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07)

“아, 어어?”

얼떨결에 펠릭스를 따라가던 엘리아가 뒤돌아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커다란 눈을 부릅뜨더니, 아랫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그리곤 순식간에 달려와 엘리아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엘리아 님은 나랑 갈 거예요!”

“……뭐, 상관은 없다만, 제레미 넌 샤미르를 챙겨 와야지 않겠니. 너도 이제 어엿하게 컸으니, 아이를 챙겨야지.”

“그, 그렇지만…….”

펠릭스의 말에 제레미가 슬쩍 뒤로 돌아 샤미르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영문을 알지 못한 엘리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샤미르가 제레미보다 3살이나 많은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북부의 사용인 모두 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다들 한마음 한뜻이었다.

북부의 까탈스러운 두 부자가 결국 마님에게 함락당했구나, 모두 웃음을 참으려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샤미르만 입꼬리를 한쪽만 올려 훗, 웃음을 흘렸다. 제레미는 그런 샤미르를 가늘어진 눈으로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그녀 옆으로 다가섰다.

엘리아와 펠릭스의 뒤를 따라 제레미와 샤미르가 성안으로 들어섰다. 고작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많은 시간이 들었다.

*** “엘리아 님! 내일 놀러 가요?”

생선 살을 채 삼키지 않은 제레미가 웅얼거리며 물었다.

‘아, 제국에 다녀오면 함께 놀러 가기로 했지…….’

엘리아는 슬쩍 펠릭스의 눈치를 살폈다. 허락해 줄까, 함께 가면 더없이 좋을 텐데.

“네?”

아이의 재촉을 곁에서 듣고도 펠릭스는 별말이 없었다.

어색한 미소를 흘리던 엘리아가 맞은편에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에게 제국에 다녀와서 함께 놀러 가자고 했거든요. 당신도 설산으로 다 함께 놀러 가면 좋을 것 같다고 그랬잖아요.”

“그래, 그랬었지. 그런데, 아무래도 내일은 무리야. 정무가 많이 밀려서.”

“으음. 하긴 당신은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웠으니, 그렇기도 하겠네요.”

펠릭스와 엘리아의 대화를 듣던 제레미의 표정이 점점 더 시무룩해지고 있었다. 눈꼬리가 축, 처지고 입술도 앙다물어졌다.

‘아무래도 기대를 많이 한 모양이야…….’

고민하던 엘리아가 좋은 수가 떠올랐는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러면, 샤미르와 셋이 다녀와도 될까요? 설산은 무리겠지만, 예전부터 북부 시장을 구경하고 싶었거든요.”

“…….”

펠릭스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엘리아와 제레미 사이에서 난감한 듯 말이 없었다.

“제발요…….”

제레미의 간절한 한마디에 그는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엘리아의 시선도 한몫했다.

“다녀와. 대신, 꼭 호위 기사들과 함께 다니도록 해.”

“그럼요. 당연하죠!”

“와아! 시장 구경!”

기뻐하며 얼싸안는 엘리아와 제레미 옆에서 식사하던 샤미르가 멀뚱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는 간다고 하지 않았는데요?”

“뭐야! 샤미르 넌 어린이니까 혼자 있으면 안 돼!”

“뭐래, 꼬맹이가.”

“뭐? 꼬맹이?”

“그래! 날 제발 내버려 둬, 제레미.”

“내가 꼬맹이면 너는, 너는 멍청이야!”

“뭐? 멍청…… 하, 그래. 내가 애랑 무슨 말을 하겠니.”

한참 두 아이의 투덕거림을 듣고 있던 엘리아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꾹꾹 누르는 샤미르의 모습에 웃음을 흘렸다.

‘마치, 다 자란 어른이 아이와 유치하게 다투다가 현실을 자각한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샤미르와도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엘리아 님!”

엘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을 부르는 제레미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아, 응. 제레미. 샤미르도 우리와 함께 가면 좋겠는데, 어떠니?”

“맞아요! 샤미르는 어린애니까요.”

“……엘리아 님께서 그러길 바라신다면 따를게요.”

“내, 내 말은?”

“……네네, 도련님의 뜻 역시 따르겠습니다.”

제레미를 아이 다루듯 어르는 샤미르의 모습에 엘리아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펠릭스는 세 사람을 말없이 바라보며 느긋한 식사 시간을 보냈다.

* * *

그날 밤에는 두 사람이 엘리아의 침실을 찾았다. 처음엔 제레미였고, 새벽이 깊을 무렵에 찾아온 이는 펠릭스였다.

“으음, 펠?”

“더 자, 엘리아.”

“당신 일이 이제 끝난 거예요?”

“흠, 나 때문에 깬 건가? 조심히 들어온다고 들어온 건데…….”

펠릭스는 침대맡에 앉아 엘리아의 뺨 위에 달라붙은 금실 같은 머리카락을 조심히 치워주었다.

“아니에요. 어차피 깊게 잠들지 못했어요.”

