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07)

<더는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동료를 일으키는 귀족들을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교황이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왕을 포박하고, 여인을 데리고 오거라.>

기사들이 움직였다. 왕을 감싼 기사단이 그에 맞서 싸웠다.

왕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세웠다. 카타미아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칼날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챙, 챙, 챙!

순식간에 여러 명의 기사들이 부딪치고 떨어져 나갔다.

“저, 전하!”

몇 번 검이 맞부딪히자, 왕은 잠시 숨을 헐떡였다.

그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아 날렵하게 움직여 한 사람씩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기 시작했다.

“헉, 허억, 헉.”

오랜 시간 연마한 검술인데도, 여러 명을 상대하려니 숨이 찼다.

어느샌가 교황의 기사단이 왕을 에워싸고 있었다.

훅, 들어오는 다수의 검을 피해 몸을 숙였다. 뒤쫓아오는 끈질긴 검날에 피부가 베이고, 찢겼다.

챙, 챙, 챙!

지브릴의 손발이 떨리고 있었다. 이마에서 흐르는 핏물이 시야를 가리고, 왕은 급기야 검을 붕붕 휘두르기만 할 뿐 기사들의 급소를 찾지 못했다.

기회를 보고 있던 교황의 기사가 잠시 비틀거리며 빈틈을 보이는 왕의 검을 쳐냈다.

챙그랑!

검이 바닥에 나둥그러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목에 날카로운 칼날이 겨눠졌다.

‘죽는구나. 이대로,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채.’

지브릴은 이 순간 자신의 죽음보다, 지켜줄 수 없는 엘리아에 대한 죄책감에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그때였다.

<크, 큰일 났습니다! 교황 성하! 알 수 없는 무리들이 성안으로 밀려들고 있습니다.>

기사 한 명이 교황에게로 헐레벌떡 뛰어와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냐?>

<곧 이곳으로 밀어닥칠 것 같습니다.>

그는 무엇을 보고 왔는지 두려움에 가득 찬 음성으로 부들부들 떨며 전하였다.

<이런 젠장!>

이에 교황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 차올랐다.

<운이 좋은 왕이시군. 하지만 곧 다시 볼 것이다.>

잠시 왕을 째려보던 교황이 무리를 이끌고 급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으앗!”

하지만 곧 비명과 함께 밀려나듯 일부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곧 일단의 무리들에게 제압당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지브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문 너머로 휘황찬란한 깃발을 쥔 북부의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브릴은 시야를 가린 핏물을 닦아냈다.

‘지켜냈어…….’

긴장이 풀린 왕의 몸이 맥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 * *

엘리아는 멍하니 문 쪽에 서 있는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눈 한 번 깜박일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간 그가 곧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펠릭스…….’

그가 왔다.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애가 타고, 눈물이 나지?’

며칠 새 그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그동안 잘 먹고, 잘 자길 기도하던 바람이 무색하게도 그랬다.

그의 한층 더 짙어진 눈동자가 엘리아에게 향했다.

그의 이름을 외쳐 부르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를 붙잡고 엉엉 울고 싶었으나, 둘 사이를 막아선 기사들 탓에 그럴 수 없었다.

북부 기사단이 펠릭스의 앞길을 가로막은 사내들을 모조리 치워 버렸다. 펠릭스는 빠른 걸음으로 엘리아에게 다가섰다.

“엘리아.”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흐릿한 시야에 제대로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봇물 터지듯 눈물이 흘렀다.

“엘리아…….”

그가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엘리아를 안아주었다.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엘리아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모진 채찍질에도 입술을 짓씹으며 참았던 울음이 그를 마주하자마자 터져 버렸다.

“……흑 펠! 펠!”

펠릭스는 말이 없었다.

그저 야윌 대로 야윈 성한 곳 하나 없는 엘리아를 더없이 소중하게 감싸 안을 뿐이었다.

* * *

“북서쪽 대륙에 카타미아라는 이름의 왕국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앤드류의 보고를 듣자마자 펠릭스는 서둘러 기사단을 모아 곧장 항구로 향했다.

