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엘리아는 정확히 반나절 만에 깨어났다.
“……앤드류?”
깨어난 엘리아의 눈에 묵묵히 침대 곁을 지키고 있는 앤드류의 모습이 보였다.
엘리아가 쓰러진 사실을 의원 말고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고 말한 앤드류는 그녀를 향해 진득한 눈빛을 보냈다.
“무슨, 할 말이 있나요……?”
당황스러운 기색을 애써 감춘 엘리아가 물었다. 그의 표정이 꽤 진지했다.
“……죄송합니다.”
“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앤드류.”
“제가 마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르기는 했으나, 사실 믿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엔 조금, 후회도 했습니다.”
앤드류의 뜬금없는 고백에 엘리아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엘리아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하고, 언제나 충성심이 강했다.
그가 엘리아의 말을 수락한 것도 그녀를 믿기보단 대공비의 부탁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앤드류는 정말 훌륭한 집사예요.”
“마님…….”
앤드류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 왜 그러세요?”
눈물을 훔치던 그가 갑자기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저는, 제국 출신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외딴 시골에 살던 농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앤드류가 대뜸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아……?”
고개를 살짝 갸웃한 엘리아는 일단 그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작위도 없고, 자금도 없던 저는 야망이 있어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피나는 노력으로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만점을 받고 수석 입학을 했을 땐, 정말 길이 보이는가 싶었습니다.”
“그, 그랬군요.”
“그렇게 노력한 끝에 제가 제국에서 무엇이 된 줄 아십니까?”
엘리아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저었다. 작위도 돈도 없었다면,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제국에서 큰 자리에 오르긴 힘들었을 터였다.
“아카데미에서 졸업한 저는 폐하의 근처는커녕 황실의 하나뿐인 돼지 영양사가 되었습니다.”
“헙, 크흠…….”
그의 마지막 말에 엘리아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눈치도 주지 않고, 변함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돼지의 분을 채취해 연구해야만 했던 저를 대공 전하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대공께서요?”
살짝 미안한 마음에 또다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꼭 참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네. 물론 제가 전하께 어필한 부분도 있었지만,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받아주신 분은 전하뿐이셨습니다.”
“아아, 그래서 이곳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린 엘리아가 온화한 얼굴로 앤드류를 바라보았다.
“……그때의 감동을 오늘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이런, 앤드류. 그럴 것 없어요.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에요.”
“아닙니다. 마님께선 언제나 북부에도, 대공 전하께도, 제레미 님께도 진심이셨습니다. 저 역시, 앞으로 마님을 언제나 믿고 따르겠습니다.”
굳은 결심을 한 듯 그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다.
‘예전엔 미처 막지 못했던 일들을 막은 것뿐인데…….’
“……아하하, 그래요.”
엘리아는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앤드류의 깊은 신뢰를 얻게 된 엘리아는 그 파급력이 얼마나 클지 이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 * *
“마님, 제국에서 편지가 한 통 왔습니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방에서 제레미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제국에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엘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곳에서 편지가 올 리가 없었다. 제국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은 펠릭스가 편지를 보냈을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문이 열리면서, 유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후작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엘리아에게 내밀었다.
“……후작가에서 보냈구나.”
“엘리아 님……?”
살짝 가라앉은 엘리아의 목소리에 제레미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순수함이 가득 담긴 눈동자를 보자, 엘리아의 마음이 차츰 진정되었다.
‘분명 시간을 돌아오기 전에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대체 왜……?’
엘리아는 페이퍼 나이프를 받아 들고 천천히 봉투를 뜯었다. 간단하고 명료한 문장들에서는 조금의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엘리아에게.
네게 좋은 소식이 있단다. 황실의 부름을 받았다. 저택에서 하룻밤 여독을 푼 후, 단정한 모습으로 폐하를 뵙길 바란다.
추신. 전할 말이 있으니, 꼭 후작저에 들렀다 가거라.
헤럴드 아르네스 후작.」
편지를 다 읽고 엘리아는 실소를 터뜨렸다. 먼 타지에 있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무미건조한 내용뿐이었다.
‘잘 지내냐는 말 정도는 적지 그러셨어요. 아버지.’
엘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레미와 유리는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엘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제국에 좀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제국이요?”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휴.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그 먼 길을 어떻게 가려고 그러세요.”
엘리아는 눈사태를 막은 이후, 부쩍 침대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샤미르는 그것이 이능을 갑자기 다량 사용했기 때문에 느끼는 부작용과 피로감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아이는 신의 샘물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잔소리도 잊지 않았다.
