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07)
  • 짝!

    “아악!”

    세레나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유리의 뺨을 내리쳤다.

    “유리……!”

    엘리아는 놀라 얼른 유리의 몸을 감쌌다.

    “이거 놔! 안 놔? 내가,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래?”

    세레나가 다시 손을 올리고 엘리아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기사들이 그녀의 두 팔을 붙잡아 제압했다.

    졸지에 무릎을 꿇은 세레나가 계속해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유리를 감싸던 엘리아가 세레나의 한심한 모습에 분노를 삼키며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이젠, 못된 손버릇마저 생겼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내 사람에게 손을 대는 거니.”

    “왜, 뭐 어때서? 하녀 따위에게 그럼 예의라도 차려주길 바랐어?”

    “하녀 따위?”

    “흥, 왜 하녀라고 하니까, 같은 천한 핏줄끼리 동정심이라도 생기나 보지?”

    “너 말 다 했니?”

    “왜?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어? 맞잖아.”

    엘리아는 끝까지 잘못을 모르고 소리치는 세레나에게 다가갔다.

    짝!

    “아악. 야!”

    분노를 담은 엘리아의 손길이 세레나의 뺨을 내리쳤다.

    “이씨 미친 거야? 감히 나에게 손을 대.”

    “감히? 후작 영애 따위가 뭐 대단하기라도 하다는 말이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거 놔! 놔보라고!”

    세레나는 화가 난 마음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자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청순하고 아름다운 숙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괜찮니? 유리?”

    발버둥 치는 세레나를 뒤로하고 엘리아는 유리에게 다가와 달아오른 뺨 위에 손을 올렸다. 매섭게 내리친 탓에 볼이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저, 전 괜찮아요. 이깟 손찌검은 하나도 아프지 않은걸요.”

    “……이런, 입술이 터졌어. 괜히 나 때문에 네가 피해를 보는구나.”

    “전 정말 괜찮아요! 지금은 저보단…….”

    유리의 시선을 따라 계속해 기사들에게 언성을 높이며 난동을 피우는 세레나를 보았다. 엘리아의 입가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 너의 이런 모습을 보니 내가 얼마나 너에게 만만하게 보였는지 알겠구나. 너의 거짓된 달콤한 말에 이번에도 바보처럼 끌려다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 그러니 그렇게 억울하니?”

    “이잇!”

    “나는 이능이 아니라 가족이 필요했어. 필요에 따라 팔고 사는 가족들이 아니라.”

    “가족? 머지않아 허물어질 후작 가문? 결국 나 역시 팔려 가듯이 결혼하겠지. 네가 그랬듯이 말이야.”

    “…….”

    눈을 치켜뜬 세레나의 흰자위에 핏줄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흥분해 붉어진 얼굴과 발버둥 친 탓에 엉망으로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이 보였다.

    “나를 봐, 결국은 너랑 똑같아. 넌 그나마 운이라도 좋아 대공님의 아내가 되었지. 나는, 나는……! 그래. 이제 나보다 위에 선 기분이 어때? 만족스러워?”

    “……나는 너를 한 번도 발아래 둔 적 없어.”

    세레나의 꽉 깨문 입술 위로 투둑, 굵직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작게 훌쩍이며 울던 평소와 달리 억눌린 신음이 들렸다.

    ‘이게 진짜 너였구나.’

    함께 산 세월이 그리 오래였는데 세레나의 진짜 눈물을 난생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난, 나는 한 번도 너한테 한 짓 후회한 적 없어. 그러니, 가엾다는 듯이 쳐다보지 마. 그것조차 역겨우니까…….”

    한참을 자기 분에 못 이겨 부르르 떨며 소리치던 세레나가 어느새 몸을 늘어뜨리며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엘리아가 눈짓하자 기사들이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다.

    “너도 이제 나를 잊어. 먼 길 왔을 테니, 잠시 쉬었다가 가든가.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걸로 하자.”

    그렇게, 한참을 울던 세레나는 그녀의 말에 끝까지 악담을 퍼붓곤 거친 걸음으로 대공가를 나갔다.

    엘리아는 창틀 앞에 서서 성 밖을 나서는 세레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보조하는 하녀 한 명 없이 먼 길을 왔는지 혼자였다.

    엘리아는 유리에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마님,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아까 못 보셨어요? 눈에 불을 켜고 마님께 달려드는 모습이요!”

    “……유리. 그저 내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일이야. 어쨌든 이걸로 아르네스 후작저 사람들과는 마지막이겠지.”

    “하아. 그러시면 어쩔 수 없죠. 얼른 다녀올게요. 하여튼 마님은 너무 여리세요.”

    “유리, 다른 아일 시키도록 하렴. 마주치기 불편하잖니.”

    “아니요! 제게 한번 노려봐 주고 올 기회를 주세요!”

    두 주먹을 불끈 쥔 유리를 바라보며 엘리아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서는 그녀의 손에는 엘리아가 건네준, 제법 묵직해 보이는 상자가 들린 채였다.

    창밖을 보니, 순식간에 달려 나간 유리가 멀어져 가는 세레나를 붙잡고 있었다.

    유리가 상자를 건네자 열어보지도 않고 쳐내는 모습이 보였다.

    “넌 정말 끝까지 제멋대로구나.”

    그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진 상자에서 황금이 삐져나왔다. 멈칫하던 그녀는 빠른 손놀림으로 황금을 상자에 담더니 빼앗기기라도 할까 허둥지둥 기다리고 있던 허름한 마차에 올라탔다.