“……?”

항구에 도착한 펠릭스의 눈앞에 보인 건 바다 위에 떠 있는 한눈에 보기에도 낯선 배 한 척이었다.

배 위에 내걸린 검붉은 깃발에는 왕관을 쓴 금장의 독수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전에 본 적 없는 문양이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전하.”

“……전투태세에 돌입하라.”

“알겠습니다.”

펠릭스의 명에 북부의 기사단이 일제히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펠릭스가 물끄러미 다가오는 선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박에서 한 사내가 두 손을 든 채 신호를 보냈다. 적의가 없다는 신호였다.

낯선 외양의 사내는 검붉은 피부에 얇은 로브만 달랑 걸친 상태였다.

배가 항구에 도착하고 기사들이 선박으로 들어가 안을 수색하는 동안, 낯선 사내는 순순히 기사에게 제압당하여 펠릭스 앞으로 끌려왔다.

그는 알 수 없는 언어를 연신 지껄이고 있었다.

“편지. 편지.”

어눌한 제국어가 그의 입에서 나오자 펠릭스가 사내를 붙잡은 기사에게 눈짓했다.

이에 기사가 잠시 팔을 풀어주자 사내가 서둘러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종이를 펼쳐보니 익숙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엘리아의 필체였다. 유려하지만, 결코 그 선을 넘지 않고 단정한.

“모두 저 배에 타라.”

“네, 네?”

펠릭스의 결정은 매우 빨랐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루카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펠릭스의 의지는 확고했다.

“카타미아 대륙으로 출항할 것이다. 그자가 안내해 줄 테니, 놓아주어라!”

“……네. 알겠습니다!”

낯선 사내가 끌고 온 배는 크고 매우 안정적이었다. 파도가 넘실거렸지만, 기사들을 전부 태우기에 충분해 보였다.

‘엘리아,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펠릭스는 간단한 문장 하나만 쓰인 종이를 손에 꾹 쥔 채 선박 위로 걸음을 옮겼다.

펠릭스는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뻑뻑한 눈꺼풀을 꾹 감았다. 엘리아의 얼굴이 잔상처럼 어둠 속에서 맴돌았다가 이내 흩어졌다.

‘드디어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가…….’

엘리아가 없으니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누군가 목덜미를 움켜쥔 것처럼 숨이 막히고 피가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아의 부재는 그녀가 그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 * *

‘엘리아…….’

수많은 사람들이 얽혀 있는 와중에도 펠릭스는 바로 엘리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

부서진 문 틈새로 보이는 상황은 가히 가관이었다.

엘리아는 시폰으로 이루어진 얇고 하늘하늘한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그 아래로 드러나 있는 어깨, 배, 다리가 모조리 새하얀 붕대에 감싸여 있었다.

‘엘리아……!’

펠릭스는 엘리아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져 말문이 턱 막혔다. 엘리아도 펠릭스를 발견한 것인지 눈물만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주군,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싹 다 죽여 버려!”

펠릭스는 이를 악문 채 루카스에게 명령했다.

“막는 놈들은 한 놈도 남김없이 베어버려라.”

“충!”

그의 명령에 기사단이 빠르게 그들을 막는 기사들을 베어나갔다. 순식간에 펠릭스가 엘리아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만들어졌다.

뚝, 투둑.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엘리아의 뺨 위로 굵직한 눈물이 방울지어 떨어졌다.

넘실거리는 눈가에 마음이 저렸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볼 위에 떨어지는 눈물을 쓸어주었다.

“엘리아.”

대체 무슨 일인지. 왜 그렇게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엘리아.”

지키지 못한 제 탓이다.

그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작고 마른 몸이 조금씩 들썩거렸다.

*** “……보고 싶었어요. 올 줄 알았어요. 고마워요. 와줘서…… 흑흑흑.”

그의 품속에 파묻힌 채 엘리아가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고맙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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