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07)
  • 따스한 해님에 노곤노곤 몸이 풀렸다. 점점 팔다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잠이 쏟아졌다. 어머니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엄마, 고마워요…….’

    말을 내뱉으려고 했지만, 눈이 먼저 스르륵 감겼다.

    그날 제레미는 늘 꾸던 꿈을 꾸었다. 새카맣고 큰 박쥐들이 어머니를 홀라당 집어 가버리는 꿈이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구해줄게요!”

    어느샌가 훌쩍 자라난 자신이 아버지처럼 멋지게 반짝거리는 검을 들고 단번에 커다란 박쥐들을 베어냈다.

    그리고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는 어머니를 받아낸 뒤 멋지게 웃어주었다.

    “어머나, 늠름해라! 제레미, 정말 고맙구나!”

    “하하하, 저만 믿으세요. 어머니!”

    배실배실 웃음이 났다. 드디어 어머니를 구해냈구나. 세상이 보석을 달아놓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 엘리아는 느린 걸음으로 제레미의 침실에 다다랐다.

    오는 길에 앤드류와 유리가 너도나도 제레미를 옮긴다고 나섰지만, 기분 좋게 잠든 아이가 깰 것 같아 직접 방에 데려다주기로 마음먹었다.

    스르륵.

    최대한 조심조심 제레미를 침대에 눕히고는 뭉친 어깨를 툭툭 쳤다.

    “우리 제레미가, 좋은 꿈을 꾸는 모양이네.”

    헤실헤실 풀어진 입술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꽉 끌어안아 깨울 뻔했다.

    ‘피곤할 텐데, 푹 자게 내버려 둬야지.’

    그래야 하는데 눈처럼 새하얀 볼살에 절로 손이 뻗어졌다. 쿡쿡, 찔러대니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아웅, 너무 이뻐…….’

    엘리아는 이윽고 작은 콧방울을 한번 톡, 건드리고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계속되는 손길에 아이가 몸을 뒤척였다. 둥글게 몸을 말았다가 이내 짤막한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쭉쭉 빨기 시작했다.

    “푸후후, 그래, 아직은 아가지. 아우 귀여워!”

    엘리아는 자그마한 손을 아이의 입술과 떨어뜨렸다.

    ‘그래도 이건, 좋지 못한 버릇이에요.’

    뽁,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에서 엄지손가락이 빠져나왔다. 아이의 미간이 살며시 좁혀졌다.

    “으응…….”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내던 제레미의 작은 손이 엘리아의 검지를 잡아 가져갔다.

    “아얌얌…….”

    “이런…….”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에 쉽게 손을 빼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좋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엘리아가 조심스럽게 제레미에게서 손가락을 빼내려 움직였다.

    “어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빼려고 할 때마다 더 힘을 주어 손을 꼭 잡았다.

    “제, 제레미……?”

    난감한 마음에 불러보아도, 아이는 단잠에 빠졌는지 미동이 없었다. 한참을 조심조심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활짝 열려 있는 문가에 펠릭스가 서 있었다.

    “나 참, 당신한테 나는 완전 뒷전인 건가?”

    “펠, 오셨어요?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엘리아가 제레미에게 손가락이 잡힌 채로 펠릭스를 바라봤다. 손가락은 점점 더 아려 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뭐, 하는 거지……?”

    “그게, 제레미가 잠이 들었는데, 손가락을 놔주지 않네요.”

    난감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펠릭스가 침대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상체를 기울였다.

    한동안 바쁜 탓에 서로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니, 그의 체취가 오늘따라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제레……!”

    굵직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한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펠릭스는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쉿! 안 돼요. 겨우 잠들었단 말이에요. 오늘 여러 일이 있었거든요. 이것 좀 봐요. 웃고 있잖아요. 이런데 어떻게 깨워요.”

    소곤소곤 중얼거리며 다시금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보는 사람까지 흐뭇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럼 깰 때까지 이러고 있을 작정인가?”

    “어, 어쩔 수 없죠. 살짝 아리긴 한데, 괜찮아요.”

    “어쩌지.”

    “네? 뭐가…… 펠?”

    “오늘은 내가 당신을 독점하고 싶은데.”

    펠릭스는 엘리아의 반대편 손을 꾹 움켜쥔 채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살갗에 와 닿은 감각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

    ‘뭐, 뭐지……. 왜 이렇게 얼굴이 뜨겁지?’

    고작 손등 키스일 뿐인데, 카타미아 왕국에 있었을 때처럼 온몸이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랐다.

    “그래도, 그래도 안 돼요! 제레미가…….”

    “흐음, 안 깨게 떼어낼 수 있다면?”

    “그렇다면 뭐…….”

    엘리아의 답변에 펠릭스가 씨익, 미소 지었다. 그리곤 주변을 훑어보더니, 이내 깃펜을 집어 들었다.

    “펠?”

    펠릭스가 하나둘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제레미의 손가락을 떼어냈다. 그 모습이 살짝 어이없어 절로 웃음이 났다.

    “아이들은 참 순수하지. 대체할 만한 게 있으면 뭐든 행복해하니까 말이야.”

    손가락을 뗄 땐 잔뜩 미간을 찌푸리던 아이는 다시 깃펜을 잡자 금세 미소를 지었다.

