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07)

왕궁 옆에는 거대하고 푸른 돔 형식의 건물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긴 어디예요?”

“저긴, 카르카느 대성당. 예배당.”

“어? 종소리 들리면 기도드리는 게 예배 아니었어요?”

“그건 그냥 기도 시간. 모두 일주일에 한 번씩 꼭 간다. 예배당.”

“아…….”

이곳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울리면 다들 그 자리에 주저앉아 기도를 올렸다.

‘예배당까지 매주 간다니……. 대성당을 이용한다면, 어쩌면…….’

엘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이능을 더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을지 고심했다.

꽤 오래 이동한 것 같은데, 호위 기사들과 왕은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인파가 제법 되는 거리로 들어서자, 구릿빛 피부의 행인들과 묘한 향신료 냄새, 그리고 용광로 같은 열기가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냈다.

“어디까지 가는 거예요?”

“조금만.”

유심히 주변을 둘러보던 엘리아는 이곳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저잣거리에는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도 누더기를 입은 사람들이 차양 밑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곳은…….”

“…….”

왕은 말이 없었다. 그저 넝마 같은 옷을 입고 구걸하듯이 매달리는 아이들을 애써 외면하며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엘리아.”

왕의 부름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되도록 보지 마…….”

그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왕궁과 대성당, 백성들이 사는 곳 사이에는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어느샌가 마을에서 벗어나 모래 언덕을 지났다.

그 아래로 움푹하게 파인 동그랗고 광활한 구덩이가 보였다. 마치 조각이 난 것처럼 땅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이건 대체 뭐죠?”

“……호수. 거울 호수. 다 말랐다. 일주일 전까지는 조금 남았었는데.”

“…….”

구덩이를 바라보던 왕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비도 안 오는데, 교황은 백성만 착취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

“……백성들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나는, 무능하다…….”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까 그렇게 외면한 거예요?”

“…….”

“그 거리에 나앉은 불쌍한 사람들을?”

“나는, 나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전하께서 교황과 다를 게 뭐예요? 그들을 착취하지 않은 거?”

왕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는 곧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부왕 같은 군주가 되고 싶었어. 백성들을 사랑하고 베풀 수 있는, 그런 왕이…….>

주먹을 꽉 움켜쥔 왕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엘리아는 제국어가 아니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순 없었다. 그러나 극도로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제가 머무르는 아르티젠 북부는, 십 년 전에 정말 아무것도 없었대요. 온통 눈, 눈, 눈뿐이라 그곳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지, 또 허덕이는 영지민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지 눈앞이 캄캄했대요.”

시간이 되돌아가기 전, 펠릭스가 해주었던 말이었다.

“제 남편은 그런 북부에서 제일 먼저 자신의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대요.”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면서요. 어쨌든 이곳은 이미 훌륭하게 갖춰진 왕국이니, 전하께서 노력하신다면 일으키기 더 쉽지 않겠어요?”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호토르에서 내린 엘리아의 금빛 머리카락이 허공을 타고 흩날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거래할까요.”

* * *

“제레미…….”

눈 위에 쓰러진 엘리아가 손을 뻗었다. 새하얗고 마른 손가락이 허공을 짚다가 이내 눈밭으로 떨어졌다.

제레미는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꿈틀거려 보려고 했으나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했다.

몸이 물에 젖은 것처럼 무겁고 아팠다. 울컥 눈물이 샘솟았다. 제레미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엘…… 리아 님……!”

“도련님? 세상에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루시는 깨어난 아이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에, 엘리아 님은? 샤미르는?”

“샤미르 님은 무사하셔요. 마, 마님께선…….”

루시가 끝말을 맺지 못했다. 제레미의 크고 녹음 짙은 눈동자 위로 물기가 어렸다.

루시는 글썽거리는 눈물을 아이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목을 몇 번이고 가다듬었다.

“……마, 말해. 루시! 엘리아 님은!”

“……전하께서, 꼭 모셔오실 겁니다.”

“거, 거짓말.”

“도련님!!”

제레미는 침대에서 벗어나 제 키보다 높은 손잡이를 잡아 문을 열고 문밖으로 나갔다.

어느 때보다 성안이 썰렁했다. 느리게 움직이던 아이의 발걸음이 다급해졌다. 뛰면 안 된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없었다.

잔뜩 가라앉은 분위기에 덜컥 겁이 났다.

쿵, 쿵!

“엘리아 님! 엘리아 님!”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제레미 왔니, 하고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아닌데, 이쯤에선 문을 열면서 무서운 꿈이라도 꾼 것이냐고 물어야 할 텐데.

벌컥!

다급히 문을 열어보았다.

“엘리, 아 님……?”

늘 환하고 따뜻했던 방이 아니었다. 어둡고, 냉기가 서린 채 텅 비어 있었다.

“도련님! 마님 거기 안 계세요! 아직 몸이 온전치 않으세요. 제발 진정하셔요. 네?”

