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어 엘리아에게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버텨줘서, 그리고 그를 불러줘서.
“교황을 제외한 인원들은 모두 전원 포박했습니다.”
뒤에서 루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북부 기사단은 언제나 그랬듯 빠르게 전장을 수습했다.
펠릭스가 엘리아를 잠시 진정시키듯 다독이다 그녀 곁에 쓰러져 있는 지브릴을 발견하고 분노에 몸을 떨었다.
“……펠?”
펠릭스가 안고 있던 그녀를 놓았다. 그리고 온몸에서 살기를 내뿜으며 다가가 칼을 높이 들었다.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지만 용서할 수 없었다.
“헉! 안 돼요, 안 돼요. 펠…….”
엘리아가 다급하게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울먹거렸다.
“……이것만 말해, 엘리아. 당신 상처, 누가 그런 거지?”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모질지 못한 여자였다. 여린 여자, 그런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그가 아니에요. 다, 다 설명할게요…….”
그를 더 화나게 하는 것은 그 상황에서도 엘리아를 바라보는 국왕의 새까만 눈동자였다.
더듬으며 말하는 그녀의 잇새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신은…….’
머리끝까지 들어찬 분노를 겨우 식히며 검을 거두었다.
엘리아를 바라보는 국왕의 눈조차 도려내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후에 처리해도 늦지 않을 테니.
* * *
엘리아는 펠릭스에게 이곳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설명하다가 금방이라도 지브릴을 잡아먹을 듯한 펠릭스의 살기에 애를 먹었다.
“듣고 있는 거죠……?”
엘리아가 난감한 표정으로 묻자 펠릭스는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묻었다.
“……대공의 아내를 납치한 자와 동맹이라니, 글쎄.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라.”
“생각해 봐요. 북부에 이득이 될 거예요. 이곳은 비만 내린다면 식량을 풍족하게 수확할 수 있어요. 또 북부에서 반란을 도모한 세력만 처리해 준다면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곳이에요. 광물조차…….”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펠릭스는 엘리아를 향해 물었다.
“당신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이곳과 교류를 맺고 싶은 건가?”
“……전, 전 그래요. 지브릴 전하가 절 납치한 건 맞지만 제게 이런 짓을 한 건 교황이고, 그자를 이대로 내버려 두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북부의 이익도 포기하고 싶지 않고 말이에요.”
“……당연히 교황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지.”
잠시 펠릭스는 말이 없었다. 그는 엘리아에게서 시선을 돌려 카타미아 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교황 말고도 더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지 않나.”
지브릴을 바라보는 펠릭스의 눈빛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납치한 건, 잘못이다. 사과한다.”
이에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지브릴이 풀 죽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게 다인가?”
“미안하다.”
지브릴은 화를 내는 펠릭스보다는 엘리아의 눈치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
세 사람 사이에 정적이 맴돌았다. 그동안 엘리아는 간절한 시선으로 펠릭스를 올려다보았다.
사과는 사과고 이 동맹은 반드시 성사되어야만 했다. 추후 제국이 북부를 침공할 때 큰 지지대가 되어주리라.
“후, 나는 도무지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군.”
“펠…….”
그가 엘리아의 목과 어깨에 둘러진 붕대 언저리로 손을 뻗었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모습으로 날 설득하는 건 너무 비겁한 일 아닌가?”
엘리아는 그 아파하는 시선에 또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알아, 이런 몰골로 당신을 설득하는 건 협박과 다름없겠지. 그래도 북부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미안해요. 당신 마음 알아요.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에요.”
엘리아가 그런 펠릭스의 손을 잡았다.
“당신 정말……!”
“펠…….”
펠릭스와 엘리아는 꽤 긴 시간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후…… 그래, 내가 졌어. 당신 뜻대로 해.”
잠시간의 정적이 끝이 나고 펠릭스의 선언이 들렸다.
“엘리아?”
어설픈 제국어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지브릴이 한동안 말이 없는 엘리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그녀를 향한 신뢰를 담고 있었다.
아직 어린 왕이었다.
자신을 납치하였지만, 자국의 불쌍한 백성들을 위한 행동이었다.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분명 그는 북부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에게 시간만 주어진다면. 서로 신뢰를 쌓을 수 있지 않을까.
엘리아는 깊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일정 시기마다 카타미아 대륙 전역에 비가 내릴 수 있도록 도울게요.”
“엘리아!”
지브릴의 눈동자가 고마움으로 반짝였다.
“더 들어봐요. 지브릴 전하께선 빠른 시간 안에 모든 반란의 뿌리를 뽑고, 기반을 다지셔야 해요. 그것은 펠릭스가 도와줄 거예요. 그렇죠. 펠릭스?”
그녀의 말에 언짢은 듯 펠릭스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펠!”
“……알았어.”
그녀의 독촉 어린 눈빛에 펠릭스는 미적거리며 대답을 했다.
