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07)
  • 실없는 생각이 들어 잠시 픽, 웃음 지었다.

    보고 싶다, 도저히 이 말밖에 내뱉을 수 없었다. 문득 제레미를 제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이전 생의 흐릿했던 기억이 이제야 또렷해졌다.

    ‘그때도 참 예쁜 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머니라는 이름 아래 아이를 대하기가 어려웠다. 세레나 빼고는 제대로 아이를 본 적도 없거니와 갑자기 어머니라니. 어색하고 또 실수할까 봐 두려웠다.

    결과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몸이 약한 탓에 제대로 돌봐주지도 못한 것 같은데, 아이는 어느샌가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래, 아이가 성년식을 치를 때쯤 날 어머니라 불렀었지.’

    그게 고맙고 또 미안해서 그날 밤엔 베개 위에 얼굴을 묻고 남몰래 눈물도 흘렸다.

    “이렇게 소중한 기억을 오랜 세월 잊고 있었네…….”

    엘리아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 * *

    그 시간 제레미는 사무치는 오한에 헐떡이다가 벌벌 떨기를 반복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잠이 들었다가도 새어머니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아 번쩍 눈을 뜨곤 했다.

    그러면 어둠이 주변을 맴도는 걸 보다가 다시 눈을 감길 반복했다.

    새벽에는 북부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해님이 몸속에 스며든 것처럼 뜨거웠다.

    그 열감에 앓듯이 잠에 빠져든 제레미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는 커다란 남자가 짙푸른 녹안으로 제레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 역시 제레미와 똑같은 분홍색이었다.

    분명 루시가 분홍 머리카락에 녹안은 제국 내 제레미 하나뿐일 것이라 장담했는데, 다 거짓말이었나.

    “안녕.”

    남자가 싱긋, 웃으며 제레미에게 인사했다. 제레미는 웃을 기분이 아니라 웃지 않았다.

    그저 그 남자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안녕, 제레미.”

    “누구세요?”

    제레미가 경계심 띤 얼굴로 물었다.

    “나? 그러게. 내가 누굴까?”

    “뭐야! 저리 가요!”

    제레미가 통통한 볼살을 살짝 부풀리며 말했다.

    “미안, 미안. 장난 안 칠게. 사실 나는, 바로 너야.”

    “나요?”

    “그래, 너. 그나저나 어머니는 잘 지내니?”

    “…….”

    남자는 제 할 말만 했다. 저 남자가 제레미 자신이라면 어머니는 엘리아 님을 말하는 걸까. 제레미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엘리아 님 말이야.”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제레미의 눈동자 위로 물기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없어요, 지금은 없어…….”

    그 말을 끝으로 제레미는 툭툭, 맑은 눈물을 흘렸다.

    한번 고장 난 눈물샘은 도통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남자가 무릎을 굽히고는 제레미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정신없이 우는 통에 그게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저 동그란 물건이 한 손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 들었다.

    “흐어어엉! 엘리아 님! 훌쩍, 훌쩍.”

    제레미의 앞에 어느 순간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오롯이 제레미 혼자 그곳에 남아 설움을 토해냈다.

    ‘보고 싶어……. 흐윽.’

    다정함이 한껏 묻어나는 푸른 눈동자가 좋았다. 늘 안아주고, 웃어주고, 챙겨주고, 자신이 심술을 부려도 사랑스러운 눈으로 타이르는 그녀가 너무 좋았다.

    ‘엄마…….’

    소중했던 만큼 더욱 크게 찾아온 슬픔에 아이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도련님! 도련님!”

    애타게 부르짖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레미는 작은 손을 허공을 향해 뻗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엄, 마……. 엄마.”

    “도련, 님. 흐윽…….”

    어머니의 목소리는 이보다 더 가냘팠다. 이건 루시의 목소리다. 그걸 알면서도 제레미는 계속해서 엘리아만 찾을 뿐이었다.

    * * *

    새벽이 되자마자 습격을 알리는 폭음이 들렸다.

    펑, 펑-!

    “전하! 교황과 귀족들이 기사단을 이끌고 왕궁에 침투하였습니다!”

    보좌관이 문밖에서 소리쳤다.

    예상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잠 한숨 자지 않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아 앞에선 담담한 모습을 유지했지만, 역시 그에게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손이 벌벌 떨려 왔다. 그가 비틀거리며 침상에서 벗어나 검을 들었다.

    ‘일단, 엘리아에게 가서…….’

    벌컥, 문을 열었다. 앞에는 바들바들 떠는 보좌관과 오랜 시간 함께해 온 기사단이 청동 투구를 쓴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저지하라. 그들을, 사력을 다해 막아야 한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다섯이 그를 보좌하기 위해 남고 나머지 기사들이 움직였다.

