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07)
  • “……끄윽, 끅, 부탁,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엎드려 있던 노인이 몸을 질질 끌며 어느샌가 엘리아 근처까지 다다랐다.

    “납치한 주제에 이런 말씀 드리기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만. 하나, 꼭, 꼭 들어주십시오.”

    “하아,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어요.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어서…….”

    “쿨럭, 쿨럭! 저, 전 어차피 늦었습니다. 지금 아니면,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쿨럭!”

    노인의 입에서 흐르는 핏물이 잿빛 바닥 위로 검붉게 자국을 새겼다. 엘리아는 씁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하아, 하아. 말씀드렸지요? 카타미아 왕국에는, 쿨럭, 비가 오지 않은 지, 4년이 흘렀습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노인이 다시 입을 뗐다.

    “후우, 4년 전에는, 당시 국왕 부부가 부패한, 교황과 그의 세력, 그리고 대성당을 해체하려 하셨습니다. 쿨럭, 그러던 중에, 독살을 당하셨지요.”

    “……독살이요?”

    “누가 봐도, 교황이 의심스러웠으나, 증거가, 없었, 크흑, 없었습니다. 건강하던 두 분께서 갑작스럽게 서거하시고, 쿨럭, 남은 건 지금의 지브릴 아비만유 전하셨지요.”

    노인의 말을 곱씹던 엘리아가 물었다.

    “그럼, 국왕 부부가 독살당한 직후부터 비가 오지 않았다는 소리예요?”

    “그렇, 습니다. 지금의 국왕께서 즉위하시고 내내 오지 않았습니다. 모든 백성의 비난은 애꿎은 국왕께 향하고 있습니다. 제발, 제발 도와주십, 시오.”

    “…….”

    “당신을 납치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겠지만 그분만이 이 왕국을 바르게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분이십니다. 쿨럭, 분명, 분명 지금도 저희를 구하러 오고자 노력하고, 계실 겁니다……!”

    한참 말을 내뱉던 노인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더니, 제 팔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손톱이 딱딱한 바닥을 벅벅 긁어 내리고 있었다.

    털썩.

    서서히 그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엎드려 있던 그의 몸이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엘리아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입을 벌린 채 핏물을 줄줄 흘리며 죽어버린 그를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교황이란 자가, 어떻게 사람을 저 지경으로…….”

    이를 꽉 문 채 중얼거리던 엘리아는 곧이어 들이닥친 교황과 기사들을 눈물이 잔뜩 맺힌 눈으로 노려보았다.

    <호오, 여인의 눈빛이 바뀌었구나. 놈을 끌고 와라.>

    교황이 손짓하자, 기사들 사이에서 가녀린 청년이 벌벌 몸을 떨며 나타났다.

    그는 곧 눈물을 떨굴 듯 울먹이며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그, 그러니까, 교, 교황님, 께서, 흐윽, 요, 요구를 들어주면, 재, 재, 재물과 지, 지위를 주시겠다고…….”

    겨우겨우 입을 여는 청년이 몹시 안타까웠다. 엘리아는 짧은 한숨과 함께 교황을 노려보았다.

    “……싫다고 전하세요. 무엇을 주든 수락하지 않을 거라고요.”

    발발 떨던 청년은 교황에게 엘리아의 말을 전했다. 교황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기다랗고 흰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이런, 거절하지 않길 바랐는데. 그래, 하는 수 없구나. 참회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네.>

    기사들이 검으로 엘리아의 몸을 묶은 밧줄을 끊어냈다.

    “까악!”

    깜짝 놀란 엘리아가 의자를 벗어나 벽을 향해 뒷걸음질 치며 소리 질렀다. 교황은 시끄럽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사들은 방 뒤편 벽에 십자 모양 나무 기둥을 가져와 고정시키더니 엘리아의 두 팔과 다리를 묶었다.

    “이게, 무슨, 무슨 짓이에요……!”

    기겁해 소리치는 엘리아에게 교황이 천천히 다가섰다.

    <그대에게 성흔을 새길 것이다. 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육체인가. 곧 신의 힘이 그녀에게 깃들어 대성당을 위해 희생할 것이다!>

    그가 떠드는 말에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교황이 손을 내밀자, 옆에 있던 흰 제복을 입은 사내가 그에게 커다란 상자를 내밀었다.

    교황은 상자에서 가죽으로 땋아 만든 기다란 물건을 꺼냈다. 채찍이었다. 그 물건은 잔뜩 물기를 머금은 채 무겁게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성물로 만든 채찍이다. 자, 신의 뜻을 받들 준비가 되었느냐.>

    흐흐흐, 그의 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쯧,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하는 수 없구나.>

    교황이 물을 머금은 기다란 채찍을 바닥을 향해 내리쳤다.

    쫘아악!

    커다란 파공음과 함께 딱딱한 바닥이 갈라지며 커다란 틈이 생겼다.

    “오, 오지, 마…….”

    그녀는 도리질 치며 몸을 버둥거렸다. 그러나, 교황은 엘리아를 향해 거침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후욱! 퍽!

    살갗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벌벌 떨리던 허벅지에 감각이 사라졌다.

    극심한 고통에 엘리아는 눈도 못 뜬 채 부들부들 떨었다.

    “끅, 끄윽, 끅!”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아 연신 헐떡거리자, 교황이 혀를 찼다.

    <고작 한 대인데, 곧 죽겠구나. 이리 연약해서야. 자, 이래도 카타미아 왕국을 도울 마음이 없는지 묻거라.>

    교황이 떠드는 소리가 제법 컸으나, 엘리아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이 시커멓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흑, 흐윽, 흑! 누, 누군진 모르겠으나, 제발, 제발 이들을 돕겠다고 하십시오! 이러다, 흑, 이러다 정말 죽겠어요!”

