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07)
  • “…….”

    그는 잠시 굳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대, 주교님……?”

    망설이듯 부르는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린 듯 싱긋, 웃어 보였다.

    “폐하껜 터무니없이 작은 마나 통이었다고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네?”

    “서로 시간만 낭비했군요. 이만 물러가시지요, 대공비 전하.”

    그는 찡긋 윙크를 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 네. 감사합니다.”

    ‘펠릭스가 미리 이야기를 해놓았구나. 막시밀리안 대주교는…….’

    “천만에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막시밀리안 대주교는 엘리아가 인사를 마치고 가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새하얗고 긴 손을 살짝 흔들어주었다.

    엘리아는 뒤돌아 그에게 꾸벅 고개를 한 번 더 숙이고는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그녀가 나오자 대기 중이던 기사단이 엘리아를 마차까지 호위했다.

    도착한 그곳에는 금박의 사륜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펠릭스가 그녀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머, 먼저 간 거 아니었나요?”

    “일이 좀, 남아서.”

    펠릭스는 엘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아가 두 뺨을 살짝 붉힌 채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마주 앉았지만, 엘리아의 시선은 여전히 펠릭스에게 향하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와는 별일 없었나?”

    엘리아의 얼굴을 샅샅이 살펴보던 펠릭스가 조금은 걱정이 담긴 음성으로 물었다.

    “마, 마나 통이 작다고 폐하께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당신 말대로 마나 측정을 했고, 그리고 대주교를 만났고, 또…….”

    핑크빛으로 볼을 물들인 채 고자질하듯 자신에게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펠릭스의 입꼬리가 자꾸 올라갔다.

    윤기 흐르는 그 입술과 커다랗고 푸른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어젯밤 촛불에 아슬한 빛을 품은 채 울먹이던 엘리아가 떠올랐다.

    ‘미치겠군…….’

    펠릭스는 목이 바짝 타는 기분에 마른침을 삼켰다.

    *** “제 말 듣고 있…… 펠? 당신 괜찮은 거예요? 얼굴이 유난히 빨개요. 열이라도 나는 건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펠릭스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온 엘리아가 그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제 이마에도 손을 대보더니, 푸른 눈동자를 굴려 다시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열, 안 나는데…….”

    중얼거리는 엘리아에게서 햇빛을 잔뜩 머금은 꽃향기가 풍겼다. 달콤한 체향을 들이마실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펠, 펠릭스! 의원을 불러야 할 것 같아요. 계속 멍하게 쳐다보기만 하고, 괜찮은 거 맞죠?”

    “…….”

    이렇게 걱정해 주니, 아파도 될 것 같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생각에 잠시 말을 아꼈다.

    “안 되겠어요, 어서 마차를 돌려서…….”

    엘리아는 당장이라도 마차를 세울 것 같은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였다. 펠릭스가 곧장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좌석에 앉혔다.

    “그러다 다치겠어. 난 아무렇지 않아. 그저…… 그래. 잠시 생각 중이었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셨는데요?”

    어젯밤 일을 생각했다고 한다면, 호색한이라고 질색할지도 몰랐다.

    “……잠시 후작가에 다녀왔어.”

    고르고 골라 꺼낸 말은 결국 펠릭스가 엘리아에게 전해야 했던 또 다른 이야기였다.

    “……거긴 왜요?”

    “루카스에게, 멜라네시아 찻잎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거든.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지, 엘리아? 내가 그리 미덥지 않았어?”

    “…….”

    엘리아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추궁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무릎 위 작은 두 손이 새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그러, 니까 내 말은…….”

    몰아붙이려던 게 아니라, 앞으론 자신을 믿고 무엇이든지 말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펠릭스가 말을 고르느라 고심하는 사이 엘리아가 입을 열었다.

    “미덥지 못했던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과는 이제 다시 만날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너무 바보같이 당하고만 산 세월도 창피했고…….”

    엘리아의 마음이 보였다. 그녀가 겪어야 했던 상황에 가슴이 아팠다.

    ‘적어도, 손찌검은 하지 말았어야지.’

    그리고 아직도 미미하게 부기가 남아 있는 엘리아의 오른쪽 뺨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후작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 *

    펠릭스는 엘리아를 본궁에 데려다준 뒤, 기사단을 이끌고 바로 아르네스 후작저로 향했다.

    북부 기사단은 저택의 정문을 통해 빠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몇몇 사용인들과 기사가 그들을 막아서긴 했으나 완력의 차이가 너무나 커 소용없는 움직임일 뿐이었다.

    몇 번의 검이 부닥친 끝에 후작저의 기사단 전원이 바닥에 널브러져 꼼짝하지 못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대공 전하!”

    “……정말 모르고 묻는 건가. 후작.”

    펠릭스의 날카로운 검과 눈빛에 잔뜩 겁에 질린 후작이 벌벌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다급히 1층 로비로 뛰쳐 내려온 후작 부인과 세레나가 그를 막아섰다.

    “전하! 저희는 엘리아의 가족입니다! 어째서 이런 짓을……!”

