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07)

“따뜻해.”

제레미의 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제레미, 우리 전에 놀러 가기로 약속했잖아. 대공님이 돌아오시면, 다 같이 갈까?”

“아버지가 있다면, 좋아요. 아버지는, 강하니까…….”

더듬더듬 이야기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잠에 취해 있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제레미의 따스하고 말랑한 볼 위에 볼을 맞대보았다.

‘아아, 이런 게 행복이구나.’

마음을 터놓을 가족이 있다는 게, 사랑하고 걱정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게, 그게 행복이구나.

엘리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제레미와 엘리아는 함께 잠이 들었다. 두 사람을 감싼 말간 햇살은 꽤 오랫동안 그들 곁에 머물렀다.

* * Ri*

작은 소동이 있고 며칠이 흘렀다. 펠릭스는 의외의 인물들과 함께 대공 성으로 돌아왔다.

“로이드 부인, 잘 지내셨나요?”

“……스카디.”

스카디는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밝아진 얼굴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는 오래 쌓인 오해가 겹쳐,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사죄만으로 없던 일로 해달란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저, 정말 죄송하다고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었습니다.”

스카디 뒤에 서 있던 사내들 역시 고개를 숙였다.

타다다닥!

순간, 뒤에서 우당탕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카디와 그 외 사람 모두 엘리아의 뒤쪽을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이 나쁜 놈! 당장 엘리아 님한테서 떨어져어어!”

흥분한 얼굴의 제레미가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는 엘리아의 앞에 서고는 작은 목검을 치켜들었다. 눈앞에 씩씩대는 아이의 어깨가 보였다.

“‥……그날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도련님.”

난처한 얼굴로 스카디가 사과하며 아이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목검을 꾹 움켜쥔 아이가 놀랐는지 히익, 거렸다.

제레미는 스카디를 향해 목검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리고는 무섭지만 용기를 내서 소리 질렀다.

“저, 저리 가!”

팔짱을 낀 채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던 펠릭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제레미를 안아 들었다.

“힉, 아버지…….”

달랑 몸이 들린 제레미가 버둥거리며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나쁜 사람들이에요. 몰아내야 해요.”

아이의 눈에 분노가 들어차 있었다.

그런 아이의 눈을 펠릭스가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레미, 그때는 오해가 있었단다. 이제 그 오해가 풀리고 우리에게 용서를 빌고 있구나.”

“그, 그치만……!”

“그래, 네 마음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장차 북부의 주인이 되려면 때론 관대하게 사람을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아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아이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런 아이의 곁에 엘리아가 다가와 분홍 머리카락을 살짝 헤집었다.

“제레미, 정말 고마워. 하지만 지금은 아빠 말씀을 따라주겠니?”

엘리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카디.”

갑작스러운 부름에 스카디의 금안이 엘리아에게 향했다.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엘리아의 말을 기다렸다.

“제레미를 다치게 한 건, 솔직히 용서할 수 없어요. 제게 누구보다 소중한 아이라서요.”

“……그렇지요.”

“네. 그래요. 하지만 북부를 위해서 힘써주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요즘 어려운 마을 주민들을 도와주고 있다면서요.”

“베풀어주신 은혜가 있으니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요. 지금은 힘들지만 이렇게 조금씩 서로를 생각하며 도와준다면 좀 더 시간이 지났을 때, 그땐 웃으며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엘리아의 말에 스카디는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입술만 움찔움찔 떨었다.

스카디가 다시금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뒤에 선 무리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속죄하면서 살겠습니다. 로이드 부인.”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된 뒤 엘리아는 제레미를 안은 채 옆에 서 있는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품에 안긴 제레미는 조금 불편한지 연신 몸을 꼼지락거렸다.

“한데, 오늘 무슨 일로 다 함께 오신 거예요?”

“카타미아 왕국과 동맹 조약을 맺으면서, 바바리안의 도움을 받아보려고 해.”

“음, 그렇군요.”

엘리아는 아직 스카디에게 가졌던 나쁜 감정이 다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북부를 위해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이 나쁘지 않았다.

“다들 배고플 거야. 이만 들어가도록 하지.”

펠릭스와 엘리아, 아이가 나란히 앞장서고, 그 뒤를 스카디의 무리가 따랐다.

“내가 없는 동안 뭘 하며 지냈지?”

펠릭스는 엘리아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을 주어 그녀를 가까이 끌었다.

“아이, 펠…….”

그가 허리를 지분거리자 엘리아가 그의 손을 살짝 쳤다.

“크흠.”

“당신도 참, 하여튼 요즘은 카타미아 왕국에서 수입한 물품 목록을 일일이 확인하느라 좀 바빠졌어요.”

“그런 건 좀 앤드류에게 맡겨.”

펠릭스의 목소리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지만 안주인의 일이란 게 그런…….”

