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07)
  • 그래도 왕은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백성들과 한 명, 한 명 시선을 맞추었다.

    <보아라. 자격 없는 신관들을 대신해 신이 나에게 선사한 기적을.>

    그 말을 끝으로 왕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받치듯이 들어 올렸다. 일종의 신호였다.

    엘리아도 그에 맞추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리쬐는 태양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지만, 마나를 최대한 끌어모았다.

    ‘이것만 무사히 끝내면, 곧 북부에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다들 보고 싶어…….’

    순식간에 이능이 발동됐다. 검은 먹구름이 태양을 감싸 안기 시작했다. 주변이 살짝 어둑해졌다.

    투둑, 툭, 투두둑, 쏴아아아-.

    구름 한 점 없던 카타미아 왕국에,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그들의 머리카락을 적시고, 뺨을 적시고, 어느새 온몸을 적셨다.

    <비, 비가…….>

    <와! 비, 비가 내린다.>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사람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하기 시작했다.

    하늘에선 구멍이 뚫린 듯 비가 쏟아졌다. 마르다 못해 바닥이 쩍쩍 갈라진 분수대에도 물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엘리아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걸로, 내 역할은 끝났어.’

    왕도 멍하니 4년 만에 내린 비를 맞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왕이시여! 진정으로 신의 대리자셨군요.>

    <오, 신이시여. 드디어…….>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거야!>

    그의 앞에는 그토록 바라던 백성들의 웃음과 환호가 가득했다.

    ‘그래, 이제 저주받았다는 자괴감과 고통 속에서의 발버둥은 끝났구나.’

    왕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쏟아지는 비가 그의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가 백성들 앞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에 찬 예식용 검이 덜그럭거렸다.

    좀 더 가까이 군중에게 다가선 왕은 백성들 앞에 굳건하게 섰다.

    비를 맞고 선 백성들은 지브릴의 부모님에게 살아생전 보여주었던 눈빛과 표정 아니, 그보다 더 황홀한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카르카느 신께서 나를 선택하셨고, 나의 왕국, 나의 백성 또한 나와 함께 이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신의 음성처럼 크고, 당당한 목소리였다.

    백성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열여섯, 즉위식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구나.’

    왕은 무릎 꿇은 제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무릎을 꿇은 여인을 보았다. 이것으로 그녀가 말했던 연극은 모두 끝이 났다.

    <저, 전하!!>

    백성들 뒤편에서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교황과 그의 사제들이 당황한 얼굴로 허둥지둥 달려오고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교황. 더는 백성을 내몰아 의식을 치르지 않아도 되네. 신이 나를 선택하셨고, 나의 백성을 불쌍히 여겨 이리 은총을 내리셨으니 말이야.>

    <…….>

    사제들은 사색이 된 채 허둥거렸고, 교황은 이를 악문 채 그를 노려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교황도 기쁘지 않은가?>

    <……!>

    교황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흠, 교황은 아닌가 보군. 표정이 영 좋지가 않아.>

    <……아닙니다. 전하. 감축드립니다.>

    이를 악물 듯 내뱉는 대답에 왕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걸렸다.

    <하하하, 교황도 이리 기뻐해 주니, 정말 기분이 좋군. 그래.>

    왕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제 백성들을 보았다.

    그들의 기도 소리와 환호성이 거센 빗소리를 뚫고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그는 즉위한 이래 처음으로, 백성들 앞에서 빈껍데기 왕이 아닌 진정한 국왕이 되었다.

    그리고 왕은 보았다.

    검은 로브 사이로 빗물보다 더 새파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미소 짓고 있는 그녀를.

    “……잘했어요.”

    사람들 틈에 섞여 있던 여인은 나직하게 웃으며 입 모양으로 분명 그리 말했다. 왕은 울컥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 *

    ‘다 잘 전달된 것 같은데…….’

    쏟아지는 비가 엘리아의 시야를 가렸다. 열기가 식는 이 느낌은 반가웠으나, 축축하게 달라붙는 옷이나 머리카락 따위가 몹시 신경 쓰이기도 했다.

    웅성웅성-.

    왕 앞에 나섰던 교황의 무리를 뒤로하고 왕은 뒤돌아 마차로 향했다.

    그들을 무시하는 듯한 왕의 모습에 교황은 부들부들 떨며 분기를 겨우 누르는 듯 보였다.

    왕의 걸음마다 전엔 없던 위엄이 느껴졌다.

