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07)
  • “어머.”

    엘리아는 급히 이불을 끌어 올려 가슴을 가렸다.

    “……곤란한데, 슬슬 폐하께 문안 인사를 드릴 시간이거든.”

    “그, 그러게요. 다행히 여긴 화, 황성이니, 서둘러서…….”

    “조금…… 여유롭게 가도 될 것 같기도 하고.”

    펠릭스의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요! 꿈 깨요, 펠.”

    이불을 꾹 움켜쥐고 말하자,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펠릭스가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는 꽤나 적극적이던데.”

    “펠, 펠…….”

    “하하하, 유혹적이기는 하지만, 참아보도록 하지.”

    “……고, 고마워요.”

    펠릭스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서더니, 옆에 놓인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의 나신에 민망해진 엘리아가 슬쩍 시선을 내렸다.

    “그나저나 후작저에 오려고 했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아내가 머물고 있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마음 써줘서 고마워요.”

    옆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엘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잘 모르는 모양이야. 그런 인사치레는 선을 긋는 것 같아서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아, 엘리아.”

    “펠…….”

    “당신은 좀 더 당당하게 나에게 요구해도 괜찮아. 난 당신의 요구에 충분히 응해줄 준비가 되어 있거든.”

    가까이 다가선 펠릭스가 앞으로 내려와 있던 엘리아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귓가에 꽂아주었다.

    “……아,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잠시 나가주시겠어요? 저도 서둘러 옷을 입어야겠어요.”

    또다시 깊어지는 펠릭스의 시선에 엘리아는 정신을 차리듯 급히 말을 이었다.

    “보지 않을 테니, 갈아입어. 당신한테 해야 할 말이 있거든.”

    “페엘……!”

    “정말이야.”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니,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 펠릭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옷이 담긴 커다란 상자를 엘리아 앞에 내려놓고는 뒤로 돌았다. 그제야 그녀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상자를 열었다.

    경계하듯 그의 널찍한 등판을 보며 주섬주섬 속옷을 챙겨 입었다.

    “뭐, 뭔데요? 중요한 말이에요?”

    “아마도?”

    “혹, 황제 폐하가 이능에 대해 알고 있다는 이야기 아니에요?”

    “……부인은 정말 모르는 게 없다니까.”

    웃음기 섞인 그의 목소리에 엘리아는 큼큼, 괜스레 목을 가다듬으며 뒤로 돌았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금박 장식이 달린 베이지색 드레스를 걸쳐 입었다.

    뒤에 달린 후크를 아무리 열심히 잠그려고 해도 손이 잘 닿지 않았다. 엘리아가 애를 먹으며 끙끙거리고 있을 찰나였다.

    후크 위로 엘리아가 아닌 다른 이의 손이 닿았다.

    *** “펠! 안 보겠다고 했잖아요!”

    “안 보여. 눈 감고 있거든.”

    “거짓말…….”

    “설령 거짓이어도, 이번만큼은 넘어가 주시지요. 부인.”

    “…….”

    유리의 손길보다는 서툴렀지만, 엘리아는 잠자코 그의 시중을 받아들였다. 부끄러운 마음이 있는 한편, 두근두근 설레기도 했다.

    “어울리네, 예뻐.”

    엘리아가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는 사이 펠릭스가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란 엘리아가 두 손으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흐흠, 이제 이야기해 줘요.”

    “그래, 당신의 예상대로 폐하가 그 일에 대해 추궁하더군.”

    그는 연신 장난치던 아까와 달리 사뭇 진지해 보였다.

    제국에 오기 전부터 짐작했고, 후작가에서 확신했기에 엘리아는 새롭거나 놀랍지는 않았다.

    “나 역시 짐작하고 있던 일이고, 대책은 이미 마련해 두었어. 그러니, 이번만큼은 내가 하자는 대로 따를 수 있겠나?”

    “……당연하죠.”

    엘리아가 신뢰가 담긴 눈빛으로 펠릭스를 향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황실 별채에서 벗어나 본궁으로 향하는 내내 긴장감에 바짝 목이 말랐다.

    엘리아가 두 손을 가슴 쪽에 꼭 그러모은 채 숨을 몰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함께 알현하는 게 좋겠어. 이러다가는 곧 쓰러질 것 같군.”

    걸음을 멈춘 펠릭스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하지만 엘리아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황제에게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아내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살짝 떨고 있으면서도 눈빛만은 형형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정 그렇다면 무사히 잘 다녀오도록 하시지요, 부인.”

    살짝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엘리아는 긴장감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하하하, 무슨 그런 말씀을.”

    펠릭스는 엘리아의 어깨를 두 손으로 짚은 채 본궁의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려주었다.

    기사들과 함께 본궁으로 들어가던 엘리아가 살짝 뒤로 돌아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느슨하게 풀린 입꼬리로 엘리아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이제, 이제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해.’

    엘리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제 황제 폐하를 뵐 시간이었다.

    검붉은 갑옷을 갖춰 입은 황실 기사단의 호위를 받아 알현실 앞에 섰다.

