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하.”
제레미의 물음에 저마다 반응이 달랐다. 엘리아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했고, 샤미르는 연갈색 눈동자를 굴리며 흥미로운 시선으로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반면, 펠릭스는 아들의 당돌한 행동에 헛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있잖니, 제레미. 그건 제레미한테 엄마랑 아빠랑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묻는 거랑 똑같단다.”
“나는 엘리아 님이에요!”
“…….”
단번에 나오는 대답에 엘리아는 슬쩍 펠릭스의 눈치를 살폈다.
‘펠이 서운해하면 어떡하지.’
엘리아의 우려와 다르게 펠릭스는 웃고 있었다.
“재밌네. 이제 부인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지.”
펠릭스가 엘리아를 빤히 쳐다보며 묻자, 제레미도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다른 데도 기가 막히게 닮은 두 부자가 엘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선택하라는 듯이.
“맙소사……. 펠, 당신까지 이럴 거예요!”
“응, 선택해, 엘리아.”
“엘리아 님! 빨리요!”
울상을 짓던 엘리아가 힐끗 샤미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두 손 위에 턱을 괴고 구경하고 있었다.
‘나 참, 이게 무슨 짓이람…….’
난처해하던 엘리아는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내려놓은 후, 두 손을 내밀었다. 그리곤 공손히 두 사람의 손을 함께 잡아 포개주었다.
“내 선택은 이래.”
“…….”
“내게 가장 소중한 건, 우리 가족이란다. 제레미.”
“치, 이런 건 비겁해요…….”
“하하하, 무승부구나. 제레미.”
펠릭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제레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아이는 펠릭스의 손길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전과 다르게 그는 감정 표현을 자주 해주었다. 제레미는 낯설지만 조금은 거친 듯한 그의 손길이 좋았다.
평화롭고 소중한 하루였다. 엘리아는 이 시간이 계속 이어지길 간절히 바랐다.
* * *
끼이익.
커다랗고 화려한 황금 마차가 북부 성 앞에 멈춰 섰다. 마차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날개와 나팔 부는 아기 천사들이 빼곡히 수놓아져 있었다.
“루프르브 제국의 황태자 체이스 로이드 전하십니다.”
펠릭스가 보좌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여유롭게 내려서는 체이스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반년 만에 북부를 찾아온 체이스의 안색은 화사했다.
짧은 금발과 청회색 눈동자, 가증스럽게 웃는 얼굴조차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지나오다 보니, 축하드려야 할 일들이 제법 많은 것 같던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로이드 부인?”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가 살펴주신 덕분에 북부 영지민들이 평안하게 지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 내 덕분이다? 뭐,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겠지요.”
엘리아가 흠칫하자 펠릭스가 둘 사이를 가르듯 팔을 내밀었다.
“……이쯤하고, 들어가지.”
체이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앞장서 성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펠릭스가 짙어진 눈빛으로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슬슬 제국에서 움직이리라 예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조심하였어도 다 통제할 수 없겠지.’
어차피 감출 수 없는 일이었다.
제국은 이미 북부의 동태를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웃 나라와의 교류도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어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펠릭스는 제 옆에서 조용히 걷는 엘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카타미아 왕국과 맺은 동맹은 분명 제국의 압박에서 큰 힘이 되어줄 터였다.
* * *
“자, 좋습니다. 식사는 든든히 먹었으니, 이제 우리 대화를 좀 나누어볼까요?”
“우리가 나눌 말이 있던가.”
펠릭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후후후, 형님. 북부가 많이 발전했더군요. 갑자기, 정말 놀랍게도 말입니다. 무엇이 이곳을 이렇게 변화시켰을까요?”
“글쎄.”
“아, 뭐 아름다운 곳이니, 방문하는 귀족들이야 많아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힘든 부분들이 많이 보이더군요.”
불시에 찾아온 황태자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신이 난 듯 북부를 입에 올렸다.
긴장한 엘리아가 두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다음 나올 말이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타국과의 거래는 폐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이지 않나, 싶은데.”
엘리아는 무표정한 펠릭스와 나긋한 미소를 머금은 황태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버려진 땅에 왜 이리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군.”
잠깐의 정적 끝에 펠릭스가 입을 열었다. 착 가라앉은 눈빛과 상반되게 그의 입술은 호선을 그리며 여유를 띠었다.
“왜, 북부가 제국과 대적할 정도로 커질까 봐 겁이라도 나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형님이 좀 걱정되는군요.”
