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07)
  • 서슬 퍼런 추위에 쓰러진 이후로 조금만 멍하니 있으면 항상 그렇게 물어봐 주곤 했는데.

    ‘제레미, 나 아파. 너무너무 아파. 그러니까, 내 손 좀 잡아주겠니. 그럼 다 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엘리아의 관자놀이로 물기가 스몄다. 억지로 고통을 삭이며, 그렇게 사흘이란 시간이 흘렀다.

    * * *

    새벽녘에 정신을 차린 엘리아는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쏟아질 것 같은 별과 그 가운데 떠오른 달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온몸이 불에 타버린 것처럼 아팠다.

    ‘돌아갈 거야. 돌아가고 싶어. 그러기 위해선, 카타미아 왕의 협력이 필요해.’

    이젠, 왕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야 할 시간이었다.

    * * *

    지브릴 왕은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숨을 멈추었다.

    ‘이리 연약한 여인을 어떻게 이 지경으로…….’

    대성당에 침입해 엘리아를 구출한 지 사흘이 흘렀다.

    엘리아의 몸은 교황의 만행으로 인해 혹독하게 망가져 있었다.

    ‘이 모든 게, 내가 자초해서 벌어진 일이란 말인가.’

    카타미아 왕국에선 점점 그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좁아지고 있었다.

    초조해진 그는 오래전 신의 권능을 선물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어느 대륙 이야기를 떠올리고 조사에 나섰던 것이었다.

    그렇게 루프르브 제국의 북부 대공비에게 비를 내릴 수 있는 이능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당신을 찾았지.’

    당초 지브릴은 그녀에게 이곳의 백성들이 얼마나 고달픈지 말해주고, 그 뒤 도움을 받고 싶을 뿐이었다. 원하는 것을 모두 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엉망으로 상처 입힐 생각은 결코 없었는데…….’

    지브릴은 자면서도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 여인의 곁에서 두 손을 모은 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부스럭거리며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

    지브릴은 눈을 뜬 채 고요히 그를 바라보는 여인을 보았다. 처음 보석처럼 반짝이며 말갛던 눈동자는 이미 생기를 잃어버렸다.

    처음보다 훨씬 마른 얼굴과 버석한 입술, 고통 탓인지 눈 밑에 늘어진 그림자가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시련에도 꺾이지 않는 난초처럼 고고한 분위기가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인데, 나 때문에…….’

    지브릴이 밀려드는 죄책감에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 고요한 정적이 머물렀다.

    “……미안.”

    지브릴이 어눌한 제국어로 중얼거렸다. 그는 언어에 제법 능통했지만, 제국어를 많이 접하지 못한 터라 아직은 단어를 나열하는 수준이었다.

    상체를 일으킨 엘리아가 아직 몸이 아픈지 미간을 찌푸렸다. 지브릴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손을 허공에서만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전하…….”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연신 헛기침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지브릴은 또다시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자, 푸른 눈망울이 집요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보, 보내줄게.”

    이렇게 해야 맞는 거겠지. 애초에 그녀가 타국에서 이토록 험난한 일을 겪고 그를 도울 이유는 없었다.

    ‘있던 곳으로 보내주면, 그럼 당신은 나를 조금쯤 용서해 줄 수 있을까.’

    현재 사방에 교황의 사람들이 깔린 상태였지만, 어찌어찌하면 배를 태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교황이 대놓고 그의 앞에서 엘리아를 뺏어 갈 일은 없을 테니, 시간이 걸리겠지만 해볼 만한 일이었다.

    “……제국에요?”

    그녀는 한참 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의문 가득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정말 갈 수 있어요?”

    푸른 눈에 잠시 빛이 감돌았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카타미아 전하?”

    그 부름에 지브릴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당장 돌아갈 수 있냐고 물었어요.”

    “당장? 당장은 어려워.”

    “……당장 가고 싶어요, 저는.”

    지브릴은 무력감에 두 손 위에 잠시 제 얼굴을 묻었다.

    “전하.”

    그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제겐 아이가 있어요. 남편도 있고. 많이 보고 싶어요. 그들이 보고 싶을수록, 절 납치한 당신이 미워요.”

    “…….”

    “미워도 어쨌든 일이 벌어졌잖아요. 언제고 저는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순 없어요. 그러니까, 도와드릴게요.”

    “도와, 준다고?”

    “네. 그러니까, 전하께서도 제가 빨리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약속해 줄 수 있어요?”

    지브릴은 그녀의 굳건한 눈빛에 감탄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지만 생기를 잃었던 눈빛은 다시 삶에 대한 갈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그녀를 더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브릴은 그녀에게서 아버지와 함께 왕국을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좋다.”

