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07)

아이의 포슬포슬한 머리카락을 쓰윽, 쓰다듬으며 물었다.

“좋다구요?”

“응. 좋아.”

“막, 막 제레미가 수업 안 가도 좋아요?”

“그건, 종종 있는 일 아니었니……?”

엘리아의 말에 제레미가 아니라고는 말 못 하고 볼을 부풀렸다.

푸시시, 볼에서 바람을 뺀 제레미가 잠깐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럼 제레미 옆에만 있으라고 해도 들어줄 거예요?”

“…….”

“그, 그건 싫어요?”

엘리아가 대답이 없자 제레미가 불안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아니, 싫지 않아. 나 역시 그러고 싶은걸.”

아이의 눈동자가 기쁨으로 반짝였다. 하지만 곧 근심이 있는 듯 제레미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레미 무슨 일이 있니?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네?”

“…….”

제레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아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침대 위에 앉았다.

“비밀이야?”

“네…….”

방금까지 즐거워하던 아이의 목소리가 잔뜩 침울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으음. 그럼 이렇게 하자. 지금은 묻지 않을게. 대신, 마음이 괜찮아지면 말해줄 수 있을까?”

제레미는 엘리아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은 이제부터 우리 둘이서 재미있게 놀아볼까?”

엘리아가 머리를 살며시 만지며 제안하자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거두고 씩 미소 지었다.

*** 엘리아는 제레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잠든 모습까지 확인한 후에야 겨우 쌓인 일을 처리하러 집무실로 향할 수 있었다.

집무실에서 일을 보던 엘리아는 간호하느라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자꾸만 눈이 감겼다.

자리를 비운 며칠의 공백 동안 앤드류가 급한 건 대부분 처리했으나, 남은 일이 제법 많았다.

‘잠깐 눈 좀 붙일까……?’

생각을 채 마무리하지 못한 엘리아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 * *

“엘리아 님!”

제레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니 제레미의 침실이었다.

“어, 어어?”

“제레미 다 나았어요. 봐요!”

아이가 침대에서 일어나 폴짝폴짝 뛰었다.

‘어어? 어제도 제레미가 이 말을 했었는데…….’

한참 뛰다가 별 반응이 없는 엘리아를 보곤 제레미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엘리아 님!”

“아,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이제 아프진 않지?”

“네! 하나두요.”

“그래. 그럼 오늘은 제레미가 다 나은 기념으로 차를 마시며 놀까?”

“……에이, 그게 뭐야.”

“음, 그럼 책 읽기?”

“시시해.”

“어어? 시시하다고?”

똑같은 반응.

당황한 엘리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가 멍하니 있는 엘리아의 품에 파고들었다.

아이와의 놀이가 끝나고 엘리아는 제레미가 잠든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집무실로 돌아왔다.

집무실 책상에 앉으니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눈을 떠보면 또 제레미의 침실이었다.

“제레…….”

“제레미가 다 나았구나!”

“네!”

제레미보다 먼저 말한 엘리아는 화사하게 웃으며 기뻐하는 제레미가 귀여운 한편, 혼란스러웠다.

엘리아는 제레미와의 놀이에 쉽사리 집중할 수 없었다.

반복되는 하루에 고민하던 엘리아는 똑같은 잔에 똑같은 차를 따르는 유리의 팔을 붙잡았다.

제레미는 신이 났는지 의자에 앉아 양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유리, 뭔가 요즘 이상한 느낌 들지 않니?”

“네? 무슨 느낌이요? 마님도 돌아오시고, 도련님도 쾌차하시고, 이보다 좋은 날은 근래에 없었는걸요? 대공 전하께서 건강해진 도련님의 모습을 보고 가셨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펠릭스는 한결 안색이 편안해진 제레미를 확인한 직후 카타미아 왕국으로 떠났다.

“……그래. 그렇지.”

두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대답하는 유리에게 더 물을 것도 없어 보였다. 고개를 돌려 제레미를 보았다.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엘리아에게 쿠키 한 조각을 내밀었다.

카타미아 왕국에서 챙겨준 수많은 간식거리 중 하나였다. 엘리아는 아이가 건네준 쿠키를 받아 들었다.

“……제레미, 오늘은 차를 마시고 바로 일을 해야 할 것 같아.”

“그럼, 제레미는요……?”

“미안하구나. 대신 내일 많이 놀까?”

“……네.”

아이가 삐쭉 입술을 내밀며 대답했다. 통통한 볼 위로 두둥실, 분홍빛이 스몄다.

‘혹시, 제레미의 이능이…….’

