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07)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수염, 눈썹과 달리 그의 눈동자는 탐욕스러운 악마의 것처럼 검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늘 교황이 두려웠다. 경전에 나오는 어떤 악마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그에게 반기를 드는 순간, 눈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예상할 수 없기에 공포는 추기경의 마음 깊숙이 내재된 채 몸뚱어리를 부풀렸다.

<신께서 대성당을 버렸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되겠지요. 우린 늘 신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런 대성당에 죄가 있다면…….>

<…….>

<그렇지. 신의 뜻을 받든 교황이 아직까지 이 대륙을 신께 봉헌하지 못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추기경은 제 어깨를 붙잡은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뼈가 으스러져 버릴 것처럼 격한 통증에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게 비명이 새어 나올 것 같아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그 여인을 데리고만 온다면 대성당의 입지를 더 견고히 다질 수 있겠군요.>

<……시, 시켜만 주신다면, 어떻게 해서든 데리고 오겠습니다!>

<되었습니다. 마침 유희 거리를 찾던 참이니, 직접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교황이 웃었다. 커다란 입매에 입꼬리만 광대처럼 끌어 올리니, 한층 더 기이한 낯을 띠었다.

추기경은 우수수 올라오는 소름에 몸을 사렸다.

휘이이잉-.

음산한 바람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와 내부를 메우고 있었다.

*** “먹어.”

“시, 싫어요.”

“안 돼.”

“안 먹어요…….”

엘리아의 푸른 눈동자는 오랜 시간 식음을 전폐한 탓인지 잔뜩 시들어 있었다.

그 앞에는 카타미아의 왕 지브릴 아비만유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왜……?”

“제발, 절 아르티젠 북부로 다시 돌려보내 주세요. 그러겠다고 약속하면, 그때 먹을게요.”

“그건, 그건 안 돼.”

난감한 듯 미간을 찌푸린 왕을 바라보다가 엘리아는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었다. 이곳에 납치된 지 벌써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알아낸 게 있다면, 자신 앞의 저 남자가 카타미아 왕국의 어린 왕이라는 것과 납치된 이유가 자신의 이능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능을 사용할 순 있지만, 한번 이곳에 비를 내리면 보내주기는커녕 더 많은 걸 요구할지도 몰라…….’

엘리아는 계속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제레미와 샤미르는 어떻게 됐을까. 걱정하고 있을 펠릭스도 떠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먹어.”

엘리아를 납치한 왕이 다시금 금 숟가락을 들이대며 말했다.

그는 이틀 전부터 엘리아의 침실에 찾아왔다.

그러다 그녀가 음식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곤 직접 숟가락을 들게 된 것이었다.

엘리아는 먹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북부에 있을 가족들이 보고 싶었고, 숨 막히는 더위에 무엇 하나 삼킬 힘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말랐던 엘리아의 몸이 하루가 다르게 앙상해지고 있었다.

금실처럼 반짝이던 기다란 머리카락도 시녀들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퍼석거렸다.

엘리아는 푸른 눈동자를 내리깔며 고개를 저었다.

“왜? 맛없어? 싫어?”

“…….”

남자는 짧은 제국어만 할 줄 알 뿐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입을 열 기운조차 없어 엘리아는 눈을 꾹 내리감았다.

“기다려.”

벌떡 일어선 사내가 갑자기 침실 바깥으로 나갔다.

<더위 탓에 입맛이 없는 모양이야. 그걸 가져와야겠다.>

<그, 그거요? 아무리 그래도 반나절은 걸리실 텐데요.>

<얼음 한 덩이 구하는 데 무슨 반나절이 걸리겠느냐. 여인의 곁에서 잘 보필하고 있거라.>

<에, 네? 아니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데 당연히 반나절은…….>

엘리아는 남자와 시종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말을 듣는 시종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비쳤다.

소란도 잠시, 왕과 함께 시종 모두가 그를 따라나섰다.

침실에 홀로 남은 엘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금빛으로 번쩍였다. 마치 사막의 모래처럼 침실 안의 모든 것들이 금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돔 형태의 천장에는 화려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엘리아에겐 모든 게 낯설었다. 엘리아는 흰색 가운을 걸친 카타미아 왕의 복부에 자리 잡은 푸른 문양의 문신을 보고 기겁했었다.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제국에서 몸에 무언가를 새기는 것은 불경하게 취급했기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신도 문신이지만…….’

엘리아를 더더욱 놀라게 했던 건 바로 이곳의 의복이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나풀거리는 실크 바지에 같은 소재의 가운을 걸쳐 입었다. 옷 사이로 속살이 드러나든 말든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여자들의 의상도 마찬가지로 속살이 비치는 얇디얇은 드레스로 가슴과 하체만 겨우 가리는 형태였다.

여자 시종들은 엘리아에게 이곳의 의복을 입히고는 금으로 이루어진 링 모양의 팔찌와 발찌를 채웠다. 머리에는 보석이 잔뜩 달린 장신구를 씌워주었다.

