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07)
  • 사방의 앙상한 나무들조차 모두 바람 따라 휘청였다. 로브를 두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맥을 추리지 못했다.

    “제레미! 샤미르!”

    마차가 멈추자 벌떡 일어선 엘리아가 소리쳤다. 아이들이 엘리아를 따라 일어났다. 마차의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였다.

    휘이이잉!!

    “으앗!”

    “앗, 위험……!”

    거센 바람에 말과 마차를 고정한 장치가 우지끈, 부서지면서 마차가 뒤집혔다.

    엘리아는 마차 안에서 뒹구는 아이들을 꼭 안았다.

    여기저기 몸이 부딪혔다. 그런데도 엘리아는 두 아이를 꼭 끌어안고 놓치지 않았다.

    퍽, 창문에 머리가 부딪쳤다. 엄습해 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쿵, 타닥!

    바람이 멎었다. 마차 밖으로 튕겨 나온 엘리아는 잘 뜨여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려고 노력했다.

    엘리아의 품에서 떨어져 나간 아이들은 눈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제, 레미, 샤, 미르…….”

    엘리아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닿기에는 역부족인 거리였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 뒤를 돌아보려고 해도, 도무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여인인가.>

    <네. 맞습니다.>

    뒤에서 무어라 떠드는 것 같은데,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억양이 억세고, 투박했다.

    검은 로브를 두른 한 사내가 다가와 엘리아 앞에 무릎을 굽혔다.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바람 탓인지 그의 얼굴을 가린 천 조각과 로브의 모자가 이미 벗겨져 있었다.

    ‘누, 누구지……?’

    칠흑 같은 눈동자와 어깨 언저리까지 오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얼굴이 구릿빛이었다.

    제국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제국 내에선 눈앞의 사내처럼 옅은 갈색의 피부를 지닌 사람이 없었다.

    두툼한 눈썹 아래 움푹하게 파인 눈이 엘리아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고 있었다.

    <찾았다.>

    여전히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들으며 엘리아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어둠에 사로잡혀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제레미, 샤미르…….’

    누군가 엘리아의 몸을 들어 올렸다.

    붕, 떠오르는 감각과 함께 낯선 화약 냄새와 향신료 특유의 오묘한 향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 * *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침대 위였다.

    “우욱, 욱, 흐윽, 하!”

    울렁이는 속에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엘리아는 침대 바깥으로 몇 번이고 고개를 내민 채 투명한 액을 쏟아냈다.

    ‘아이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앞뒤로 흔들리는 감각에 이곳이 바다 위라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눈물을 글썽이던 엘리아가 애써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고, 뜨거웠다.

    거의 기다시피 걸어 굳게 닫힌 나무 문 앞에 섰다. 여러 번 잡아당기는데도 덜컹덜컹 소리만 나고 열리진 않았다.

    ‘납치된 건가? 아이들은 어디로 데려간 거야?’

    오싹한 생각이 고개를 들자 엘리아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아픈 몸을 움직이는 것이 굉장히 고역이었지만, 지금은 몸을 챙길 상황이 아니었다.

    “제레미! 샤미르……!”

    아이들의 이름을 목이 터지도록 외치며 문을 두드리니, 잠시 후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엘리아가 두려움에 몸을 웅크리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철컥, 철컥, 끼이익-.

    잠금장치를 푸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기절하기 직전 본 사내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는 미처 몰랐는데, 그는 펠릭스만큼이나 체격이 컸다.

    그 앞에 선 엘리아는 더욱 커진 두려움에 숨쉬기조차 버거웠다.

    그 뒤로 사내 몇 명이 따라서 들어섰다.

    달달 떨던 엘리아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이, 아이들은, 어딨나요?”

    그래도 간신히 힘을 짜내어 말을 내뱉었다.

    “아이……?”

    가장 앞에 있는 사내가 중얼거리더니, 엘리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가 다가오자 엘리아는 몸을 더욱 웅크렸다.

    “안, 녕?”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엘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큰 손에 놀라 뒤로 몸을 물렸다. 그러자, 사내의 두툼한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가서 하몬을 불러와.>

    <네!>

    사내가 뒤로 돌아 낯선 언어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에 문 쪽에서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멍하니 안으로 들어선 노인을 바라보자 큰 덩치의 사내가 엘리아를 번쩍 들어 올렸다.

    “시, 싫어!”

    기겁해 그의 가슴팍을 거세게 밀어대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발버둥 치는 엘리아를 조심히 침대 위에 앉혀주었다.

    “꼬박 이틀을 잠들어 계셨습니다. 먹은 것이 없어, 그리 움직이면 큰일이 나십니다.”

    “……제, 제국 분이세요? 우리 아이들은 대체 어딨죠?”