알콩달콩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잠시 주변을 의식하지 못하던 엘리아가 쏟아지는 시선들을 느끼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를 따라오던 앤드류는 물론이고, 스카디와 그녀의 무리 모두 흐뭇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번에 봤던 모습이랑 또 너무 다른 느낌이네요.”

“이 모든 게 마님의 노력이 아니겠습니까.”

이전과 같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짓는 스카디와 손수건으로 눈가를 훑고 있는 앤드류는 제법 장단이 잘 맞았다.

화끈, 달아오른 두 뺨을 느끼며 엘리아가 휙 고개를 돌렸다.

이 부끄러움은 그녀만의 것이었다.

옆에 있는 펠릭스를 바라보니 전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어쩜, 저런 소릴 듣고 태연하지?’

괜스레 홧홧한 뺨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열이 나는 것 같은데, 괜찮나?”

달콤한 목소리로 다정히 물어 오는 그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 뒤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신경 쓰였다.

“안 괜찮아요……. 두, 두 걸음만 떨어져서 걸어요.”

“왜?”

“다들 보고 있어서, 부끄러워요…….”

“나는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좋은데, 주변 신경 쓸 거 없어. 나한테만 집중하면 돼.”

“그, 그런 말은 밤에……!”

엘리아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이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엘리아?”

“잘못 말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래, 알아.”

“……펠, 정말…….”

울상 짓는 엘리아의 표정을 보곤 그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다고 했다간, 울겠군.”

“밤에 뭐 하는데요? 제레미도 할래!”

“…….”

펠릭스 품에서 대화를 듣던 제레미가 소리쳤다. 두 사람은 아이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해주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맨날 제레미만 빼고…….”

“제레미, 오늘은 다 함께 잘까?”

“네!”

울먹이는 제레미를 달래며 말하자, 펠릭스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어느 귀족 아이가 부모와 함께 잠을 자지?”

“언제부터 그렇게 예의범절을 따지셨다고요?”

“…….”

펠릭스와 투덕거리던 엘리아가 흥, 콧방귀를 뀌며 좀 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그와 떨어지려는 그녀의 움직임은 소용이 없었다. 펠릭스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어느새 엘리아의 옆에 섰기 때문이다.

부부의 뒤를 따라 걷던 무리는 그 모습에 모두 웃음을 띠었다.

“대공님께서 원래 저런 성격이셨던가요?”

앤드류에게 가깝게 다가선 스카디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짚고는 소곤소곤 물었다.

“어허, 이 숙녀분께서 어디에 손을 올리십니까.”

갑작스러운 스카디의 신체 접촉에 앤드류는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쿵쿵쿵!

언제나 찬 바람만 불던 북부에 여기저기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 * *

카타미아 왕국에서 돌아온 펠릭스는 쉴 틈이 없었다.

그는 바바리안의 단검 제조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필요한 물품을 조달해 주었다. 그리고 틈이 나면 제로석 채굴을 위해 기사단과 설산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 여정 사이 샤미르를 집으로 잠시 데려다주어 레이놀즈 부부를 안심시키는 것도 펠릭스의 몫이었다.

카타미아 왕국에서 돌아온 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모두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틈만 나면 연무장에 가서 나오질 않네……. 루카스도 없는데 말이야.’

엘리아는 요즘 제레미의 행보에 가장 신경을 쏟고 있었다.

향신료와 비단, 말린 양고기, 밀 포대를 살피며 장부를 적던 엘리아가 잠시 펜대를 놓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앤드류를 바라보았다.

“앤드류, 제레미가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근래 일이 많아서 도련님을 신경 쓰지 못한 것 같긴 합니다만 식사량도 평소보다 느셨고 수업도 꾸준히 받고 계십니다. 다시 한번 확인해 볼까요?”

앤드류가 심상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흐음, 아니에요. 제가 가봐야겠어요.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요.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다시 할까요?”

엘리아는 살짝 굳은 어깨를 풀어주었다.

“마무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어머? 아니에요, 내일 해도 충분히…….”

“마님, 맡겨주십시오! 능력 있는 집사 둬서 어디에 씁니까.”

앤드류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큼큼, 전하께서는 이것저것 시켜서 문제입니다만, 마님께서는 다 직접 하시려고 하셔서 문제입니다. 이렇게 무리하시면 전하에게 제가 문책을 듣습니다.”

앤드류의 익살스러운 만류에 엘리아가 싱긋 미소를 띠었다.

눈에 띄게 활발해진 북부에 마음이 앞서 뭐든 직접 하고 싶었다. 아름답지만 척박했던 북부는 점차 성장하고 있었다.

수입품으로 배급이 이전보다 더 원활히 이뤄지자 살림이 풍족해진 마을 사람들은 각자 북부에만 있는 특별함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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