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07)

그는 붙잡는 손길에 나직하게 읊조렸다. 머리는 엘리아가 아닐 것이라고 소리치는데, 가슴은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쌓인 눈 더미를 치우니, 몸집이 작고 가냘픈 여성의 신체가 드러났다.

“……하.”

긴 갈색 머리카락이었다. 엘리아가 아니다, 라는 사실에 안도한 펠릭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펠릭스는 바닥에 쌓인 눈을 두 주먹에 그득 끌어 쥐었다.

“아무래도 오래전 눈사태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하, 시신은 저희가 처리할 테니, 먼저 가십시오.”

넋을 놓은 그의 뒤에서 몇몇 기사의 안타까운 탄식 소리가 들렸다.

“엘리아…….”

펠릭스는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순간순간 그녀를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속이 타들어 갔다.

북부를 다 뒤집었는데도, 엘리아의 흔적이라곤 머리카락 한 올도 찾지 못했다.

항구에선 그날 외부로 나간 배는 한 척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로…….

“전하!”

“…….”

누군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감히 무슨 짓이냐고 소리쳐야 하는데,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차라리 왜 구하지 못 했냐고 소리치고, 제 목을 치십시오! 언제까지 정신 못 차리고 이러고 계실 생각이십니까!”

“…….”

펠릭스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일어섰다. 그가 걸친 외투에서 후두둑, 쌓였던 눈이 떨어졌다.

제 아들을 환하게 웃으며 안아주던 엘리아가 떠올랐다. 그다음부턴 모든 순간들이 겹쳐지며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황태자와 맞서던 엘리아, 제레미를 안은 채 두려움에 떨던 엘리아, 마물 앞을 막아서던 엘리아, 다리 위에 위태롭게 서 있던 엘리아. 그리고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던 엘리아까지.

루카스의 말마따나 처음엔 분노가 치밀었다. 왜 그녀를 지키지 못했지. 그리고 그건 펠릭스 자신에게도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가 동행했으면 반드시 지켜낼 수 있었을 테니까.

터지는 헛웃음과 함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늘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결단을 내린 뒤 움직여 왔는데 머릿속이 텅 빈 듯 멍하기만 했다.

펠릭스는 온몸에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는 루카스를 고요하게 내려다보았다.

“반드시, 목숨을 바쳐서라도 찾아내겠습니다. 그러니…….”

피융! 파바박!

“신호탄입니다! 마을에서 신호탄을 보냈습니다!”

앞장서서 주위를 살피던 기사의 외침이 들렸다. 그 소리에 펠릭스는 물론 모두가 일제히 말에 올랐다.

‘제발, 제발, 엘리아…….’

펠릭스는 달리고 또 달렸다. 쉴 새 없이 움직여야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사히 살아만 있어줘. 제발.’

항상 신에겐 원망만 쏟아냈던 그가 처음으로 소망을 담아 간절히 기도했다.

* * *

“조사까지 해서 절 납치했단 소리예요?”

“그렇다. ……미안.”

엘리아의 말에 왕이 단번에 울상을 지었다.

“하……, 아무리 절박하다고 해도 다시는 납치 같은 거 하지 마세요.”

엘리아의 격앙된 목소리가 조금 수그러들자 왕은 살짝 눈치를 보더니 얼굴을 폈다.

엘리아의 말에서 간단한 단어들만 알아듣는 줄 알았는데, 그는 제국어를 어눌하게 구사할 뿐 듣는 것은 그 뉘앙스까지 정확히 파악하는 듯했다.

엘리아는 고작 제 말 한마디에 이렇듯 다양한 표정을 짓는 왕을 보며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펠릭스와 제레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얼마나 나를 걱정하고 있을까. 계획을 더 서둘러야 할까.

“엘리아, 무슨 생각?”

“가족들이 걱정돼서요……. 그나저나 제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요?”

“음, 이틀 걸려.”

“이틀, 이틀이면…….”

약간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충분히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 예배식 맞죠?”

“맞다.”

“그러니까, 제 생각은 이래요. 지지를 받고 싶다면, 백성들의 신뢰를 되찾는 게 제일 중요할 거예요.”

“그렇지.”

“그러니까, 연기해요. 우리.”

“연, 기?”

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엘리아는 싱그럽게 웃으며 계획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엘리아에겐 간단하겠지만, 왕에겐 제법 어려운 일이 될지도 몰랐다.

백성들을 끔찍이 생각하는 왕에게 거짓말을 시키려니 영 마음이 좋지 않긴 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이건, 이건 엄청난 짓이다. 나는 이거 안 한다. 백성들은 거짓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렇죠. 그건 그렇지만, 그 날 진짜 비가 내릴 거예요.”

“비……?”