    “그래서?”

    “네, 네?”

    “그래서 가족인 당신들이 내 아내에게 무엇을 해주었지? 아아, 멜라네시아 찻잎으로 목숨을 위협하고, 손찌검한 건 익히 잘 아는 사실이니 말할 것 없어.”

    “대, 대공님! 다 오해예요! 언니 말만 듣고 이러시는 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후작 부인의 옆에 선 세레나가 벌벌 떨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오해라,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겠지. 황실의 조사단이 지금 선박을 수색 중이니까 말이야.”

    “그, 그게 무슨, 무슨 소립니까.”

    후작이 후작 부인과 세레나를 제치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 간절한 표정으로 펠릭스를 바라보고 섰다.

    “……그것까지 일일이 내가 설명을 해줘야 하나?”

    펠릭스가 검을 거두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마지막 경고야, 후작. 또다시 이딴 더러운 곳으로 대공비를 부르거나 허튼짓을 했다간, 그땐 내가 어떻게 할지 나 역시 장담할 수가 없겠어.”

    펠릭스가 살기를 뿌리며 후작을 노려보았다. 사색이 된 후작은 그 자리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펠릭스는 비릿한 미소를 끝으로 뒤돌아섰다.

    * * *

    펠릭스가 열심히 해명 중인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함부로 만지지도 못하는 여자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선이, 손이, 온 신경이 엘리아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니까 전 당신 믿어요, 펠.”

    “아무래도 말만으론 부족한 것 같지 않나.”

    “그, 그럼 어떻게 해드릴까요?”

    “키스해 줘.”

    펠릭스가 짓궂게 웃었다.

    “네? 여, 여기서요?”

    마차 안이라 누가 볼 리 없을 텐데도, 엘리아는 연신 두리번거리며 창밖을 살폈다.

    망설이던 엘리아가 결심한 듯 펠릭스에게 다가섰다. 머뭇머뭇, 그 망설임이 펠릭스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어젯밤 그렇게 뜨거웠던 여자가 고작 입맞춤에 이렇게 부끄러워하다니.’

    미소 짓는 펠릭스의 입술 위로 부드럽고 말캉한 촉감이 닿았다. 엘리아는 두 눈을 꾹 감고, 펠릭스에게 입술을 맞댔다. 그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차서, 그 역시 함께 눈을 감았다.

    춥.

    곧 떼어질 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말캉한 혀가 그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연신 여린 볼과 입천장, 치아, 그리고 굵직한 혀를 두드렸다.

    “흡, 하아, 하아…….”

    굳은 펠릭스를 놔두고 엘리아가 이윽고 입술을 떼며 숨을 골랐다.

    ‘능숙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아리송한 마음에 크게 헐떡이는 엘리아의 두 어깨를 꾹 붙잡았다. 티를 내고 싶진 않으니, 다시 한번 확인해 보는 수밖에.

    펠릭스는 촉촉이 젖은 입술을 거침없이 핥아 올렸다.

    * * *

    “엘리아 니이임!”

    펠릭스의 도움으로 마차에서 내려서자마자,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 채 울먹이며 달려오는 제레미가 보였다.

    ‘이젠 제레미를 떼어놓고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아.’

    “제레미!”

    무릎을 굽혀 작은 몸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제레미는 답답했는지 바르작거리긴 했으나, 결국엔 엘리아의 허리에 작은 팔을 둘렀다.

    “제레미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제레미를 품에 안으니, 후작저에서 있었던 일이 사르륵 녹아 사라진 기분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 머뭇머뭇 엘리아의 등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졌다.

    ‘제레미 옆에 있을 때가 가장 마음이 놓여…….’

    울컥하는 마음에 작은 어깨 위로 살짝 얼굴을 묻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머리 위로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져 얼굴을 들었다.

    모두 자신과 제레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샤미르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러세요……?”

    “두 분께서 그렇게 계시니, 제가 다 황홀해지는 기분입니다.”

    “보기 좋아요, 마님!”

    앤드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고, 밝게 웃던 유리 역시 말을 덧붙였다.

    “……흠흠, 이제 들어갈까? 제레미?”

    민망한 상황에 헛기침하며 제레미의 손을 잡았다.

    아이는 작은 입꼬리가 풀렸다가 좁혀지길 반복하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느슨하게 풀어지려는 입꼬리를 애써 다잡는 것처럼.

    “……하아, 정말 왜 이렇게 귀엽지?”

    “네? 뭐, 뭣 하믄, 지시에오!”

    참지 못하고 아이의 통통하고 뽀얀 볼살을 살짝 꼬집었다. 이미 제레미가 충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란 걸 알았지만, 오늘도 참을 수가 없었다.

    몰캉한 촉감을 즐기던 엘리아의 허리를 누군가 잡아서 일으켰다. 당혹감에 눈을 깜박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날 샐 건가?”

    펠릭스였다. 그는 엘리아와 제레미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자연스럽게 엘리아의 손을 제 팔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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