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제안입니까.”
“보시다시피 서서 할 말은 아니라.”
황태자의 시선이 침실 쪽으로 향하다 돌아왔다. 그는 경계 어린 눈빛을 보내는 엘리아에게 두 손을 올리는 듯한 제스처를 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큼큼, 아무래도 지금은 힘드신가 보군요.”
“…….”
“그럼 내일 꼭 시간을 내주십시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그는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부인에게 하녀를 보내겠습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나직한 웃음을 남기고 황태자가 뒤돌아섰다.
방에 홀로 남은 엘리아는 침대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불안한 마음에 쉽게 잠들지 못하던 엘리아는 새벽빛이 들어올 때가 되어서야 겨우 선잠이 들었다.
* * *
처음 각방을 쓰고 삭막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현재는 함께 있을 때마다 두 사람의 주변에 꽃밭이 펼쳐지는 듯했다.
대공님은 언제나 마님의 안위를 걱정했으며, 늘 차갑기만 했던 눈빛이 마님을 향할 때면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엘리아의 얼굴도 화사해졌다.
하지만 오늘따라 마님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마님, 입맛이 없으세요? 식사를 너무 못 하고 계세요.”
“으응, 글쎄. 속이 좋지 않아서…….”
“엘리아 님! 아파요?”
“아니이, 전혀. 전혀, 아프지 않단다.”
엘리아가 제레미를 안심시키려는 듯 살며시 웃었다. 깨끗하게 비워진 제레미의 접시와 달리 그녀는 음식에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수준이었다.
조금이나마 몸에 살이 붙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아를 지켜보았다.
“입맛이 없어도 드셔야지요. 안 그래도 약하신데 쓰러지시면 어떡해요.”
“유리. 하지만 정말 입맛이 없구나. 생각해 주어 고마워.”
“……그럼 오늘 산책도 좀 힘드시겠지요?”
“그러게. 오늘은 그냥 좀 쉬고 싶네. 제레미, 지금부터 수업이 있지?”
유리는 다정하게 제레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걸까.’
식사량이 준 것뿐만 아니라 오늘은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기도 하여 걱정이 되었다.
‘황태자 저하의 방문으로 부부 싸움을 하셨나?’
유리는 지난 연회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그러다 휘휘 고개를 저었다. 유리는 엘리아를 전적으로 믿었다.
‘모시는 귀족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고 다들 그러기는 했지만…….’
엘리아는 모든 사용인을 차별 없이 대우해 주었다.
유리는 엘리아가 처음 제게 베풀어준 친절을 떠올렸다.
“자, 제국에서 들여온 약초란다. 먹으면 금방 나을 거야.”
“쿨럭, 쿨럭. 아니에요, 마님! 이런 귀한 것을……. 앗, 오지 마셔요. 쿨럭, 큰일 나요!”
극한의 추위로 인해 북부 사용인들은 감기를 자주 앓곤 했다. 흔한 질병이지만 전염성이 있어, 감기에 걸리면 방에서 꼼짝도 못 하고 며칠간을 지내야 했다.
북부 사용인들에겐 흔한 일이었다.
답답했지만 일도 잠시 쉴 수 있고 식사도 방으로 가져다주어 참을 만했다.
그날도 그랬다. 노크 소리에 누군가 식사를 가져다주러 온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문을 열자 예상과 달리 엘리아가 측은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유리, 식사하고는 꼭 이걸 챙겨 먹으렴. 아프다고 참지 말고, 힘들면 꼭 말하고. 알겠니?”
아프다는 말을 듣고 왔다는 엘리아는 방 안까지 들어와 유리의 손등을 다독여 주었다.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진심 어린 걱정 한번 받아본 적이 없었던 유리는 그 따뜻한 손길이 잊혀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를 목숨 걸고 구해주시기도 하셨지.’
유리는 도련님을 챙겨 수업을 보내고, 나란히 복도를 걷고 있는 마님을 바라보았다.