    엘리아는 백성들을 따라 일어선 뒤 무리에 섞여 들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대성당 뒤편의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걸으며 미리 준비해 놓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 안에는 잔뜩 상기된 표정의 왕이 앉아 있었다.

    그는 잔뜩 젖은 엘리아의 몸에 큰 수건을 둘러주었다.

    “……정말 잘했어요.”

    “고마워.”

    잔뜩 들뜬 목소리가 기분 좋게 마차에 울렸다.

    “후후,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응.”

    왕이 총기 어린 눈망울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엘리아는 왕의 침실 옆방에서 머무르게 됐다.

    불시에 교황이 쳐들어올지 몰라 빠르게 상황을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왕이 백성들의 신뢰를 단번에 되찾았다. 교황이 이 상황을 가만히 넘길 리 없었다.

    “이거.”

    점심을 먹고 함께 차를 마시던 도중 왕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음, 연화. 불을 붙이면 쾅! 폭발해.”

    “이걸, 왜 제게……?”

    “위험하니까.”

    엘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길쭉하게 종이에 감싸인 연화는 끄트머리에 기다란 심지가 돋아나 마치 초 같았다.

    “이거, 절 납치할 때도 썼던 거죠?”

    “……이건, 다르다. 한참 약하다.”

    왕이 설명을 늘어놓았다. 엘리아는 살짝 눈에 힘을 주어 그를 바라보다가 움찔거리는 그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단 소리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에요.”

    “…….”

    엘리아의 말에도 미안한 마음에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조심스러웠다. 백성들 앞에서 보였던 카리스마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정 미안하시면, 저번에 말했던 거래나 긍정적으로 재고해 주시든가요.”

    왕은 멍하게 엘리아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다 해준다.”

    “네? 이렇게 쉽게요? 하…… 전하, 어디 가서 그러시면 안 돼요. 이런 건 신중하게 고려를 해보고…….”

    “대신, 나랑 결혼하자.”

    “네?”

    “그랬으면, 좋겠다. 이게 조건.”

    엘리아는 단호한 표정의 왕을 바라보며 황당함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전 이미 결혼했는데요……?”

    “나랑도 하자, 결혼. 카타미아는 다산의 상징. 결혼한 남자가 많은 여자일수록 명예와 부가 뒤따른다.”

    “……제국에선 한 사람과 결혼해요.”

    “…….”

    엘리아의 말을 들은 왕은 충격에 빠진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결, 혼을 하지 않고도 저는 충분히 카타미아를 도울 거예요.”

    침착하게 제 의사를 전한 엘리아가 물끄러미 왕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실망한 듯 한참 고민하더니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남편이 질리면 나한테 와라. 언제든 기다린다.”

    “아니요. 기다리지 마세요.”

    엘리아가 침체된 분위기를 전환하려 짐짓 엄격한 체하며 말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고개 숙인 그의 목덜미가 어느새 검붉은 빛을 띠었다.

    “괜찮으세요?”

    “위험하다, 웃지 마.”

    “네……?”

    황당하다는 듯이 묻는 엘리아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브릴 전하?”

    “가겠다!”

    “잠깐만요! 이거 사용하는 방법은 알려주고……! 우리 거래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느샌가 그녀의 앞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엘리아는 연화만 꾹 쥔 채 눈을 깜박거렸다.

    ‘그나저나 이건 대체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엘리아는 한참 이리저리 연화를 분석하듯 바라보았다. 살짝 벌어진 틈새로 흑갈색의 가루가 보였다.

    ‘신호탄과 비슷한 원리인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엘리아는 곧 흥미를 잃은 듯 연화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 “하아.”

    ‘거의 이 주는 지난 것 같은데.’

    제레미가 울고 있진 않을까, 걱정됐다. 펠릭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있는 내내 한시도 두 사람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보고 싶어…….”

    테이블 기대어 얼굴을 파묻은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펠릭스가 나를 얼마나 찾고 있을까. 그 사람 성미에 북부를 발칵 뒤집고도 남을 것 같은데…….’

    지금쯤 그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엘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창밖을 향했다. 북부와 다르게 이곳의 창문은 커다랗고 넓었다.

    창밖으론 커다란 태양이 이글거리며 땅을 지질 듯 불타오르고 있었다.

    ‘펠릭스가 이곳에 오면, 분명 덥다고 옷을 벗고 돌아다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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