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07)
  • 마물 때문에 설산만 오르지 못할 뿐, 이미 온천, 어패류, 농도 짙은 얼음을 변이시켜 그것을 주 상품으로 관광하러 온 귀족들에게 팔고 있었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얼음 조각부터 나무로 만든 장신구까지 북부만의 정취가 담긴 상품들이 영지민들 손에서 속속 나왔다.

    관광을 온 귀족들에게도 반응이 무척 좋아 영지민들은 더욱 의욕을 얻어 상품 개발에 힘쓰게 됐다.

    “마님, 그러니까 여긴 제게 맡기십시오.”

    “고마워요, 앤드류.”

    엘리아는 물건이 가득 쌓인 창고에서 벗어나 곧장 제레미가 있을 연무장으로 향했다.

    끼이익.

    엘리아가 연무장의 문을 천천히 열며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다.

    ‘제레미는, 어디에…….’

    그러나 제레미는 보이지 않고 대련을 지켜보는 듯 탈의한 기사들이 동그랗게 모여 있는 모습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 “도련님, 힘내십시오!!”

    “이야, 데니스 저놈 애먹는 거 봐라. 어휴, 도련님을 내가 이렇게 잘 가르쳤다니까?”

    ‘도련님?’

    엘리아가 동그란 눈을 깜박거리며 기사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제레미……?”

    우락부락한 사내들을 제치고, 그 안을 들여다보니 제레미가 데니스와 목검을 맞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엘리아의 등장에 신나게 대련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제레미와 데니스는 여전히 결투에 집중하고 있었다. 맞부딪힌 목검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세상에, 제레미 몸이…….’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제레미의 몸 이곳저곳에 멍이 들어 있었다.

    “도련님! 데니스! 대련을 잠시 중단한다!”

    엘리아를 발견한 부단장이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럼에도 둘은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사람처럼 멈추지 않고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검을 피하고, 막고, 또 찔렀다.

    심각한 표정을 짓는 엘리아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던 부단장이 계속되는 대련을 중단시키고자 앞으로 다가설 찰나였다.

    “괜찮아요. 내버려 두세요.”

    “네, 네?”

    “이건, 이 대련은 제레미의 뜻인 거죠?”

    엘리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목검을 곧잘 다룰 줄 알게 되시더니, 대련을 자주 청하십니다.”

    “……저 정도로 진지한 눈빛은 처음 봐요. 그저 내 품에 쏙 들어오는 아가일 줄로만 알았는데.”

    대련에 집중하는 아이의 머리카락에서는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일 이후 심경의 변화가 크신 것 같습니다. 저번에 도련님께서 마님을 구하는 꿈을 반복하여 꾼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가요.”

    “감히 도련님께 이런 말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누군갈 지키고 싶다는 그 마음이 제 눈엔 참 기특합니다.”

    “네, 정말 ……기특하네요.”

    부단장의 말을 들은 엘리아가 후끈거리는 눈시울에 얼른 감정을 추슬렀다.

    타닥, 탁!

    목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쿵!

    “하아, 하아, 하아.”

    제레미는 데니스의 목검에 떠밀려 저만치 날아갔다.

    “헉, 허억, 진짜, 하, 실력이 많이 느셨네요.”

    숨이 턱까지 차오른 데니스가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하아, 당연하지!”

    바닥에 누워 숨을 고르는 제레미의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띠어져 있었다.

    “……자자, 다들 물러가. 오늘 수련은 이게 끝이다!”

    부단장이 크게 외치자 기사들은 엘리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제레미.”

    엘리아가 제레미에게 다가섰다.

    누운 채로 그녀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가 햇살에 반사되어 말간 빛을 띠었다.

    “엘리아 님!”

    아이가 엘리아의 얼굴을 보고는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더니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소리쳤다.

    엘리아는 제레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어? 더러운데…….”

    “제레미 옆이라 괜찮아.”

    “푸! 그런 게 어딨어요.”

    “후후후, 여기 있지.”

    제레미에게 보여주듯 엘리아는 바닥에 누웠다. 연무장의 바닥은 딱딱하고 냉기가 서려 있었다.

    “일어나요! 또 아플라고!”

    아이의 투덜거리는 소리에도 엘리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에 제레미도 살짝 망설이다 다시 몸을 뉘었다.

    곧이어 엘리아가 제레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레미. 우리 오늘 놀러 갈까?”

    “……놀러요? 아버지도 가요?”

    “아버지는 바쁘셔. 그냥 우리 둘이서 갔다 오자.”

    “흐음, ……안 갈래요.”

    “왜?”

    “나쁜 놈들이 또 나타나면…….”

    제레미는 끝까지 말을 잇지는 못했다.

    “이런, 제레미. 나쁜 일이 매일 일어나지는 않는단다.”

    “제레미두 알아요! 나쁜 일은 맨날 생기지 않는다는 거.”

    “맞아, 그러니까 놀러 가자. 제레미와 같이 가면 너무 행복할 것 같은데, 가기 싫어?”