    “하하, 정말이네…….”

    “이제 됐지? 엘리아.”

    “어어? 잠, 잠깐……!”

    펠릭스는 덥석 엘리아를 품에 안아 들고 문밖으로 나섰다. 엘리아는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 위에 묻었다.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앤드류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유리가 온몸을 비비 꼬면서 알 수 없는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아아, 또 내일이면 다들 놀리고, 이상하게 웃으며 쳐다보겠구나. 내가 못 살아.’

    “……제발 아무도 보지 못하게 가장 가까운 침실로 가주세요.”

    “그래. 뜻대로 해. 엘리아.”

    머리 위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왠지 밤이 길어질 것 같았다.

    * * *

    북부에 온 지도 어느덧 1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이능 덕분인지 어느샌가 북부에도 오목한 겨울눈이 자라났다.

    “샤미르, 이미 건강해진 것 같은데, 아직도 하루에 한 번은 꼭 포션을 먹어야 하는 거니?”

    “그럼요. 이렇게 온전히 계절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다 그 포션 덕분인걸요?”

    정원에서 제레미, 샤미르와 함께 차를 마시던 엘리아는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직 초봄이라 살짝 추웠지만, 더는 북부에 눈만 내리지 않았다.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었고, 내내 언 땅 위에 쌓여 있던 눈들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펠릭스가 공수해 오는 제로석으로 포션을 만들어 꾸준히 복용한 지도 어느덧 3개월이 되었다.

    ‘이능을 세세하게 조절하는 게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날씨가 바뀌어야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영지민들은 눈이 오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며 신이 은총을 내렸다 감격하고 있었다.

    “아, 아무래도 대공님께서 제로석을 가져올 때마다 마물과 싸우는 게 걱정이 되어서…….”

    말을 하다 보니 부끄러워져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엘리아의 수줍은 태도에 별 표정이 없던 샤미르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제가 볼 땐, 마물들이 오히려 대공 전하를 피해야 할 것 같던데요.”

    “응? 그게 무슨 소리니?”

    “저번에 보니 마물을 맨손으로 찢어 죽이시던데. 뭐 기생형 마물이라 크기가 조금 작긴 했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던데요.”

    샤미르는 마물을 마주했던 순간을 떠올리면서도 태연했다.

    “…….”

    담담한 샤미르의 말에 엘리아와 제레미는 말문을 잃었다.

    “아, 하하. 괘, 괜한 걱정을 했네, 내가…….”

    “……그걸 샤미르도 봤어? 무, 무섭지 않았어?”

    제레미는 경악한 표정을 짓더니 슬금슬금 엉덩이 걸음으로 엘리아 쪽으로 몸을 옮겼다. 다리가 땅에 닿지 않는 탓에 의자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모양새가 되었다.

    “흥, 뭐 그런 걸 가지고. 전하께서는 강한 분이라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엘리아는 그런 모습의 샤미르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애어른은 저런 아이를 보고 하는 말일까.’

    그러고 보니, 펠릭스와 샤미르에 대해 나누었던 말이 떠올랐다.

    “엘리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

    “……저는, 그 아일 믿어보고 싶어요.”

    그게 엘리아가 펠릭스와 함께 내린 결론이었다. 여전히 미스터리하지만 믿음이 가는 아이였다.

    엘리아는 다시금 샤미르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아이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곧이어 샤미르와 눈이 마주쳤다.

    “흠흠.”

    꿰뚫어 보듯 올곧은 눈빛에 괜히 헛기침을 쏟아내며 찻잔을 들었다.

    “샤미르.”

    “네?”

    “……혹시나 고민이 생기면, 언제고 내게 말해주렴.”

    너무나 성숙해서 잠깐씩 아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샤미르가 잠시 눈을 깜박거리더니 픽, 미소 지었다.

    “친절하시네요. 심술궂은 제레미가 왜 엘리아 님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요.”

    “당연하…… 뭐, 뭐야!”

    옆에서 커다란 쿠키를 와작와작 깨물어 먹던 제레미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꽤 큰 소리에 샤미르가 두 귀를 막았지만,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아이들은 투닥거리면서도 꽤 잘 붙어 다녔다.

    “제레미, 부스러기가 다 묻었잖니.”

    엘리아가 웃으며 손수건을 꺼내 들어 제레미의 볼을 닦아주었다.

    “그래, 나를 빼놓고 나누는 사교 모임이 꽤 즐거운 모양이군.”

    고개를 들어보니 펠릭스였다. 그의 음영 진 얼굴 위로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부쩍 이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이 늘었다.

    “펠, 왔어요? 호호호, 당신은 늘 바쁘잖아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펠릭스가 바쁜 건 사실이었지만, 그는 밤에라도 짬을 내어 침실에 자주 찾아와 주었다.

    “바쁘긴 해도, 당신이 부르면 내가 가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일하고 있는 사람을 어, 어떻게 불러요!”

    “불러. 당신이 불러주면 기분 좋을 것 같은데.”

    아이들이 들을까, 작게 속삭이는데 펠릭스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제레미는 살짝 불만 어린 표정이었고, 샤미르는 구경하듯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아 님!”

    “으, 응?”

    제레미가 의자 위에서 폴짝 뛰어 내려와 엘리아와 펠릭스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버지예요, 제레미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