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07)

루시가 손을 휘휘 저으며 연기를 쫓은 뒤 물었다.

“아, 안녕하세요. 루시 님. 그저 한 가지 실험을 하던 중이었어요.”

“실험이요? 아니 무슨 실험을……. 아이고 방 꼴이 이게 뭐람. 담당 하녀가 일을 게을리했군요?”

“아니에요. 그분께 방에 잠시 들어오지 말아 달라고 제가 부탁드렸어요.”

샤미르와 루시가 말을 나누는 사이, 제레미는 방 안으로 들어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작은 돌 조각을 바라보았다.

“너는 무슨 일이냐?”

샤미르는 방 안을 살피는 제레미를 무심하게 쳐다보며 귀찮은 듯한 눈빛을 보냈다.

“이게, 대체 뭐…….”

돌의 표면이 부글부글 끓으며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만지면 안 돼.”

탁.

어느샌가 제레미 바로 옆에 다가온 샤미르가 아이의 손을 밀어냈다.

“이게 뭐야?”

“알 거 없어. 그보다, 왜 왔어?”

샤미르의 말에 얼굴을 굳힌 제레미는 휙, 고개를 돌렸다.

“너도 알 거 없어.”

“뭐? 여기는 내 방이야.”

“여긴 내 집이야!”

제레미가 새초롬한 눈으로 샤미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둘은 한동안 눈싸움을 하듯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눈을 돌린 건 샤미르였다.

“……참, 내가 애랑 무슨 말을 하겠니.”

“흥, 너도 애거든!”

발끈한 제레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샤미르는 담담히 손가락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대단하신 차기 대공 전하, 이만 나가주시겠어요?”

비꼬는 듯한 샤미르의 말에 억울해진 제레미는 입만 삐죽 내민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샤미르와 제레미 사이에 껴 있던 루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며 서 있었다.

똑똑.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방문이 열리고, 엘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어? 제레미?”

엘리아는 샤미르와 제레미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루시에게 시선을 옮겼다. 루시가 들고 있던 쟁반을 바라보던 그녀가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샤미르에게 간식을 전해주고 있었구나? 우리 제레미는 정말 다정하구나.”

엘리아의 말에 샤미르가 제레미를 쳐다보자 제레미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라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엘리아 님 미워!’

자존심이 상한 제레미는 엘리아에 대한 작은 원망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다다닥!

“아이고, 또 달려가시네.”

한숨을 푹 내쉰 루시가 쟁반을 내려놓은 채 다급히 그 뒤를 쫓아갔다.

“도련님! 뛰지 마세요. 다쳐요!”

폭풍처럼 두 사람이 나가 버리자, 멍하게 서 있던 엘리아가 샤미르를 바라보았다.

“오셨어요?”

샤미르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엘리아를 대했다.

“으응. 샤미르 그보다 내가 혹시 제로석을 사용할 방법이 있을까?”

“……무슨 일이 생겼군요?”

샤미르의 예리한 질문에 엘리아는 말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사태가 났어. 생각보다 파급이 세서, 산 중턱에 세웠던 1차 방어막도 위태로울 지경이야.”

새벽에만 해도 멀쩡하던 설산이, 단 몇 시간 만에 말썽을 부렸다. 자칫 마을과 사람들이 휩쓸릴 수도 있어 너무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녀가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이렇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펠릭스도 없는 지금 자신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문제를 해결하려 최대한 노력을 해봐야 했다.

불안하게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려 했다.

“막으시게요?”

“뭐라도 해봐야지……. 곧 눈이 마을을 덮칠 거야.”

엘리아의 근심 어린 목소리에 샤미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침 잘됐어요. 실험이 성공했거든요.”

샤미르는 포션으로 보이는 병 하나를 엘리아에게 들이밀었다.

“신의 샘물이에요. 마나를 늘리고, 능력을 개화시켜 줄 거예요.”

“세상에, 혹시나 싶어 물었던 건데, 이렇게 빨리……?”

병을 받아 든 엘리아는 다행이라는 생각에 병을 가슴에 꼭 안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보통 아이가 아니었어. 그때 스물하나의 연구원이 먼저 제로석을 발견했다고 그랬는데, 그럼 지금 연구원의 나이가…….’

제로석이 발견되고 정확히 3년 후에 제국이 북부를 침공했다. 그리고 엘리아는 16년이라는 시간을 되돌아왔다.

“샤미르 네가 8살이던가……?”

“맞아요. 그보다 지금 제 나이를 물을 때가 아닐 텐데요?”

“어머, 내 정신 봐. 그래, 갔다 와서, 갔다 와서 이야기하자.”