    두 명의 기사가 황실을 상징하는 황금과 붉은 기운이 감도는 커다란 문을 열어주었다.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총 여섯의 거대한 기둥과 함께 널찍한 내부가 드러났다.

    천장 위에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와 붉은 융단이 깔린 바닥, 그 끝에는 황좌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 사람이…….’

    황실 무도회는 물론이고,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한 적이 없었기에 처음 황제를 알현하는 순간이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시리도록 차가운 잿빛의 눈동자. 펠릭스와 닮은 듯 다른 그가 황좌에 앉아 턱을 괸 채 따분한 표정으로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엘리아는 고개를 숙이고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인사를 올렸다.

    “그래, 그래. 이리 가까이.”

    엘리아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가는 내내 미묘한 기류가 엘리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대공비, 엘리아 로이드라고 합니다.”

    “이미 그대를 알고 있네. 자네를 황실로 부른 건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야.”

    “하문하십시오, 폐하.”

    황제는 설산보다 더 냉랭한 한기를 풍기며 엘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을 기다리며 꽉 쥔 손바닥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대에게, 날씨와 관련된 이능이 있다지?”

    “그렇습니다, 폐하.”

    “그게 어느 정돈지 궁금하더군. 그래, 한번 보여줄 수 있겠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엘리아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것을 꿰뚫듯이 탐색하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폐하, 마나 통이 작아 제대로 된 이능을 쓸 수가 없습니다.”

    “흠, 내가 듣던 거랑은 다른 말을 하는군. 듣기론, 능력이 꽤나 출중하다던데? 그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겠나?”

    “제가 어찌 황제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흠, 그래? 아무리 대공비라고는 하나, 그 말이 거짓이라면 무사할 수 없을 것이네.”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황제의 말에 엘리아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만, 됐다. 부부가 똑같은 대답만 늘어놓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구나. 신전에 방문해 마나를 측정하거라. 어서 대공비를 신전으로 모셔라.”

    “모시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황제의 명에 기사들이 엘리아의 양옆으로 섰다. 엘리아는 황제에게 차분히 인사를 올린 후, 잠자코 기사들을 따랐다.

    끼이익.

    기사단과 함께 알현실을 나서면서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황제는 높은 자리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고고하게 앉아 있었다.

    엘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긴장한 탓인지 손에 땀이 흥건했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나는, 펠릭스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그러면 되는 거야.’

    그러니, 부디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엘리아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빌었다.

    신전은 본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펠릭스와 결혼식을 올린 곳이었다.

    두 번째 방문이었지만,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진 만큼 웅장한 건물에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기사들이 안내하는 방향은 결혼식을 올렸던 본당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어, 어디로 가는 거죠?”

    “마나 측정은 헬리오스 님의 석상 앞에서 진행됩니다.”

    엘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잠재웠다.

    본당 뒤편 높다란 화강암 기둥이 사면을 둘러싸고, 그 사이에 거대한 석상이 있었다.

    헬리오스를 본떠 만들어진 여인 석상은 금빛의 큰 수레바퀴를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니, 석상 주위로 잔잔하게 얕은 물이 깔려 있었다.

    “이곳은, 대체…….”

    “신의 은총이 내린 곳입니다.”

    누군가의 대답을 바라고 던진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뒤에서 대답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새하얀 빛을 내뿜는 남자가 서 있었다.

    “처음 뵙습니다, 대공비 전하. 대주교 막시밀리안이라고 합니다.”

    그는 새하얗고 긴 머리카락을 한데 땋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의 안경에 길게 연결된 안경 줄조차 새하얘 빛을 반사했다. 머리칼만큼 새하얀 피부, 고고한 시선, 유일하게 눈동자만 유리구슬처럼 새파랬다.

    엘리아는 잠시간 넋이 나간 듯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 * *

    황실 기사단이 물러나고, 막시밀리안 대주교의 지시에 따라 엘리아가 석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발목까지 찰랑이는 시원한 감각에 내부에 스며 있던 모든 열기가 날아가는 듯했다.

    “눈을 감으십시오. 숨을 크게 머금고, 내부에 흐르는 마나의 흐름을 느끼시면 됩니다.”

    엘리아는 거대한 헬리오스의 석상 앞에 서서 주춤, 몸을 굳혔다.

    “……대공님께 이야기는 전해 들으셨죠? 안심하세요.”

    “……!”

    펠릭스를 언급하는 대주교의 목소리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가만히 서서 내부에 흐르는 마나에 집중했다. 발목 부근에서 잔잔히 일렁이던 물결이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엘리아는 곧 눈을 떴다. 석상의 금빛 수레바퀴 가운데 부분에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어?”

    푸른빛이 수레바퀴를 굴리듯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엘리아는 두 눈을 꽉 감은 채 양손을 들어 바람을 막았다. 엘리아의 금빛 머리카락과 베이지색 드레스가 뒤쪽으로 펄럭거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엘리아는 영문을 알지 못해 뒤로 돌아 막시밀리안 대주교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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