“걱정이라. 고마운 말이군.”
황태자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황제의 심기가 불편해지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흥, 황제가 이곳에 심기가 불편할 일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군.”
“……알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카타미아,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황태자는 약점이라도 잡은 듯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아하, 존재조차 몰랐던 나라와의 거래까지 신경 쓰고 있었군. 황제와 우리 황태자 전하께서 많이 심심하신가 보군.”
둘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지속되었다.
“형님. 어쨌든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저 폐하의 경고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경고라…….”
펠릭스의 말에 황태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였다.
“형님이 또다시 폐하의 심기를 거스를까 걱정이 되는군요. 저도 다 형님을 돕고 싶은 마음에 어쩔 수 없이 두 분 사이에 선 것 아니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싱긋, 웃는 황태자의 얼굴을 본 펠릭스가 쾅, 하고 식탁을 내리쳤다.
“날 돕는다고?”
“…….”
“내가 쫓겨나고, 네가 황태자로 책봉된 걸 잊은 건가? 그 뒤론 또 어땠지? 그런 주제에 감히 돕겠다고 말해?”
분노를 참지 못한 펠릭스는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발 네 주제를 알고 지껄여라. 만찬은 끝났다. 부인 그만 일어서시오.”
펠릭스가 엘리아의 손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켜 주었다. 엘리아는 황태자를 향해 인사를 올리곤 펠릭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엘리아가 뒤로 돌아 슬쩍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느긋한 미소를 띤 얼굴로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온 엘리아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펠릭스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당신, 괜찮은 거예요?”
“…….”
엘리아의 물음에 그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복도를 걸었다.
한참 말없이 걷던 그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엘리아.”
“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건 가족이랬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엘리아의 얼굴 위로 의문이 피어올랐다. 펠릭스가 천천히 뒤로 돌아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내 보금자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거 하나만 보고 여기까지 달려왔어. 내 사람들 그 누구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아.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제국에 속박된 채 살고 싶지도 않고.”
“펠…….”
진심이 담긴 말에 엘리아는 아무 말 못 하고 그의 이름만 부를 뿐이었다.
“난 이대로 가만히 모든 걸 빼앗기고 있진 않을 생각이야.”
“그럼요. 당신은 강한 사람이에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죠. 저는 그런 당신을 아니까, 믿어요.”
북부는 점차 힘을 키워 나가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제국에 대적할 정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엘리아는 그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곧 제국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는, 그것은 믿음이고 확신이었다.
펠릭스가 잡고 있던 손을 당겼다. 그 손에 이끌려 엘리아는 그의 품에 폭 안겼다.
그에게서는 언제고 맡았던 묵직하지만, 포근한 향내가 풍겼다.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어야겠어.”
엘리아는 가만히 그의 가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작은 창 위로 따사로운 햇살이 스몄다.
* * *
그날 밤, 펠릭스는 제국에 갈 채비로 바빠 엘리아의 침실에 잠깐 들렀다 급히 돌아갔다.
오랜만에 홀로 널찍한 침대 위에 앉아 있으려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제레미?’
그렇다기엔 늘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제레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엘리아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살짝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황태자가 서 있었다.
“황태자 전하…….”
당황한 엘리아의 표정을 보더니, 그가 활짝 미소 지었다.
*** “어디서 많이 본 상황 같은데, 그렇지 않나요? 그땐 여러 사람이 방해해서 제대로 이야기도 못 했는데, 이번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주변을 둘러보던 황태자는 다시금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송구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식당에서 다 하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이건 폐하께서도 모르는 일인데, 어떠신가요?”
“……대공님과 이야기 나누시지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황태자가 덥석, 닫히려는 문을 잡아챘다. 엘리아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비웃듯 황태자는 여유 있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펠릭스보다 짙은 청회색 눈동자는 밤중에도 번뜩거렸다.
“……돌아가 주세요, 전하.”
“후회하지 않겠어요? 제국이 북부를 어떻게 할 생각인지 궁금하지 않나요?”
엘리아의 두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제국의 침략, 그 참혹한 결과가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부인. 그리 떨지 마십시오. 다만 저는 북부를 살릴 제안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제안이요……?”
“그래요. 제안. 형님과는 도통 말이 안 통하니 이리로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이 궁금하기도 했다. 정말 방법이 있다면 16년 후 일어날 일을 막아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