“네. 내일 4년 만에 카타미아 왕국에 비가 내릴 거예요. 그걸 바라고 절 데리고 오신 거잖아요.”

“……!”

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저, 정말. 가능한 거야?”

말까지 더듬는 그를 바라보며 안심시키듯 살짝 미소를 띠었다.

“그럼요. 앉아서 농땡이 피울 시간 없어요. 말도 맞춰야 하고, 기사단도 잘 구슬려야 하잖아요?”

“……알았다.”

엘리아의 말에 왕이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의문 섞인 눈빛으로 왕을 바라보자, 그는 에헴 헛기침을 하더니 덥석 엘리아의 손을 잡았다.

“거래, 성립.”

얼떨결에 그와 손을 마주 잡았다.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던 왕이 씨익, 천진하게 웃으며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그에게 웃어주었다.

“……전하께선, 앞으로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엘리아의 말에 왕의 입꼬리가 부끄러운 듯 살짝 내려갔다.

그의 구릿빛 목덜미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 * *

“그날 절 나무 밑동에 옮겨주던 자의 정보를 읽었어요.”

“…….”

신호탄에 미친 듯이 달려온 펠릭스는 샤미르 앞에 선 채 미간을 찌푸렸다.

범상치 않은 아이다, 그 정신없는 틈에 이능을 사용하다니 보통 어린애와는 확실히 달랐다.

“카타미아 왕국의 왕이었어요. 제국에서 북서쪽으로 항해하면 있는 대륙이라고는 하는데, 저도 잘은 몰라요. 그 사람은 왕국에 비가 내리길 간절히 바라고, 엘리아 님에 대한 악의는 없는 것 같았어요.”

이 말을 믿어도 될까. 옆에 있던 앤드류 또한 펠릭스의 안색을 살피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펠릭스가 형형한 눈빛으로 샤미르를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한 말씀 드리자면, 제 말을 믿고 안 믿고는 온전히 대공 전하의 뜻이에요. 저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구요.”

“……급박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이능을 사용해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이렇듯 명확하게 말하는 8살 아이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싶군.”

펠릭스의 날카로운 눈빛에도 샤미르는 전혀 겁을 먹거나 기죽지 않았다.

“모든 진실은, 때가 되면 밝혀질 거예요. 저는 그저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그때를 기다릴 뿐이고요.”

“……거짓이라면 네가 어린아이라도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다. 알고는 있겠지?”

“글쎄요. 그건 엘리아 님을 구하신 뒤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요?”

당돌한 아이의 눈을 유심히 바라보던 펠릭스가 앤드류에게 눈짓했다.

어쨌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카타미아 왕국에 대해 파악하는 일이었다.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앤드류는 어느 때보다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비가 내리길 바란다면, 해쳤을 리가 없어요.”

잠시 초조한 안색을 보이던 펠릭스가 샤미르의 말에 그녀를 잠시 응시했다.

“네 말대로 된다면 좋겠구나.”

아이의 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답답했다.

* * *

뎅- 뎅- 뎅-.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엘리아가 말라붙어 물 한 방울 없는 거대한 분수대를 바라보았다.

분수대 가운데에는 뿔과 날개가 달린 말을 탄 여신의 조각상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태양이 내리쬐는 그곳에서 엘리아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조각상을 향해 기도를 올린다고 했다.

엘리아는 많은 이들이 모인 이때가 제일 비를 내리기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잘, 해낼 수 있겠지?’

문득 드는 불안한 마음에 뒤돌아 건너편을 보았다. 그곳에는 왕이 예복을 차려입고 꼿꼿한 자세로 엘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편에는 결연한 표정의 기사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괜, 찮, 아?’

뭘 그렇게 열심히 뻐끔거리나 싶었더니, 엘리아를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살짝 손을 흔들어주자 그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조각상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리려다 분수대 앞에 서 있는 왕을 발견했다.

엘리아는 그 틈을 타 자연스럽게 그들 속에 녹아들어 갔다.

*** 왕에게 시선을 빼앗겨 아무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 하나같이 표정이 심상치 않아.’

다수의 기사만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왕에게 달려들 듯 적대감 가득한 눈빛이었다.

목구멍을 옥죄는 긴장감에 엘리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왕을 바라봤다.

<사랑하는 백성들이여.>

나직하게 울리는 왕의 목소리가 모두의 주목을 끌었다.

표정도 여느 때와 달리 담담하고, 진지했다. 어린 왕을 향한 걱정이 단번에 날아가 버리는 순간이었다.

<머지않아, 메마른 이 땅 위에 단비가 내릴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젠, 왕이 미치기라도 한 건가?>

<그러게 말일세.>

누군가는 혀를 찼고, 누군가는 구시렁거리며 왕을 힐난했다. 다들 믿지 않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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