“……그럼? 그럼! 흐윽, 흐아아아앙! 그럼 어디써! 흐극, 으. 나 나 때무니야? 내가 놀러 가자고 고집부려서…….”

“아니에요! 아니에요, 도련님. 아이고, 도련님. 우리 도련님 불쌍해서 어째. 흑…….”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제레미를 붙잡고 루시도 아이를 일으켜 줘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눈물을 흘렸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몰려든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눈시울을 붉힌 채 제레미를 달래려 노력했다.

모두가 무력하게 서서 슬퍼하던 때였다.

“시끄러워, 도련님. 엘리아 님 찾아줄 테니, 제발 그만 울어.”

울먹이고 있는 사람들 뒤로 샤미르가 나타났다. 잠옷 차림의 샤미르는 팔목에 흰 붕대를 감고 있었다.

“……흐윽, 끕, 끅! 네, 네가 어떻게!”

“그건,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루시 님. 부탁드릴 게 있어요.”

“으, 으응? 저요? 훌쩍.”

“대공 전하를 불러주세요.”

“네? 지금 전하께선 바쁘…….”

“제가 엘리아 님을 찾는 데, 도움을 드리겠다고 꼭 전해주세요.”

제레미는 글썽이던 눈물을 멈추고 곧장 샤미르를 바라보았다. 가끔 자신을 놀리기는 하지만 지금 보여주는 샤미르의 단호한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그 순간, 눈이 잔뜩 젖은 제레미가 벌떡 일어섰다.

“루시, 빨리! 빨리이!”

제레미가 루시의 어깨를 흔들며 재촉하자, 루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떻게 해서든 전하께 알려볼게요!”

루시가 복도를 내달렸다. 하도 허둥지둥 가는 바람에 몇 번이고 넘어질 뻔하다가 자세를 다잡으며 달렸다.

샤미르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잘 들어, 도련님. 운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이런 상황일수록 밥도 잘 먹고 잘 자야지. 그래야 엘리아 님이 진짜 위험할 때 도울 수도 있는 거야. 알겠어?”

“……으응. 알아써!”

샤미르가 양손으로 제레미의 어깨를 짚고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제레미가 물기 젖은 눈망울로 샤미르를 쳐다보았다.

“그래. 그나저나 아직 열이 있는 것 같아. 볼이 빨개.”

“……있지, 샤미르.”

“응?”

“에, 엘리아 님, 꼭 찾을 수 있겠지?”

“응. 꼭 찾을 수 있어.”

고개를 끄덕이던 제레미가 옅은 숨을 내뱉었다.

제레미가 몸을 잠시 휘청이더니 색색이는 숨소리와 함께 샤미르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었다. 그런 제레미를 다독여 주던 샤미르가 이내 사용인에게 쓰러진 제레미를 맡겼다.

* * *

루카스는 펠릭스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폭발로 낙마하여 부러진 팔과 찢어져 지끈거리는 머리를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함께 부족한 능력에 자기혐오가 잇따랐다.

놈이 얼굴에 둘러쓴 그 두건조차 벗겨내지 못했다.

루카스는 아직도 현장에서 목격한 커다란 폭발음과 재빠르게 움직이던 검은 무리를 기억했다.

사전에 납치를 계획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타이밍에 맞춰서 터지던 폭발과 숙달된 기사들을 능숙하게 정리하던 무리의 움직임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항구를 폐쇄한 이후로, 펠릭스는 미친 듯이 북부를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엘리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주군. 마음이 급하신 건 알겠습니다만, 이미 날이 저물고 있습니다.”

“…….”

“돌아가셔야 합…….”

펠릭스는 루카스의 만류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눈은 잔뜩 핏발이 서 있었다.

엘리아가 사라진 첫날, 면목이 없다는 루카스에게 펠릭스는 어떻게서든 찾으라고만 명했다.

그 이후 펠릭스는 나흘 내내 입을 꾹 다문 채 밤낮 가리지 않고, 수색에 앞장서고 있었다.

대공비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할 시간도 없었다. 이를 악문 루카스가 17년을 함께해 온 그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 설산 너머의 마을까지 다 뒤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희미하게 날리는 눈이 펠릭스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지친 말들이 푸릉, 푸릉 성을 냈다.

엘리아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대로 성으로 돌아가면, 정문에 나와 자신을 맞아줄 것만 같았다.

“엘리아…….”

타닥, 타닥, 탁.

펠릭스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말을 세웠다. 허연 입김이 허공을 타고 피어오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여, 여기 시체가 있습니다!”

뒤따라오던 기사단 중 한 명이 소리쳤다. 펠릭스는 재빨리 말을 돌려 기사단 앞으로 달려갔다.

눈 속에 파묻힌 허연 천 조각과 앙상한 팔 한쪽이 보였다. 펠릭스의 두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천천히 말 위에서 내려와 눈 위에 무릎을 굽혔다.

“전하! 저희가 하겠습니다!”

“……놔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