“황실에서 나를 부르는구나.”
“꼭 가야 해요?”
아이가 맑은 눈을 깜빡이며 그녀의 소매 자락을 흔들었다.
“황실의 부름을 묵인하려면, 많은 대가가 필요하단다. 대신, 제국에 다녀와서는 다 함께 놀러 갈까?”
엘리아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약속이에요. 꼭.”
“그래. 약속할게.”
놀러 가자는 말에 아이는 꽤 쉽게 수긍하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엘리아의 어두운 표정 때문인지도 몰랐다.
‘폐하께서 내 이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거겠지…….’
엘리아는 이능을 눈치채고 자신을 은근히 협박하던 황태자를 떠올렸다. 그가 언제라도 황제에게 전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국에 가면 결국 내 편은 없을 거야. 황실은 물론이고 후작저에서도.’
제국에는 펠릭스가 있겠지만, 모든 걸 그에게 의지할 수는 없었다.
“유리, 채비 좀 부탁해도 될까?”
“물론이죠! 마님! 저만 믿으세요.”
유리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엘리아는 그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저도 물론 함께 가는 거지요?”
유리가 묻자 엘리아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지…….”
“네! 그럼 얼른 채비를 마칠게요!”
사실 엘리아는 북부 사람들에게 후작가에서의 모습을 보여주어도 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젠 아르네스 후작가의 천덕꾸러기 엘리아가 아니니까 주눅 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야. 누군가에게 무시받을 위치도 아니지.’
대공비가 되었다고 그들의 태도가 달라지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니 더더욱 지고 싶지 않았다.
“유리, 내가 없는 동안 루시에게 제레미랑 샤미르를 잘 챙겨 달라고 전해주렴.”
“그런 건 걱정하지 마셔요! 집사님도 그렇고, 루시 님도 그렇고 다들 도련님 보필하는 데 도가 트신 분들인데요, 뭘.”
“하긴 그건 그렇네.”
유리가 믿으라는 듯이 고동색의 두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말했다.
“그럼, 샤미르는 내가 돌볼게요!”
덩달아 옆에 있던 제레미가 소리쳤다.
“도련님, 샤미르 양이 도련님을 돌봐주시는 건 아닐까요?”
“……뭐? 유리는 누구 편이야?”
“다, 당연히 도련님 편이지요.”
유리가 제레미의 마음을 풀어주느라 진땀을 빼는 모습을 지켜보는 엘리아의 얼굴에는 어느새 은은한 미소가 띠어져 있었다.
* * *
급한 정무와 채비를 모두 마친 엘리아는 이튿날 아침, 항구 도시 해란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엘리아의 만류에도 앤드류는 루카스를 포함한 정예 호위 기사단을 붙여주었다.
마차에 탄 지 두어 시간 정도 지나자, 저 멀리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엘리아의 심장도 불안을 감지하듯 미세하게 뛰기 시작했다.
*** 제국에 도착하자 화려한 금박의 사륜마차가 엘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작가가 아닌 펠릭스가 보낸 마차였다.
불안하게 흔들렸던 마음이 그의 배려에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마차를 타고, 한시도 쉬지 않고 달린 끝에 제국의 수도로 들어섰다.
엘리아는 차창 밖에 펼쳐진 녹음 짙은 수목들과 거리 곳곳마다 울창하게 피어난 꽃들을 보았다.
‘북부와는 정말 다르구나.’
엘리아는 새삼스레 드는 생각에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한여름의 제국은 찬란한 빛줄기 아래로 온갖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다.
“여긴, 이제 덥구나…….”
멍하니 중얼거리던 엘리아는 어깨에 걸친 두꺼운 숄을 벗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고, 찜통이 따로 없네요. 이리 주세요. 제가 챙길게요.”
유리가 숄을 건네받은 후 고이 접었다. 뱃멀미를 하는데도 쉬지 못하고 움직인 탓인지 살짝 어지러웠다.
마차는 화려한 장미가 피어난 정원을 지나, 라벤더 향이 유난히 진한 후작저의 정문에서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비 전하.”
루카스가 문을 열어주며 손을 내밀었다.
“감사해요.”
루카스의 에스코트를 받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후작저의 모든 사용인과 그 앞에 단정하게 서 있는 후작과 후작 부인, 그리고 세레나가 보였다.
‘뭐…… 뭐지?’
후작 부인은 살짝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엘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바들바들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