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07)
  • “……?”

    “일부러 맞네.”

    흉흉한 눈을 빛내는 펠릭스를 바라보며 엘리아가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로브에 달린 모자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대체 어디로 안내해 달라고 한 거예요?”

    엘리아가 뜨거운 햇살에 손으로 그늘을 만들며 물었다. 그런 엘리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본 펠릭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없고, 조용한 곳.”

    “아하…… 풋!”

    엘리아는 웃음이 비실비실 삐져나왔다. 그런 그녀가 얄미운 듯 흘겨보던 팰릭스가 그녀의 모자를 더 꼭 여며주었다.

    “크흐흠, 지나치게 사람이 없고 조용한 곳에 안내해 주셨네요?”

    더 이상 참지 못한 그녀의 웃음이 사막 한가운데 커다랗게 터져 버렸다. 못마땅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상하게 이 상황이 참을 수 없이 웃겼다.

    마차에서 내릴 때 당황해하던 그의 표정이 어찌나 볼만하던지.

    “이게 그렇게 웃긴가. 다시 돌아가야 할 판인데.”

    “……풋. 크흠. 죄송해요. 그래도 무척 아름다운 곳이네요. 아무것도 없긴 한데, 그냥 가기는 아쉬운데요.”

    “흠, 그건 또 그렇네.”

    엘리아의 말에 넓게 펼쳐진 사막을 바라보던 펠릭스가 앞으로 걸어갔다.

    “펠? 어디 가요?”

    “이리 와, 엘리아.”

    펠릭스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쉽다며. 좀 걷다가 돌아가지 뭐. 빨리 돌아오라는 수작질에 놀아나기도 싫고.”

    초저녁이라 그런지 열기를 머금은 바람이 살며시 불어왔다.

    모래바람도 함께 일렁이는 탓에 시야가 흐려지기도 했다.

    그래도 엘리아는 즐거웠다.

    엘리아와 펠릭스의 발자국이 움푹 패는 곳곳마다 다시금 모래들이 덧씌워졌다.

    이곳에서 괴로웠던 모든 기억 역시 모래가 덮이듯 옅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생각나는 사람.

    “펠, 제레미는 지금쯤…….”

    “흠, 어젯밤에도 내내 아이들 소식을 묻더니, 내가 옆에 있는데도 제레미 생각뿐이군?”

    “후후, 뭐 그건 아니지만, 보고 싶고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수 없네요.”

    “다치지 않았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여기 일만 마무리되면 서둘러서 돌아갈 거야.”

    걸음을 멈추고 그가 살짝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니 지금은 나한테 집중하는 게 어때?”

    “펠, 당신도 참…….”

    “난 그러고 싶은데.”

    그는 한 손을 들어 더위에 붉어진 엘리아의 뺨을 쓸어내렸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깊었다.

    휘위잉!

    펠릭스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던 그때 세찬 모래바람이 불어와 엘리아는 눈을 꽉 감아버렸다.

    “……엘리아.”

    “네?”

    엘리아는 바람에 차마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다급하게 느껴졌다.

    “우리,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억지로 눈을 뜬 엘리아는 펠릭스가 바라보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휘이잉, 휘잉.

    모래 폭풍이 휘몰아쳐 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나직이 욕설을 내뱉던 그가 냅다 엘리아를 두 팔로 안아 들고는 마차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발 빠른 펠릭스 덕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마부 역시 마차 안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다.

    모래바람이 사정없이 마차를 흔들고 때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차의 흔들림이 멈추었다. 엘리아는 펠릭스의 품에 안겨 팔딱대는 심장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괜찮나?”

    펠릭스의 물음에 엘리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정말 무섭네요. 거대한 호토르 덕에 날아가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러게. 저놈을 내준 이유가 있었나 보군.”

    이를 빠득, 가는 펠릭스를 올려다본 엘리아가 작게 웃음 지었다.

    “이런 건 예상에 없었겠죠. 호토르는 그냥 이곳에서의 이동 수단이라 내준 걸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다른 남자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 부인?”

    펠릭스의 눈썹이 사선으로 일그러졌다. 엘리아는 슬쩍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밖으로 나서는 마부를 바라보았다.

    문 틈새로 어느샌가 어둠이 짙어진 사막이 보였다.

    “어어? 펠, 저것 봐요!”

    “말 돌리…….”

    엘리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부가 마차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모래 언덕이 보였다. 일곱 빛깔로 빛나는 언덕 위로, 환한 보름달이 큼지막하게 떠 있었다.

    엘리아는 재빨리 그의 품에서 벗어나 마차 밖으로 나왔다. 그 뒤를 따라 펠릭스도 걸음을 옮겼다.

    태양이 사라져 조금은 열기가 가신 사막.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쏟아질 듯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고, 물결치듯 겹겹이 싸여 있는 사막 위에는 무지개가 뜬 듯 보였다.