차를 다 마시고, 안정을 취하라며 제레미를 침대 위에 눕힌 다음 집무실에 가기 위해 문밖으로 나섰다.

‘발이, 무거워…….’

엘리아가 어지럼증을 느끼며 몸을 휘청거렸다. 또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애써 잠을 쫓아낸 그녀 앞에 어느새 심각한 표정의 샤미르가 서 있었다.

“샤미르구나. 제레미 보러 왔니? 하아, 어서 들어가 보렴.”

“네.”

샤미르가 제레미의 침실 안으로 총총 걸음을 옮기고 엘리아도 막 발걸음을 뗄 때였다.

“……도련님, 네 짓이지?”

“무, 무슨 말이야!”

“넌 함부로 이능 쓰면 안 된단 말이야.”

“이능이라니, 제레미는 그런 거……!”

속삭이듯이 말하는 샤미르에 이어 억울함 가득한 제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놀란 엘리아가 다시 침실로 들어섰다.

“그게, 무슨 말이니? 샤미르.”

제레미는 침대에 앉아 엘리아와 샤미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곧이어 작게 한숨을 내쉰 샤미르가 털썩,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계속 이 시간대로 돌아오는 거, 그리고 최근 이능을 발현시킨 사람이 제레미뿐이라는 거. 그래서 그냥 짐작했을 뿐이에요.”

“그렇긴 하지만, 뭔가 이상해. 다른 사람은 시간이 되돌아온다는 걸 몰랐는데, 왜 우리만…….”

당황스러워하는 엘리아를 잠시 바라보던 샤미르는 자신이 추측한 바를 털어놓았다.

“이능 보유자이기 때문이겠죠. 제레미가 인식하지 못하고 이능을 썼기 때문인 걸 수도 있어요. 이능은 보유자가 마음먹기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거든요.”

아이는 샤미르를 노려보는 듯하다가 엘리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샤미르 널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대공님께 들었어. 납치당했을 때도 네 도움이 컸다지? 고마워.”

“……그러기 위해서 온 건데요, 뭐. 밥값은 해야죠.”

그 나이답지 않은 능청스러운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저나, 제레미의 이능이 시간과 연관된 것이라니…….”

엘리아는 한숨을 쉬며 제레미의 곁으로 다가갔다.

“엘리아 님. 제레미는 실수라도 이능을 사용해선 안 돼요. 단 한 시간도요.”

엘리아는 샤미르의 진지한 눈빛을 바라보았다.

“문제가 있구나? 알려줄 수 있겠니?”

“특수한 이능이라 남용하면 몸이 남아나질 않을 거예요.”

매일 이능을 쓴다면 언젠가는 마나가 소진되겠지. 엘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제레미는, 이능 쓴 적 없어!”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레미가 몸을 반대편으로 돌린 채 웅크리고 누웠다.

“그건 네 생각이고, 도련님.”

“샤, 샤미르 넌 나가!”

투덕거리는 샤미르와 제레미 사이에서 엘리아는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작게 움츠린 몸을 보니 가슴 한편이 따끔거렸다. 엘리아는 돌아누운 아이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제레미, 왜 그런 거야? 내게 알려줄 수 있겠니?”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에, 엘리아 님이랑, 같이 있고 싶다고…….”

“……응?”

“또 사라질까 봐…… 무서웠어요.”

아이의 속삭임은 엘리아에게만 들릴 듯 아주 작았다.

달칵.

“……전 이만 돌아갈게요.”

문득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샤미르가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제레미는 어느샌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었다.

엘리아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서 제레미의 옆에 누웠다.

“제레미. 절대 어디 가지 않을게. 약속할게. 언제고 나는 이곳에 있을 거야. 그러면 좀 안심이 될까?”

“……아뇨.”

“어어,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 제레미가 안심이 될까?”

꿈틀꿈틀.

이불이 들썩거렸다. 제레미의 작은 몸이 꼼질꼼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불 틈새로 빼꼼 얼굴이 내밀어졌다.

“……안아주세요.”

잔뜩 얼굴을 붉힌 아이는 좀처럼 엘리아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내 아이라니…….’

그 모습이 사랑스럽고 또 애틋해서 기꺼이 그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숨 막혀요…….”

투덜거리면서도 아이는 엘리아를 밀어내지 않았다.

“후후후, 우리 제레미가 그만하라고 밀어낼 때까지 계속 안아줄게.”

“……안 밀어낼 건데.”

“후후 그래, 그래. 잔뜩 안아줄게. 그러니까, 이대로만 자라주렴.”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그게 가장 바라는 것이었으니까.

구름이 걷히고, 해가 떴다. 제레미의 침실 안으로 따스한 북부의 아침 햇살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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