    “가기 싫은 거 아니에요.”

    “그럼 갈까?”

    “그건…….”

    아이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엘리아 님, 흑, 제레미는, 훌쩍, 놀러, 가는 건, 으윽, 자꾸, 자꾸 꿈을, 꿔서, 무, 무서…… 허어엉!”

    엘리아와 마주 보고 누운 제레미가 입술을 꾹 다물고 눈물을 참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엘리아의 품에 고개를 푹, 묻은 채 울고 또 울었다.

    “흐어어엉, 엘리아 님! 엘리아 님! 엘리아 니임! 흐윽…….”

    엘리아는 그런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아이의 눈물이 그녀의 앞섶을 적셨다.

    “흡, 흐, 흐어엉.”

    서럽게 울어대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아이에게 그 사건은 커다란 공포처럼 가슴속에 남아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렇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그것도 모르고 내가 우리 제레미 힘들게 했네. ……미안해. 앞으로는 참지 말고 이렇게 이야기해 줄래? 혼자 끙끙 앓고 있는 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

    엘리아는 제레미의 등을 토닥이며 이야기했다.

    “이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 * *

    “……싫어요!”

    제레미는 엘리아의 작은 등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도리질 쳤다.

    “왜애? 제레미에게 건강해진 모습 보여주고 싶었는데, 업히는 게 싫은 거야?”

    엘리아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졌다.

    “그건 아니지만…….”

    “제레미 업으면 좋은 냄새가 나서 기분이 좋아져. 그래서 업어주고 싶었는데.”

    “좋은 냄새요?”

    “응, 우리 제레미한테서 아주 달콤한 아가 냄새가 나거든.”

    제레미의 입술이 살짝 실룩였다. 엘리아가 우리 아가라고 할 때마다 진짜 아기가 된 것 같고 기분이 묘했다.

    “제레미 아가 아니에요. 그, 그래도 자꾸 부탁하니까…… 이번만이에요.”

    다정하게 아가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제레미는 살며시 그녀의 등에 업혔다.

    “읏차. 가볍네!”

    엘리아의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제레미의 코끝을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조, 좋은 냄새…….’

    그녀는 자신에게서 아기 냄새가 난다며 좋아했지만, 오히려 엘리아에게서 항상 포근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한창 킁킁거리며 어깨 위로 볼을 비비적거렸다. 제레미는 따듯한 등에 더 바짝 붙어 온기를 느꼈다.

    ‘……엄마.’

    “엘리아 님.”

    “응? 왜 그러니, 제레미.”

    “엘리아 니임!”

    “응?”

    “엘리아 니임!”

    “후후, 그래, 제레미.”

    나긋나긋 대답해 주는 목소리가 좋아서 고개를 살짝 들고 계속 불러보았다. 엄마라고 하고 싶은데, 뭔가 부끄러웠다.

    ‘엄마, 내가 꼭 지켜줄게요.’

    속으로만 말했을 뿐인데 양 뺨이 달아올라 얼굴을 다시 어깨에 푹 묻었다.

    “제레미, 피곤하지? 방으로 갈까?”

    “……아니요.”

    엘리아의 등이 너무 포근해서 이대로 침실로 들어가긴 싫었다.

    “흠, 그럼 잠깐 바깥에 나갔다 올까?”

    “……힘들잖아요.”

    “후후후, 아니, 아니야. 이렇게 제레미가 목을 감싸주니까 기운이 막 나는데.”

    “정말요?”

    “응, 그럼. 자 이제 나가볼까?”

    엘리아가 제레미를 데려간 곳은 아도니스가 피어 있는 정원이었다.

    햇살이 제레미의 사랑스러운 분홍 머리카락을 비추었다. 따스한 열기를 머금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었다.

    “엘리아 님, 북부가 이상해요.”

    “그래? 북부가 이상하니?”

    “네. 따뜻하고, 포근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아요.”

    “후후후, 제레미 이게 봄이라는 거란다.”

    “봄, 이요?”

    “그래.”

    제레미는 빛을 받아 너울거리는 엘리아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주변을 둘러보니 앙상한 나뭇가지는 그대로지만 바닥에 쌓인 눈이 점점 녹고 있었다.

    “봄은, 이상해요. 마음이 몽실몽실거려.”

    “그래? 제레미의 봄은 그렇구나?”

    “……엘리아 님은요?”

    “으음, 글쎄……. 내게 봄은 제레미의 말랑하고 부드러운 볼 같기도 하고, 이렇게 어깨를 간지럽히는 제레미의 사랑스러운 핑크빛 머리카락 같기도 하네.”

    “그, 그게 뭐예요!”

    등에서 느껴지는 아이의 열기가 엘리아에게도 전해졌다. 그게 또 너무 귀여워 기분 좋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호호호, 시간이 늦어져서 오늘은 못 가지만, 다음에는 아빠랑 같이 꼭 놀러 가자?”

    제레미는 엘리아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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