    터지는 울음을 억지로 참아내며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아 옆에 서 있는 사내와 낯선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쓰러진 곳에 그대로 두고 왔다고 합니다. 어차피 지브릴 전하께 필요한 건 당신뿐이니, 나머지는 상관없었다고 하십니다.”

    “저를, 왜요? 저를, 저를 대체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묻는 엘리아에 노인이 대답했다.

    “이 배는, 카타미아 왕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카타, 미아 왕국이요?”

    “그렇습니다. 제국의 북서쪽에 있는 대륙입니다.”

    “제가 그곳에 가는 이유가 무엇이죠? 절 보내 달라고 전해주세요!”

    엘리아의 간절한 외침에도 노인은 난감한 기색을 내비칠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이런, 마침 도착한 것 같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들려 드리도록 하지요.”

    밖에서 무어라 커다랗게 외치는 소리와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검게 탄 피부의 사내들이 빠르게 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또다시 붕, 몸이 들렸다.

    “꺄악! 내, 내려주세요!”

    “가만히.”

    엘리아를 안아 든 사내는 짧게 제국어를 내뱉은 뒤 걸음을 옮겼다.

    엘리아는 계속해서 발버둥을 쳤다. 선박에서 나오는 동안에도 실랑이가 지속됐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엘리아는 온몸을 뜨겁게 짓누르는 열기에 숨이 턱, 막혔다. 사내에게서 풍기는 후끈한 체온도 한몫했다.

    ‘어지럽고, 메스꺼워……. 숨을, 못 쉬겠어.’

    엘리아는 처음 느껴보는 격렬한 더위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이 여잔 너무 약해. 더위를 이기지 못할 거야. 서둘러!>

    사색이 된 채 늘어진 그녀를 보고는 사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무어라 소리쳤다.

    ‘펠릭스, 제레미, 샤미르…….’

    엘리아는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소중한 이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희미하게 뜬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니 온통 새하얗고 추운 북부와는 다르게 건조하고, 뜨거웠다.

    “버텨!”

    사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축 늘어진 몸에는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걸까.’

    죽고 싶지 않아. 아직 제레미와 해보지 못한 게 너무 많은걸. 펠릭스와도 이제 막 마음을 확인했는데.

    샤미르에게 물어볼 게 많고. 북부 성 사람들과도 더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엘리아는 하나하나 머릿속에 스치는 사람들을 떠올리다가 쨍하게 내리쬐는 태양에 눈을 질끈 감았다.

    * * *

    [영은 살과 뼈가 없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죽었던 생명의 왕께서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죄지은 자들을 대속하였고, 어린양들은 그를 따라 구원의 길을 걸으리라.]

    찬란한 월계수 화관을 쓴 소녀들의 청아한 노랫소리가 대성당에 울려 퍼졌다.

    노랫말을 음미하듯 눈을 지그시 감은 파티마 알 사이디 교황은 몽환적인 빛이 감도는 대성당 천장 아래 견고하게 서 있었다.

    사방에는 아기 천사들의 그림과 헐벗은 신의 형상을 한 조각상이 즐비해 대성당의 위용을 과시했다.

    교황은 그 정중앙에 서서 여느 때와 같은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끼이익, 쿵!

    갑작스럽게 난입한 소음에 교황의 허옇게 센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눈을 치켜뜨며 여유로운 한때를 방해한 이가 누구인지 살폈다.

    <교황 성하!>

    추기경이 다급히 들어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말씀하십시오, 무엇을 보았길래 그리 숨을 고를 틈도 없으십니까.>

    추기경의 질린 낯빛을 보니, 심상찮은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교황은 소녀들에게 노래를 멈추라고 손짓한 후 느릿하게 걸어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앉자마자 추기경은 얼른 합창을 지휘하던 사제에게 눈짓했다.

    사제가 허리를 굽히고는 아이들과 함께 우르르 본당을 빠져나갔다.

    <그것이, 지브릴 아비만유 카타미아 전하께서, 여자 하나를 납치해 왔다고 합니다. 듣기론 그 여인에게 비를 내리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비를 내리게 하는 힘이라.>

    교황의 여유로운 표정에도 추기경은 난처한 듯 진땀을 흘렸다.

    <성하께서도 알다시피, 카르카느 신께선 대성당을 버렸습니다. 그러니 예언대로 비가 4년이나 내리지 않았지요.>

    잠시 숨을 고른 추기경이 불안한 듯 말을 이었다.

    <다행히 백성들의 원성을 왕에게 돌릴 수 있었지만, 혹시라도 그 여인으로 인해 대성당의 비밀이 밝혀진다면 그땐 걷잡을 수 없이…….>

    교황이 추기경의 어깨를 한 손으로 짚자 추기경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꿀꺽,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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