“고마워요, 펠릭스. 그리고 전하께서는 빠르게 왕국을 안정시키시고 북부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해 주세요.”
술술 말을 내뱉던 엘리아가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다시 한번 심호흡한 뒤 말을 이었다.
“만약, 만약에라도 북부에 위태로운 일이 생긴다면 적극적으로 저희를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의 조건이 어떠신가요?”
“좋다. 엘리아가 원하면 다 한다.”
지브릴이 입가가 찢어진 것도 잊은 채 엘리아를 향해 활짝 웃어 보일 때였다.
쿵!
탁상을 내리치는 소리에 엘리아가 깜짝 놀라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에 띄게 굳은 얼굴로 굵직한 눈썹을 꿈틀거렸다.
“거래는 대충 끝난 것 같으니, 카타미아 왕과 따로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겠지? 엘리아.”
펠릭스는 뒤쪽에 서 있는 루카스에게 눈짓을 했다.
“네, 네? 자, 잠시…….”
“나가시죠. 엘리아 님.”
“잠깐만요, 루카스! 저대로 두고 가면…….”
“엘리아, 나가서 기다려.”
펠릭스가 엘리아를 일으키고, 루카스가 그녀를 문밖으로 인도했다.
엘리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뒤를 힐끗힐끗 바라보았지만, 루카스의 덩치에 가려져 볼 수 있는 건 없었다.
쾅, 문이 닫혔다.
“대체 왜…….”
“저 정도면 전하께서도 많이 참으신 겁니다, 엘리아 님. 솔직히 저 역시 이해가 되진 않습니다. 어떻게 납치한 자와 동맹을 맺을 생각을 다 하십니까.”
루카스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엘리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짜피 이렇게 된 거 우리 북부를 위해서 좋은 조건의 거래를 할 수 있다면 더 좋잖아요.”
“휴, 엘리아 님. 이해는 못 하지만, 존중하겠습니다. 항상 엘리아 님 말씀 들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요.”
“……그,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럼요. 아마 전하께서도 그리 생각하고, 판단하셨을 겁니다.”
퍽.
엘리아가 루카스의 말을 곱씹을 틈도 없이 안에서 커다란 타격 소리가 들리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그만 가지.”
펠릭스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나오며 담담히 말했다.
“서, 설마 카타미아의 국왕을 때렸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그럴 리가. 대화를 좀 나눴을 뿐이야.”
그러기엔 제법 큰 소리가 들렸는데, 엘리아는 미심쩍은 얼굴로 펠릭스의 뒤를 따랐다.
그는 졸졸 뒤따라오는 엘리아를 힐끗 바라보더니, 그녀의 작은 손을 움켜쥐었다.
“……그보다, 상처를 확인해야겠어. 그리고 아무래도 이곳의 복장은 당장 갖다 버리는 게 좋겠군.”
그의 말에 엘리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 * *
“…….”
엘리아는 새하얀 붕대를 쥔 채 말없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펠릭스를 멋쩍게 바라보았다.
어색함을 감추려 웃음을 흘리다가도 그와 눈이 마주치면 괜스레 무안해져 고개를 숙였다.
“……이 지경이 됐는데, 괜찮다고?”
잔뜩 가라앉은 펠릭스의 표정에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엘리아는 그저 상처 가득한 몸을 작게 움츠릴 뿐이었다.
“……휴, 흉하죠? 그러니까, 보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서 괜한 말을 읊조렸다.
그의 눈에 비칠 제 모습이 눈에 훤했다. 낙인처럼 찍힌 검붉은 자국이 사선으로 길게 남아 있을 터였다.
“…….”
그는 말이 없었다. 그저 붕대를 쥔 손이 새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고, 이를 악물었는지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만 보는 게 좋겠어요.”
어깨 위의 흉터를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어깨를 봤으니 다른 곳은 보여주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전부 봐야겠어.”
“네? 그렇지만…….”
“보여줘, 엘리아.”
*** “…….”
“볼 자격 있잖아. 너무 늦었어도, 그래서 당신이 이 지경이 되도록 구하지 못했어도, 그래도 나는 당신 남편이니까.”
잿빛의 눈동자가 거세게 일렁였다. 머뭇거리던 엘리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붕대를 마저 풀었다.
지금 제 모습이 얼마나 엉망인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붕대를 전부 풀어낸 엘리아는 눈을 꾹 내리감은 상태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볼 자신이 없었다.
모든 걸 본 그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이 대륙을 싹 다 쓸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야. 당신을 납치한 왕도, 당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새끼도 전부.”
순간 팔목에 미약한 힘이 느껴졌다. 펠릭스가 엘리아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어느샌가 엘리아는 펠릭스의 두 다리 사이에 선 자세가 되었다. 엘리아의 배 위에 난 상처 위로 그가 얼굴을 묻어 왔다.
‘펠…….’
“내가 더 화가 나는 게 뭔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