엘리아는 왜 이렇게 갖춰 입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카타미아어와 제국어를 모두 알던 노인은 이 모든 게 다 왕의 뜻이라고만 말해주었다.

<끄아아악!>

쾅!

“뭐, 뭐지?”

엘리아는 밖에서 들리는 시종들의 비명과 문을 거세게 열어젖히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머리에 하얀 천을 두른 사내들이 엘리아의 침실로 쳐들어왔다.

나이 든 사내들은 뒷짐을 진 채 거만하게 엘리아를 내려다보았고, 그 뒤로는 금색 갑옷을 두른 커다란 덩치의 사내들이 그 주변을 동그랗게 에워싸고 있었다.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엘리아는 경악하며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곧이어, 한 사내가 엘리아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 여인인가 봅니다, 교황 성하.>

<아아, 우리 왕국의 고통을 가라앉힐 분을 드디어 찾아냈군요. 좋습니다. 좋아요. 왕께서 오시기 전에 서둘러 데리고 가도록 합시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떠들어대는 두 사내의 모습에 엘리아의 공포는 점차 불어났다.

앞에 선 남자가 기사들에게 손짓하자, 그들은 엘리아를 침대에서 강제로 끌어 내렸다.

“……앗! 이거 놔!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대로 끌려가면 끝이라는 본능적인 예감에 엘리아는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 쳤다.

<흐음, 소란스럽군.>

그 말과 동시에 기사 한 명이 엘리아의 목덜미를 내려쳤다. 흐려지는 시야와 늘어지는 몸에 엘리아는 두 팔이 붙잡혀서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 * *

“……허억! 헉, 헉.”

번뜩 정신을 차린 엘리아는 밭은 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폈다.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엘리아가 묶여 있는 나무 의자 하나를 제외하고는 주변이 온통 잿빛의 시멘트 바닥과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쾅!

철제로 된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하얀 옷을 걸친 사내와 기사들이 들어섰다. 그들이 순간 좌우로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통역해 주던 노인을 끌고 왔다.

“이, 이게 무슨……! 괜찮으신 거예요?”

엘리아는 의자 손잡이에 묶여 있는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노인의 얼굴은 보랏빛으로 퉁퉁 부어 살갗이 거의 벗겨진 채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쿠, 쿨럭, 쿨럭……. 하아, 하아, 길게, 설명해 드릴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이분께선, 카르카느 대성당의 교황님이십니다.”

“교황이요?”

“예, 예. 당신께 당장 비가 내리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제가 따르지 않겠다면요?”

“……쿨럭, 따르지 마십시오. 절대 따르시면 안 됩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노인이 피를 쿨럭이며 토하기 시작했다.

“크헉, 헉, 어, 어떻게 해서든, 말을, 듣게 만들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면 어떤 화를 당할지 알 수 없……!”

엘리아와 노인 사이의 기류를 감지한 교황이 기사들에게 눈짓하자, 노인의 팔을 잡고 있던 기사 한 명이 그의 허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노인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바닥에 엎어지며 꿈틀댔다.

엘리아는 떠오르는 공포와 의문을 숨기지 못하고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흐음. 성스러운 장소에서 감히 거짓된 혀를 놀리다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이자는 더 못 쓰겠다. 다른 이를 찾아오너라.>

<네, 알겠습니다!>

교황이 무어라 중얼거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이 우르르 뛰쳐나갔다.

교황은 잠시 엘리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턱수염을 살짝 쓸어내렸다.

발버둥을 친 탓일까.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엘리아가 현기증을 느꼈다.

울렁이는 시야로 그가 점점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오, 오지 마세요! 싫어!”

그는 엘리아의 턱을 억지로 들어 올리더니 좌우로 살피기 시작했다.

<은총을 내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구나. 빽빽 소리만 지르지 않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교황이 주름진 눈가를 접으며 음산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순간 등줄기가 오싹한 느낌에 숨을 멈췄다.

꺼칠한 손가락이 엘리아의 흰 볼을 더듬거렸다.

똑똑.

<교황 성하. 참회 시간입니다.>

<……가겠습니다. 사제님.>

문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 대답하던 그가 엘리아의 볼을 두어 번 두들기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사색이 된 엘리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결국 내내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으윽, 흑, 제레미, 펠릭스……. 보고 싶어. 흐윽.”

의자에 몸이 묶인 탓인지 울음과 함께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황량한 내부에 울렸다.

끌려오면서 어디에 부딪힌 건지, 온몸이 화마를 두른 것처럼 따가웠다.

“쿨럭, 쿨럭, 쿨럭!!”

한참 우는 도중에, 노인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괘, 흑, 괜찮으세요……?”

“헉헉, 하아.”

한참 피를 토하며 거칠게 숨 쉬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몰골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다치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더 빠를지도 몰랐다.

“…….”

엘리아는 애써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나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죽는 걸까.’

엘리아의 머릿속에 점점 최악의 상황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난 살아야만 해. 내가 북부에 돌아온 이유가 대체 뭔데,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잖아.’

엘리아는 고개를 도리질 치며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다. 그런데도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인지 도무지 기력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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