    겁에 질린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북부 성에 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제레미는 언제나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고, 펠릭스는 그런 두 사람 뒤에 서 있었다.

    ‘정말, 정말 죽고, 싶지, 않은데…….’

    그 뒤로는 샤미르, 유리, 앤드류, 루시, 그 밖의 사용인들과 몇몇 영지민들도 덩달아 함께 떠올랐다.

    ‘나는, 나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 이능을 갈구했던 게 아니야.’

    두 눈을 꾹 감은 엘리아의 볼 위로 투둑, 눈물이 흩어졌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퍼어억!

    두 번째 채찍질이 시작됐다. 이번엔 왼쪽 허벅지였다. 근육이 찢어지는 감각과 함께 엘리아가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신을 따르지 않는 자, 회개하라. 그것이 그대를 희망의 길로 인도할 터이니.>

    퍼억! 퍼억!

    또다시 채찍이 복부와 어깨를 가격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엘리아가 결국 의식을 잃고 고개를 떨구었다.

    * * *

    <하아, 하. 독한 년…….>

    탁!

    파티마 알 사이디 교황이 중얼거리며 납덩이만큼 무거운 채찍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곤 기절한 여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끝까지 거부한다는 말인가.’

    이 여인은 득이 아니면 독이었다.

    이리 참을성이 강하니, 교황은 여인을 노리개 삼아 즐기다가 죽일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넝마처럼 벌어진 피부와 그 사이에서 떨어지는 핏물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얼굴만 멀쩡할 뿐이었다. 어깨를 강타할 때 몸을 타고 흐른 핏물이 발끝까지 적셔 뚝뚝,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핏물에 젖은 기다란 금발과 허옇게 질렸음에도 말간 피부, 높다란 코, 스스로 물어뜯은 건지 찢어진 입술이 제법 교황의 구미를 당겼다.

    <……참으로,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구나.>

    교황이 그녀의 상처에 손을 뻗던 찰나였다.

    펑!! 콰과광! 쿵!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본당 지하가 흔들렸다. 부들부들 떨리던 내부 천장에서 잘게 흙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쿠궁!

    급기야, 바닥으로 돌조각들이 떨어지고 일렁이던 촛불이 모두 꺼졌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모두 빠르게 자세를 낮췄다.

    <교황 성하! 이리 가까이 붙으십시오! 습격입니다!!>

    <……어찌, 어찌 성소에 이런 일이!>

    교황은 기사들의 호위를 받아 급히 몸을 피신했다.

    콰광!

    입구 쪽에서 또 한 번의 폭발이 일어났다. 돌덩이가 우수수 떨어지며 먼지가 일고 내부에 매캐한 연기까지 흘러들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온몸을 내던져 감싼 기사들로 인해 교황은 어느샌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들 아래에 깔려 있었다.

    곧 흔들리던 내부가 안정을 되찾았다.

    사방이 고요해지자, 제 위에 올라탄 기사들을 거칠게 밀쳐낸 교황이 좋지 않은 예감에 서둘러 여인이 있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 불을 켜거라!>

    그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마침 횃불을 가져온 기사가 주위를 밝혔다. 여인이 묶여 있던 곳엔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교황이 곧 터질 것 같은 시뻘게진 얼굴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 * *

    “제레미…….”

    희미한 쇳소리가 나오며 혀끝으로 피 맛이 감돌았다. 이곳에 제레미가 있을 리가 없는 걸 알면서도 불러보았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온몸의 수분이 다 날아간 사람처럼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내내 머릿속에 맴도는 펠릭스와 제레미의 얼굴을 떠올리던 엘리아가 연신 그들의 이름만 부르짖었다.

    “펠……. 제레미…….”

    <제발, 제발 살아. 살기만 해. 돌려보내 줄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기대와 다르게 낯선 언어가 들려왔다. 엘리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곳엔 펠릭스가 있었다. 엘리아를 품에 꼭 껴안고 가뿐히 들어 올린 그는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펠…….”

    “…….”

    “펠……. 제레, 미…….”

    그러나 엘리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눈동자는 잿빛이 아니었다.

    오롯이 검고 깊은 눈동자만이 엘리아 앞에 존재할 뿐이었다.

    ‘아, 아아. 나는, 납치됐지. 여긴 북부가 아니야. 그러니 나를 옮기는 이 사람도, 펠릭스가 아니겠구나.’

    몸에 감각이 없었다. 통증도, 갈증도, 허기도 그 무엇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무서워. 살고 싶어. 보고 싶어.’

    그날 엘리아는 밤이 새도록 허상과 공포, 열병 속에 사경을 헤맸다.

    그런 엘리아의 곁을 지킨 건 카타미아의 왕이었다. 눈을 뜰 때마다 그는 하녀를 불러 붕대를 갈아주고, 물을 먹이고, 연고를 발라주었다.

    그 손길조차 싫고, 거부하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이미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엘리아는 몸을 내맡긴 채 눈을 감았다.

    *** “미안, 미안해, 내가.”

    귓가로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자꾸 미안하다는 거지.’

    문득 눈앞에 있는 왕을 도와달라던 노인이 떠올랐다. 그 노인이 죽어버렸으니, 이곳에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사람은 카타미아의 어린 왕뿐이었다.

    엘리아가 사경을 헤매다가 눈을 뜨는 순간마다 울먹이는 검은 눈동자가 있었다. 엘리아는 그 눈 안에서, 이상하게도 제레미의 청록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엘리아 님,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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