 답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결심을 굳힌 엘리아가 황태자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 “잠시만요! 제안, 받아들일게요.”

그녀의 말에 황태자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그럼 내일 오후까지 해란으로 출발할 채비를 마치도록 하세요.”

“……그러죠.”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엘리아는 황태자에게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건 기회일까.’

지금까지 상황이 무수히 많이 바뀌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엘리아는 북부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유리.”

“네, 마님.”

엘리아는 옆에서 시중을 들던 유리를 불렀다.

“앤드류를 호출해 주겠니.”

펠릭스에게 이 일을 바로 알려야만 했다.

* * *

체이스는 천천히 응접실에서 나온 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다잡으며 몇 번이고 헛기침을 반복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아. 진짜 순진하긴.”

한참 웃음을 터뜨리던 그가 이내 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시종들과 보좌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사벨라 로렌츠는, 무사히 도착했나요.”

체이스가 복도에 난 작은 창문을 내다보니, 날이 어두웠다.

북부에 눈이 멈추었단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황제는 그 비굴한 생존 본능이 발동했는지 미친 듯이 그를 호출했다.

안 그래도 연이은 북부의 희소식에 그 역시 벼르고 있던 찰나였다.

펠릭스 로이드의 행복이라.

그건 도무지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는 일이었고, 불쌍한 릴리를 위해서라도 도저히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네. 분부대로 진행했습니다.”

“그쪽으로 가죠.”

체이스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그의 금색 머리카락이 어두운 하늘과 대비되어 더욱 환하게 빛났다. 그는 곧장 마차를 타고 성을 빠져나왔다.

설산을 배경으로 너른 벌판이 펼쳐져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풍경 속에서 그가 떠올린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대공의 첫 번째 부인이자, 그의 오랜 친우였던 릴리였다.

“체이스!! 들어봐! 펠릭스가 글쎄…….”

“펠릭스는 고상한 여자를 좋아할까?”

“체이스……, 나 펠릭스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

줄곧 함께였는데, 말간 햇살처럼 해맑기만 한 그녀가 선택한 사람은 펠릭스였다.

체이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언젠가 릴리가 펠릭스에게 고백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자꾸, 자꾸 황제 폐하께서 네게 결혼을 요구한다며! 그거 나랑 해. 나라면, 나라면 막을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그러겠다고 해줘.”

“……나 역시 네가 좋아. 그런데 이건, 친우로서, 누이로서 좋아하는 마음이야. 그러니까 그 말은 듣지 않은 거로 할게.”

“펠릭스! 황제 폐하께서 억지로 식을 치른대. 넌 북부로 갈 거잖아. 죄 없는 여인을 그런 척박한 곳에서 썩힐 생각이야? 나는 달라. 나는 어디든 잘 지낼 수 있어. 제발, 응? 그러겠다고 해줘. 흐윽, 흑…….”

항상 해맑기만 하던 릴리가 펠릭스의 계속된 거절에 결국 울음을 쏟아냈다. 펠릭스는 그런 릴리를 달래듯이 토닥였다.

그리고 황궁 뒷문, 커다란 기둥 뒤에 숨어 있던 체이스는 차마 그 장면을 더는 볼 수 없어 자리를 떠났다.

이능을 타고난 자신과 달리 이능 없이도 보란 듯이 강인한 펠릭스에게 좋은 감정 따위 없었다.

눈엣가시 같은 존재. 그래도 그에게서 황태자라는 자리는 빼앗았으니까 조금쯤은 봐주려고 했다.

릴리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러나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공비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언제나 건강하고 한여름의 햇볕 같던 아이라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이를 포기하고 릴리를 살렸어야지! 그게 맞는 거잖아!”

“…….”

분노한 체이스의 닦달에도 펠릭스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넋을 잃은 사람처럼 허망하게 서 있기만 했다.

“하하…….”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해 보던 체이스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펠릭스 로이드. 몇 년이 흘러도 몇백 년, 몇천 년이 흘러도 너는 그렇게 릴리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어.’

마차는 어느샌가 눈이 녹아 질척한 땅 위를 달려 북부의 어느 한적한 마을에 도달했다.

체이스가 눈을 떴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그의 앞엔, 이사벨라 로렌츠가 서 있었다.

항상 릴리를 쫓아다니며 그녀를 따라잡으려 애쓰는 모양새가 참 안타까우면서 기분이 더러웠는데, 그녀가 릴리를 위해 해줄 일이 생겼다.

체이스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마나가 차오르며, 이사벨라의 눈동자 위로 붉은 기운이 스며들었다.

“너는 내 인형이 되어서, 내 말만 들으면 돼. 알겠니?”

체이스는 이사벨라의 턱 끝을 살짝 들어 올리며 읊조렸다. 붉지만 흐리멍덩한 눈동자. 이사벨라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핫, 재밌네.”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이사벨라의 창백한 볼을 한 번 쓸어주었다.

* * *

엘리아의 서신은 한밤중, 황실 별채에 머물고 있던 펠릭스에게 전달되었다.

“…….”

서신에는 황태자로부터 평화 협정 제안을 받아 기사들과 함께 북부에서 제국의 주요 귀족들을 만날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능하면 빠른 회신을 부탁한다는 문장도 덧붙여져 있었다.

“루카스.”

“네, 전하.”

“……로렌츠 공작, 르네 공작, 그리고 베이커 백작이 지금 어디 있는지 당장 알아봐.”

“……네.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루카스가 펠릭스에게 인사를 올린 후 곧장 밖으로 나갔다.

오래 지나지 않아 루카스가 돌아왔다. 조사 결과, 그들은 모두 제국에 있었다.

쾅.

“이 망할 자식이!”

분노에 차 책상을 내려친 펠릭스가 급히 엘리아에게 보낼 서신을 빠르게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북부로 전달해.”

루카스는 서신을 품속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황실 별채 바깥에 대기 중인, 북부 기사단에게 발 빠르게 달려갔다.

“서둘러 회신하라!”

“알겠습니다, 단장.”

가장 발 빠르고 성실한 기사 한 명을 불러 세운 루카스가 그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말에 올라탄 기사는 어둠 속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루카스가 뒤돌아 별채로 향했다.

루카스가 떠난 후 검은 그림자 무리가 지령을 받든 북부 기사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아우우-.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소리가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 * *

“헉, 헉. 제레미. 괜찮니?”

제레미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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