‘다정하신 분이니, 내가 더 잘 보필해 드리고 싶어…….’
주제넘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게 유리의 진심이었다. 한참 복도를 거닐다가 엘리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유리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님……?”
뒤에서 따라 걷던 유리는 다시 멍하니 정신을 빼앗긴 엘리아를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님, 괜찮으세요?”
“어, 어? 아…… 응. 괜찮아.”
엘리아는 멍한 시선을 유리에게 돌리며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무슨 일이지? 누가 감히 우리 마님을 저리 걱정하게 만든 거야?’
유리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엘리아를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마님!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지만, 마님을 위해선 어떤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평소와 같지 않게 비장한 표정의 유리였다.
다음 날 황태자의 방문 이후 다시 한번 아르티젠 성이 떠들썩해졌다.
아르네스 후작가 영애이자 엘리아의 동생 세레나가 찾아온 것이었다.
* * *
“언니. 부디, 부디 우리 가문을 좀 도와줘…….”
잠시 정신없이 횡설수설 떠들던 세레나는 차가 식고 마주 앉은 지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용건을 꺼내었다.
“메, 멜라네시아가 발각되면서, 황실에서 수입품을 다 가져갔어. 아버지는 가문을 살리겠다고 이국으로 건너가셨다가 험한 꼴을 당하셨고, 지금 병상에 누워서 꼼짝도 못 하셔…….”
우왕좌왕 말을 이어 가던 세레나가 힐끗 엘리아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가 후두둑,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며 울기 시작했다.
“흡, 흐윽. 사용인들은, 후작저에서 제대로 급료를 주지 못하니, 흑. 대부분 나가 버린 상태야. 훌쩍. 언니, 그 커다란 저택에 고작 세 명의 하인들만 남았어……. 말이 되는 소리야, 이게?”
손수건을 쥐고 있으면서 왜 닦지는 않는지. 마치 달래주길 바라는 저 모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엘리아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네가 긴히 해야 한다던 이야기는 이게 끝이니?”
“으응, 훌쩍. 언니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일이 잘 풀리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언니한테 정말 고마워할 거야. 흑.”
“세레나. 미안하지만, 난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아.”
세레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눈을 홉떴다. 방금까지 그렁그렁하던 눈가가 거짓말처럼 금세 메말라 있었다.
“……왜? 대공 전하께 언니가 잘 말씀드려 보면, 분명……!”
“아니. 말씀드리지 않을 생각이야.”
“……사이도 좋은 것 같던데, 어째서? 이런 것조차 부탁하지 못한다면, 그냥 아버지의 말씀 따라 황태자의 첩이라도 되지 그랬어!”
세레나는 본인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뻔뻔하게 그녀를 몰아세웠다.
“황태자의 첩? ……넌, 정말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엘리아는 어이없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제 연극도 끝나나 보네.’
제법 긴 시간 동안 침묵이 유지되자, 세레나가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언니, 이, 이렇게 부탁할게. 응? 대공 전하께 도와달라는 말만 전달해 줘. 이미 몇 번 청을 드렸는데, 번번이 거절당해서…….”
“……대공님께 청을 드렸다고?”
“으응. 어차피 언니도 부탁을 드려야 되는 처지잖아?”
“하. 세레나. 대체 얼마나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 생각이야……? 그만 돌아가. 내가 후작 가문에 해줄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을 테니.”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무례를 저지르고는 눈꺼풀을 깜박이는 얼굴이 정말 꼴도 보기 싫었다.
‘끝까지 이기적인 세레나. 널 믿었던 과거의 나는 정말 바보였어.’
엘리아는 주저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도와줄 수 있잖아. 결국 이 모든 게 다 언니 탓이잖아!”
“…….”