    지브릴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든 들어줄 요량이었다.

    “그러면 일단, 지금 할 일은…….”

    어떤 무리한 요구라도 좋았다. 그녀는 이곳의 백성들을, 지브릴을 살릴 사람이었다.

    “제게 밥부터 주시는 거예요.”

    “그래 좋다, 밥, ……응?”

    “밥, 이요.”

    “아…… 하, 하하.”

    절로 맥이 풀렸다. 알면 알수록 기묘한 여인이었다.

    * * *

    엘리아의 앞에 금세 고기가 듬뿍 올려진 수프와 빵, 우유가 놓여졌다.

    엘리아는 천천히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교황에게 맞을 때 입안의 여린 살이 터져 먹을 때마다 자잘한 고통이 밀려왔다.

    ‘비를 내리기는 쉽겠지만…….’

    그냥 내려선 안 된다. 백성들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 혹은 제3의 세력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서, 그가 능력 있는 왕이란 것을 증명해야 했다.

    한참 생각에 잠긴 채 수프를 떠먹던 엘리아가 그 위에 올려진 고기를 보았다.

    “그나저나 이 고긴 대체 뭐예요?”

    “양.”

    “야, 양이요? 양고기요?”

    “응. 더?”

    “배불러요. 더 못 먹어요.”

    “먹어.”

    “아니에요. 안 먹을 거예요.”

    엘리아의 단호한 거절에 왕이 다시금 축, 눈꼬리를 내렸다.

    엘리아가 먹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그가 우유가 담긴 찻잔을 내밀었다.

    “……감사해요.”

    “응.”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오랜만에 배가 부르니, 몸이 찌뿌둥하고 나른했다.

    바깥에는 어느샌가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엘리아는 푸르른 하늘 위로 점차 주홍빛 융단이 깔리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나갈래?”

    왕의 말에 엘리아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아서 걸을 수가……!”

    왕이 엘리아를 번쩍 들어 올렸다.

    “……전 이렇게까지 나가고 싶지 않아요.”

    버둥거리면 다친 몸 이곳저곳이 욱신거릴 게 분명해 가만히 안긴 채로 거절했다. 그런 엘리아를 왕이 힐끗 내려다보았다.

    “내려줄게. 곧.”

    “…….”

    왕이 어린 시종을 불러 무어라 지시를 내렸다. 아이가 허리를 깊이 숙인 뒤 나갔다.

    곧이어 침실에 금박 갑옷을 두른 사내들이 들어섰다. 안 좋은 기억에 엘리아는 움찔 몸을 떨었다.

    “……괜찮다. 내 사람.”

    작은 몸짓이었는데도 왕이 세심하게 일러주었다. 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기사단은 있는 모양이네…….”

    하긴, 그것조차 없으면 왕이 아니겠지. 왕이 걸음을 옮기자, 그들이 뒤를 따랐다.

    “어, 어디 가요?”

    “좋은 곳?”

    물음에 곧잘 대답은 해주는데, 아직 언어가 서툴러서 그런지 풀어서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피부가 어두워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엘리아를 안아 든 왕의 귓가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그가 엘리아를 내려준 건 다섯 사람을 다 모아둔 것처럼 거대한 짐승의 등 위였다.

    왕은 엘리아에게 큰 검은색 로브를 둘러주었다. 그 역시 로브를 둘러 얼굴과 몸을 가렸다.

    “자, 잠깐! 잠시만, 이게 대체 뭐예요……? 으윽.”

    엘리아는 당황해서 살짝 버둥거리다가 몸이 욱신거리는 탓에,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이 짐승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처럼 생긴 머리에는 거대한 뿔이 돋아나 있었고 뻣뻣한 털 대신 투박한 가죽으로 두른 몸이 엄청나게 단단했다.

    <호토르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엘리아는 그 짐승의 목줄을 붙잡고 중얼거리는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 얜 호토르. 순하다.”

    등 쪽을 왕이 팡팡 두들겨도 어떤 저항도 없었다.

    호토르는 그저 길고 가느다란 꼬리를 붕붕 흔들며 제 위에 올라앉은 날파리를 걷어낼 뿐이었다.

    *** “아니, 아무리 그래도…….”

    거절하려는 찰나, 왕의 인도에 따라 호토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장이 있어서 엉덩이가 아프진 않았다.

    더군다나 느릿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제법 안정감도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무더운 날씨에 닿는 가죽이 제법 시원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어때?”

    “……생각보단, 괜찮네요.”

    왕이 물었다. 무안한 마음에 살짝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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