엘리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정문으로 내려가자, 앤드류가 초조한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일단 성은 안전합니다. 문제는 성 외부를 둘러싼 마을의 안전입니다. 기사들에게 지령을 전달했으나, 수가 부족하여 전부 대피시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방어막은요?”

“위태롭습니다.”

앤드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가야겠어요. 설산 아래로.”

“네? 안 됩니다. 마님, 너무 위험합니다.”

“가야만 해요. 제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저를 믿고 거기까지만 데려다주세요.”

엘리아의 말에 앤드류는 심란한 눈빛으로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떼를 쓰는 게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거예요. 제게 이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잖아요. 더는 시간이 없어요.”

“……마님, 저는 아무래도 괜찮지만, 마님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저도 위험한 상황에 저를 두려는 건 아니에요. 저를 믿어주세요. 그래야 모두가 살 수 있어요.”

엘리아의 굳건한 표정에 앤드류가 결국 항복했다.

“……그렇게까지 자신이 있으신 겁니까?”

“네.”

“하아, 나 참. 정말. 이런 무모한 일을…….”

앤드류는 다급히 옆에 있는 사용인에게 말 한 필을 내오라 이르며 덧붙였다.

“아, 종이랑 펜도 가지고 오게.”

“앤드류, 종이랑 펜은 왜……?”

“마님께서 성공하시든 못 하시든 전 대공 전하께 죽습니다. 유서라도 남겨야…… 크흡!”

앤드류는 말을 차마 잊지 못하고 고개를 휙, 돌리며 연거푸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는 시늉을 했다.

‘저기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어이없는 그 모습에 엘리아의 입이 벌어졌다.

앤드류는 팔랑거리는 성격과 달리 한 덩치 하는 사내였기에 파르르 떨리는 뒷모습이 안타깝다기보다는 우스운 쪽에 가까웠다.

그 때문인지 긴장해 굳어 있던 엘리아의 얼굴이 풀렸다.

“앤드류. 제가 지켜줄게요. 서두르죠? 우리.”

“마니임…….”

엘리아의 말에 앤드류가 감동한 듯이 눈빛을 초롱초롱 빛냈다.

“어, 얼른요!”

부담스러운 그 눈빛에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사용인이 말을 내오자 엘리아는 정신을 차리듯 포션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속에서 마나가 들끓었다.

* * *

앤드류는 엘리아를 설산 바로 아래까지 데려다주었다.

설산 중턱에 있던 방어막이 무너지면서 그 바로 아래 설치된 2차 방어막도 쓰러져 있었다.

울타리로 겹겹이 이루어진 방어막이 눈사태와 만나 더더욱 비대한 형태가 되어 쏟아져 내리려 하고 있었다.

“마님, 시간이 없습니다!”

다급한 앤드류의 말에 엘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눈덩이들이 커다랗게 휘몰아쳤다. 앤드류는 겁에 질린 눈으로 엘리아를 바라봤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엘리아가 눈을 떴다.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에 오색의 빛깔이 어려 찬란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앤드류는 잘못 본 건가 싶어, 연신 두 눈을 비볐다.

놀란 것도 잠시, 커다란 눈덩이들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마님!”

“……추워질 거예요.”

안 그래도 제국의 초겨울 날씨만큼 추웠던 북부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산 초입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오던 눈덩이들이 시간이 정지한 듯 멈추어 있었다.

“헉! 마, 마님……?”

앤드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움직이는 듯했던 설산이 마치 커다란 얼음 조각상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하아, 하아.”

“괘, 괜찮으십니까?”

앤드류가 엘리아의 지친 숨소리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네. 앤드류, 이건 일시적일 뿐이에요. 그러니 어서 사람을 시켜서 추가 방어막을…….”

이미 핏기가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엘리아가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스륵 눈을 감더니 몸을 휘청거렸다. 앤드류는 당황한 낯빛으로 그런 그녀를 받아 들었다.

“마, 마님. 정신 차리세요.”

“……앤드류, 시끄러워요.”

감겨 있던 눈이 살짝 떠지더니, 다시 스르르 내려갔다.

과도한 마나 사용으로 잠이 든 것이다.

“이럴 수가. 전하께서 엄청난 분을 대공비로 들이셨잖아…….”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앤드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 기사들의 비상 대피 명령으로 마을을 떠났던 영지민들이 돌아온 뒤 모두가 힘을 모아 방어막을 다시 세웠다.

옛 방어막보다 한층 더 견고하게 세우니, 거대한 눈덩이가 녹았음에도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다.

눈사태에서 벗어난 북부는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마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추측을 하며 기쁨을 나눴다.

누군가는 신의 가호라고 했고, 누군가는 설산 마물의 영향이라고 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들도 쏟아져 나온 가운데, 그 안에 진실도 섞여 있었다. 북부에 대공비가 오고부터 끔찍한 악재가 끊겼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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