세레나는 일어선 그녀를 표독스럽게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 “언니가 그렇게 나가 버리고, 후에 대공 전하와 북부 기사단이 후작저에 들이닥쳤어. 우리 가문 기사단을 다 쓰러뜨리고도 모자라, 아버지에게 검까지 들이댔다고! 우리 선박을 고발한 것도 다 전하께서 하신 일이야. 알긴 해?”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가만히 서서 세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며 탁한 금발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언니는 몰랐지? 그래, 몰랐을 거야. 언니가 가족을 버릴 리가 없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를 도와줘야 해. 언니가 책임져야지!”
세레나가 당연히 그녀가 들어줘야 한다는 듯 뻔뻔하게 강요했다. 부탁이 아닌 협박에 가까운 언행에 그녀를 바라보는 엘리아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내렸다.
“……세레나. 네가 매일 내게 줬던 멜라네시아 차.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너도 알고 있었잖아.”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잖아. 언니의 가족들이 지금 힘들다고 하잖아!”
“내 가족? ……잘 들어. 내가 어린 나이에 불임 판정을 받은 건, 다 그 찻잎을 복용했기 때문이었어. 아마 계속 마셨다면 난 얼마 못 가서 죽었겠지. 누가 가족에게 그런 짓을 하니?”
“난, 나는 그렇게까지 위험한 건지 몰랐어! 그냥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라고! 언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언니를 아꼈는지.”
연갈색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끼다니.
“나를 아꼈다고? 하. 정말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믿지도 않을 말을 이렇게 멋대로 던지고 있는 세레나가 더욱 가증스러웠다.
“언니!”
“아꼈구나. 그래서 그런 차를 먹였어? 그런데 이걸 어쩌니. 네 말대로 이번 일은 나도 모르는 일이야.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구나.”
“언니, 계속 이럴 거야!”
“너도 그랬잖아. 몰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이번 일은 나도 모르는 일이야. 물론 알아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없어.”
“언니……!”
엘리아가 차가운 시선으로 세레나를 내려다보았다.
세레나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창백했던 낯이 점점 불그스름한 기운을 띠었다.
드르륵, 쾅!
세레나가 거칠게 의자에서 일어나자, 그 반동에 의자가 바닥으로 넘어지며 큰 소리를 냈다. 그리고 세레나는 미친 사람처럼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변해도 너무 변한 거 아니야? 어떻게 사람이 순식간에 이렇게 독해질 수가 있어?”
“으윽!”
엘리아는 두 어깨를 꽉 움켜쥐는 힘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릴 때부터 그랬어. 항상 네가 문제였어! 우리 집안의 오점은 너였다고! 그래도 어머니는 널 받아줬어. 그걸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받아줬다고? 아니, 아니지. 아버지의 부정을, 오점을 그저 남겨뒀을 뿐이겠지. 다시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잘 들어, 세레나. 난 한 번도 후작저에서 가족이었던 적이 없어. 알겠니?”
이를 악문 세레나가 엘리아의 어깨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놔.”
“나는, 나는 네가 정말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왜 나한테 없는 걸 네가 갖고 태어난 거야? 이능만 있었다면, 그것만 나한테 있었다면 황태자 전하도 네가 아닌 날 선택했을 텐데…….”
“……넌 끝까지 네 생각만 하는구나.”
세레나는 눈을 부릅뜨고 엘리아를 노려보았다. 분노와 원망이 섞인 눈동자.
참다못한 엘리아가 팔을 움켜쥔 손을 쳐내려던 찰나였다.
“마님! 들어가겠습니다!”
벌컥!
문이 열렸다. 유리가 두 명의 기사를 대동한 채 척척 걸어와 엘리아 옆에 섰다.
“큰 소리가 나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아가씨. 이 팔 좀 놓으셔요. 저희 마님께서 몸이 많이 약하셔서요.”
꾸벅 인사를 올린 유리가 능숙한 손길로 엘리아의 어깨를 잡고 있는 세레나의 손을 떼어냈다.
세레나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유리를 쏘아보았다.
“이, 이 건방진, 하녀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