    엘리아는 허탈한 웃음을 끝으로 커튼을 쳤다.

    *** 황태자와의 대화 탓인지, 불시에 쳐들어와 마음을 헤집어놓은 세레나 탓인지 엘리아는 그날 밤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

    꿈에선 후작 부인이 어린 엘리아를 벽장 안에 가두고 있었다. 아이는 어둠이 두려워 엉엉 울며 문을 두드렸다.

    “열어주세요! 잘못했어요! 흐윽, 너무 무서워요! 제발, 제발…….”

    한참 울었더니 눈이 짓무르고 양 볼에 눈물이 말라붙었다. 그런데도 벽장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언니, 왜 맨날 거깄어?”

    대신 어린 세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나도 잘 모르겠어, 흐윽.”

    “엄마는 세레나 앞에선 항상 천사 같은데, 엘리아 언니 앞에서만 무서워! 언니가 사생아라서 그렇대. 사생아가 뭐야?”

    “그, 그건…….”

    고작해야 8살이던 엘리아는 한참 꾸물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뭐야, 재미없어! 세레나 갈래!”

    “자, 잠깐만! 세레나! 알려줄게! 제발 가지 마! 그, 그러니까, 세레나의 엄마랑 언니 엄마가 다른 거야…….”

    “흐응, 그게 왜? 재미없어.”

    문 틈새를 가린 그림자가 멀어졌다.

    “세, 레나? 세레나! 세레나! 제발, 가지 마. 너무 무서워…….”

    엘리아는 몸을 한없이 작게 웅크렸다. 파묻은 무릎 위로 후두둑 눈물방울이 흩어졌다.

    “엘리아.”

    낮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펠…….’

    번쩍 눈을 떴다. 엘리아는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펠릭스가 엘리아의 이마 위에 흐르는 땀을 손끝으로 닦아주며 다독였다.

    “악몽을 꾸는 것 같아서.”

    “…….”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순간조차 엘리아에겐 꿈처럼 느껴졌다.

    “괜찮나?”

    다시금 그가 물어 왔다. 엘리아의 눈꼬리에 걸렸던 눈물이 떨어져 베갯잇을 적셨다.

    “괜찮, 아요. 고마워요.”

    엘리아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의 잿빛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순간 황태자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몸을 굳힌 엘리아가 스르륵, 그의 눈을 피했다.

    “……낮에, 후작저에서 방문했다지?”

    “맞아요…….”

    엘리아의 간단한 대답에 침묵이 맴돌았다. 침대맡에 자리 잡고 앉은 펠릭스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멋대로 행동해서 화났나?”

    “아니요. 절 위해 하신 일이란 거 알아요. 후작저의 일 또한 언젠가 들킬 거라는 걸 예상하기도 했고.”

    “…….”

    서먹한 분위기에 몸을 뒤척였다. 그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는 점이 조금 서운했다.

    그래서 엘리아는 더는 어떤 말도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한참 머뭇거리던 펠릭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자, 엘리아. 난 일을 좀 더 하다가 잘 테니.”

    나직한 목소리에 엘리아는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펠. 당신은, 두렵지 않나요? 앞으로 닥칠 북부의 미래가?”

    그가 엘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다시 침대 위로 앉았다.

    “글쎄.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

    그의 대답에 엘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난 그래, 당신이랑 제레미를 지킬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거야. 그러니까 날 믿고,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겠나?”

    “……당연한 소리예요.”

    펠릭스는 저보다 한참 작은 엘리아의 손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맞닿은 손에서 점점 따뜻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피어올랐다.

    그의 얼핏 보이는 표정은 평소처럼 담담했다.

    엘리아는 말없이 몸을 웅크리고 그의 팔을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꽤 긴 시간 동안 펠릭스는 엘리아를 위해 기꺼이 한 손을 내어주었다. 그 다정함이 더없이 소중하고 감사했다.

    ‘약해지면 안 돼, 엘리아.’

    밤새 속으로 생각했다. 멍청하게 당하고 있지 말자고, 잘 처신하면 된다고.

    그리고 바로 그다음 날, 펠릭스가 수도로 떠나고 나서 황태자의 전속 하녀가 엘리아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 * *

    황태자와의 만남은 응접실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광택이 흐르는 검은색 제복 위에 검붉은 망토와 금빛 장신구를 차고 있었다.

    그는 항상 그랬듯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제안이 무엇이죠?”

    엘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은 황태자가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앉아 엘리아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 경계하지 마세요. 정말 부인에게 좋은 제안일 겁니다.”

    엘리아는 대답 없이 그저 황태자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테이블 위, 한 모금도 채 마시지 않은 찻물에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타국과의 거래는 폐하께서 익히 알고 계십니다. 반역 행위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며 벼르고 계시지요. 듣자 하니, 오늘 폐하를 뵈러 가는 것 같던데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닐 듯합니다.”

    “좋은 생각이 아니라니……?”

    “황제께서 쉽게 놓아주지 않으실 겁니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죠……?”

    당황한 엘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분간 북부에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지요.”

    “……!”

    “제아무리 형님이어도, 어찌 폐하의 명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엘리아를 바라보던 황태자가 허리를 살짝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지금 전, 폐하께서 북부를 칠 수도 있다는 소릴 하는 겁니다.”

    예상하고는 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너무 빨랐다. 그의 협박처럼 내뱉는 이야기가 진짜 일어나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잠시 정신이 아찔했다.

    황태자가 주변의 하녀들을 쓱 살피더니, 그녀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