    <전하. 왕궁의 기사단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급히 피신하는 게 어떨지…….>

    <시간만! 시간만 벌어라. 곧 도움을 줄 이들이 올 것이다.>

    초조한 왕의 목소리에 보좌관도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왕은 옆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떤 얼굴로, 엘리아를 봐야 하지…….’

    움츠러드는 어깨를 다시 펴며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았다.

    왕은 카르카느 신의 은총 아래 백성들을 지키는 막중한 책임감이 있는 자리임을 배워 왔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손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백성들의 희망이자 자신의 마지막 희망인 그녀를 지켜야 한다.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지브릴 전하……?”

    엘리아가 연화를 꾹 움켜쥔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곁을 지키던 어린 시종들은 사색이 된 채 주저앉아 있었다.

    “엘리아.”

    “괜찮으세요……?”

    엘리아의 물음에 그는 찬찬히 엘리아와 시종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부왕이 부흥시켰던 왕국이 자신의 무능함으로 교황과 귀족에 의해 갈래갈래 찢기고 있었다.

    이를 막지 못해 이들을 공포에 밀어 넣고 말았다.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을까.

    파란 눈동자가 지브릴을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너무도 사랑했던 어머니,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 그를 걱정해서 편히 눈을 감지 못했던. 어머니.

    “괜찮다.”

    왕은 애써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노력하며 중얼거렸다. 엘리아가 성큼 그에게 다가섰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교황과 귀족들이 합심했다.”

    “네? 귀족들까지요?”

    “그래.”

    왕의 편에 섰던 소수의 귀족은 교황에 의해 이미 처단되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겁에 질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카타미아 왕국에 비를 내리게 한 것으로 그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겁이, 나시나요?”

    왕은 엘리아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겁나. 대성당을 적으로 돌렸는데, 어떻게 겁이 나지 않을 수가 있겠어. 그래도 좋은 왕이 될 수 있다고 말해준 당신만큼은 꼭 지킬 거야.>

    엘리아는 왕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굳은 결심을 다진 듯한 눈빛 덕분에 그가 자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쾅!

    문이 부서지며 사람들이 몰려들어 왔다.

    무장한 기사들 뒤에 뒷짐을 지고 선 파티마 알 사이디 교황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과 기사들이었다.

    성역을 지켜야 할 사람이, 제가 왕이라도 된 듯이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었다.

    <전하, 그 여인을 카르카느 대성당에 넘기십시오. 장난이 심하셨습니다. 이 사태는 저희가 조용히 무마시킬 테니, 순순히 따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교황은 마치 어린아이를 꾸짖듯 왕에게 이야기했다.

    <내 사람이다. 어디로도 데려갈 수 없다!>

    왕은 굳은 얼굴로 분노했다.

    <저 여인은 왕국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 그녀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다. 너희에게는 명분이 없다.>

    <신의 이름을 빙자했습니다. 이는 신을 모독한 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니, 대성당에서 벌하겠나이다.>

    <그대들은, 왕의 뜻에 반기를 드는 것인가.>

    왕은 죽일 듯 교황을 쏘아보았지만, 교황의 얼굴에는 비웃음만이 걸려 있었다.

    <왕의 뜻이라……. 하하하 언제는 전하가 무엇을 결정할 수나 있던 사람입니까.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저주받은 왕. 그것이 전하가 아니십니까.>

    지브릴은 이를 악물며 그들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탁.

    누군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엘리아가 서 있었다.

    엘리아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를 보며 그들이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싸우지 말라고 조심스레 속삭였다.

    “아니. 지켜.”

    지브릴은 자신에게 되뇌듯 중얼거렸다.

    ‘당신은 꼭 지키겠어.’

    제 손에 이끌려 들어와 모진 수모를 겪게 하였다. 또다시 그녀가 그들에게 끌려가게 할 수는 없었다.

    지브릴과 곁을 지키던 기사단이 교황 일행 앞으로 망설임 없이 다가서며 칼을 들었다.

    *** <이것은 명백한 반란이다. 정녕 카타미아 왕의 권위에 도전하겠다는 것인가.>

    왕은 교황 주위에 모여 있는 귀족들과 기사들을 한 명 한 명 새기듯 바라보며 소리쳤다.

    <하하하, 지금 협박을 하시는 겁니까. 주변을 보십시오. 고작 다섯의 기사들로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아, 아직 어린 나이라 상황 판단을 내리기 힘드신 겁니까. 그냥 얌전히, 저희의 뜻을 따르시지요.>

    <그래,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국왕 부부의 죽음 역시 그대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감추어야 하니까.>

    지브릴의 이야기에 귀족들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무슨 뜻입니까.>

    <그대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모함입니다.>

    <국왕 부부를 살해하고 본인들의 잇속을 위해 결탁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하늘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여유로운 태도의 교황과 달리 귀족파 세력들은 입술을 짓씹으며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