살짝 몸을 일으켰던 엘리아가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그리곤 옆자리를 비운 뒤 톡톡, 빈자리를 쳤다.

엘리아의 왼편에는 제레미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잠들어 있었다.

“피곤하죠? 어서 눈 좀 붙여요.”

“……유혹인가?”

“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 제레미도 있는데!”

최대한 소리를 낮춘 채 경악하자, 펠릭스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야. 내일 종일 보지 못할 테니, 그냥 얼굴이나 볼 겸 왔어. 이만 다시 가봐야 할 것 같군.”

그러고 보니, 앤드류로부터 최근 많은 제국 귀족들이 북부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때문에 바쁜 걸까.

엘리아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밤은 새우지 말아요. 힘들잖아요.”

“힘이 날 수 있게 도와줄 마음은 없고?”

“어, 떻게 도와…… 펠!”

엘리아가 살짝 상체를 일으키며 말을 꺼냈다. 침대 위에 앉아 있던 펠릭스가 엘리아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다시 그녀를 눕혔다.

“으응…….”

놀라서 살짝 커진 목소리에 아이가 몸을 뒤척였다. 다행히 깨진 않았는지 그저 몸을 돌려 다시 새근새근 잠들었다.

제레미가 잠들었는지 확인하던 펠릭스가 이내 엘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촉!

“난 이거면 돼.”

빠르게 입을 맞춘 후 일어선 펠릭스가 성큼성큼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쿵.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엘리아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내내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고 있어야만 했다.

‘처음 봤을 때랑 사람이 너무 다르잖아…….’

엘리아는 쉬이 잠들 수가 없었다. 여러 번 그와 입을 맞췄지만, 유독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조금씩 부풀어 가는 마음을 뒤로하고 아침은 언제나 빛처럼 빠르게 찾아왔다.

엘리아는 아침 일찍 샤미르와 제레미를 챙겨 마차에 올랐다. 펠릭스는 정무로 바쁜 것인지 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

“제레미, 그렇게 신나니?”

“전혀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연신 발을 동동 구르며 두 뺨을 붉히는 제레미를 보니 내내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항상 눈이 많이 쌓여 있는 탓에 느릿하게 달리던 마차가 오늘따라 유독 빨랐다.

‘뭐지? 눈이 많이 녹아서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엘리아가 유심히 차창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습격이다!”

기사의 외침이 들렸다.

콰과광!

그 뒤로 커다란 폭발음이 잇따랐다.

검은 로브를 두른 사내들이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가장 앞장선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눈만 빼고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그저, 기이한 색의 눈동자만 드러나 있었다.

칠흑처럼 새카만 눈동자.

엘리아는 몸을 일으켜 두 아이를 품속에 끌어안았다.

“으, 으아아악!!”

엘리아의 마차를 몰던 마부의 비명이 들렸다. 눈길에 휘청이는 마차가 가속을 붙여 달리기 시작했다.

“에, 엘리아 님!”

“쉿, 괜찮아. 루카스도 있으니까, 제레미, 샤미르. 다 괜찮을 거란다…….”

물기 어린 목소리에 엘리아는 연신 괜찮을 거라고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벌벌 손이 떨렸다. 아이들이 동요할까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펑! 콰앙!

사방에서 터지는 폭발 소리와 함께 기사들의 비명이 난무했다. 엘리아는 정신없이 휘청이는 마차에도 살짝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창밖에서 말에 탄 루카스와 검은 로브를 두른 사내가 검을 맞대고 있었다.

챙, 채앵! 푸르릉!

말을 타고 격렬히 싸우는 루카스의 뒤로 두 명의 사내들이 따라붙었다.

“루카스! 위험해요!”

엘리아의 비명에 루카스가 뒤로 돌았다. 두 명의 사내들이 루카스에게 검을 들이댔다. 곧장 그는 두 개의 검을 피하려 날렵하게 몸을 숙였다.

그러나 사내들이 노린 건 루카스가 아닌 그가 탄 말이었다.

그들은 검은 물체를 말의 다리 밑으로 던지더니 빠르게 좌우로 흩어졌다.

쾅! 콰과광!!

커다란 폭발과 함께 엘리아의 눈앞이 번쩍거렸다. 뿌연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쿵, 쿵쿵.

미친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루카스…….’

엘리아는 서둘러 마차의 뒤편에 달린 창을 내다보았다. 시커먼 연기가 사라지고, 눈더미 위로 쓰러진 루카스와 그가 타고 있던 말이 보였다.

“제, 제레미, 샤미르, 잘 들으렴. 마차가 멈추면, 그러면 뛰어가는 거야. 할 수 있겠니?”

덜덜 떨리는 엘리아의 목소리에 아이들은 품속에서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어느샌가 로브를 두른 사내들이 거리를 좁히며 마차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차창을 통해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엘리아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나기 시작하자, 바깥에는 거대한 강풍이 불었다.

앞으로 달려가던 말들이 바람에 못 이겨 멈춰 섰다.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마차가 뒤로 밀릴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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