    “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신의 형상을 목격한 사람처럼, 그 아름다운 경관에 전율이 느껴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래 사이 섞인 광물 조각들이 밤하늘의 빛을 받아 만들어낸 장관이었다.

    펠릭스는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과 맞닿은 모래 언덕, 그리고 그 앞에 선 엘리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금빛의 긴 머리카락이 사방에 흐드러진 빛에 반사되어 유려하게 물결쳤다.

    “펠! 봐요.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이 또 있었어요.”

    그는 천천히 엘리아 옆에 섰다. 그리고 푸른 눈동자에 어둠과 빛무리가 섞여 일렁이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예쁘네.”

    “네. 정말요.”

    엘리아의 시선은 내내 사막의 풍경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펠릭스의 시선은 줄곧 풍경이 아닌 엘리아를 향했다.

    ‘엘리아.’

    펠릭스는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밤새 같이 있었고, 이렇듯 지금도 함께인데 자꾸자꾸 보고 싶었다.

    ‘옆에 있는데도, 금세 사라져 버릴 것 같아.’

    그래서 그는 엘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곧 그에게로 향했다.

    “후후후, 왜 나만 봐요?”

    곧 엘리아가 수줍게 웃으며 펠릭스를 응시했다.

    “그러게. 왜 당신만 보게 되지.”

    “…….”

    이 남자는 이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엘리아.”

    “네?”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붉어진 얼굴을 감추듯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렇듯 그녀에게 놀러 가자고 제안한 것도, 모래 폭풍처럼 몰아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설산에서, 시체를 발견했는데 검에 베였을 때보다 더 숨을 쉬기가 힘들더군. 당신이면 어쩌나.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그랬던 것 같아.”

    “…….”

    “예상대로 당신이 아니었는데, 마음이 놓이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불안하더라고. 수천의 군단 앞에서도 손 하나 떨지 않던 내가, 그 자리에서 무너졌지.”

    나름대로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슬픔이 다시금 밀려오는 듯 펠릭스는 살짝 손을 떨고 있었다.

    “당신이 이렇게 만든 거야, 날.”

    펠릭스는 엘리아의 두 손을 꾹 움켜쥔 채 말했다. 가만히 고개 숙여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엘리아가 고개를 들어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물기에 잔뜩 젖어 엉망이었다. 잔뜩 일그러진 입매와 눈썹, 그리고 축 처진 눈꼬리가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제 손을 빼내더니 와락 그에게 달려들었다.

    펠릭스는 엘리아에게 두 뺨이 붙잡혀 강제로 입을 맞추어야만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였으나, 이내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허리를 덥석 껴안았다.

    사막에서의 키스는 조금 짰다. 엘리아의 입술을 먹는 건지, 눈물을 마시는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를 달래듯이 입을 맞추었고, 끌어안았고, 웃어주었다.

    “흐흐흑.”

    “왜 이렇게 울어. 예쁜 얼굴 다 상하게.”

    “미안해서요, 흑. 그것도 모르고, 흐윽, 당신한테, 동맹 맺자고……. 미안해요.”

    “흐응, 그럼 그거 취소해도 되나?”

    “…….”

    펠릭스의 물음에 엘리아는 잠시 움찔하더니, 말없이 울기만 했다.

    “그건 또 안 되나 보네.”

    훌쩍이던 그녀가 얄밉다는 듯 그를 밉지 않게 째려보았다. 그 모습이 또 이뻐서 빨개진 눈가에 응어리진 마음이 녹아내렸다.

    ‘당신은 알고 있으려나. 유일하게 날 이렇게 흔들 수 있는 사람은, 당신 하나뿐이라는 걸.’

    깨닫고 보니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스며들어 있었다.

    펠릭스는 인정했다.

    자신은 결국 그녀의 뜻대로 무엇이든 해주고 마리라.

    그는 우느라 빨개진 그녀의 뺨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 말간 얼굴 위로 여러 번 입을 맞췄다.

    *** 부우우웅-!

    커다란 뱃고동 소리가 엘리아의 귓전을 때렸다. 이제 떠나야 하는 시간이다.

    꽤 오래 머물렀는데도, 카타미아 왕국의 더위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카타미아 왕국, 다시 와?”

    선박 앞까지 배웅 나온 지브릴이 엘리아에게 물었다. 그의 눈빛이 절박해 보여 엘리아가 살며시 웃어 보였다.

    옆에서는 펠릭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비를 내리려면 제가 필요할 테니까요. 아, 그리고 저를 위해 싸워줘서 고마워요.”

    “……엘리아.”

    까만 눈동자 위로 점차 물기가 돌았다. 지브릴이 엘리아 쪽으로 두 팔을 뻗으며 한 걸음 다가와 그녀를 안으려 했다.

    “흑, 엘리아!”

    하지만 지브릴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고 장애물에 부딪쳤다.

    “아, 거기까지!”

    잠자코 지켜보던 펠릭스가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그녀를 재빠르게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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