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07)
  • “그럼요. 바로그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고, 제로석 두 개 정도는 남았잖아요?”

    남은 개수마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샤미르를 보며 엘리아는 경악했다.

    “샤미르, 만약 네가 사기꾼이라면 영지민들의 재산이 위험하겠어.”

    “사기 안 쳐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로석은 제 공부에도, 마님께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샤미르는 다시 한번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제게 이능을 보여주실 차례예요.”

    샤미르의 말에 엘리아는 창밖에 그려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구름에 세상이 흑백처럼 어두웠다. 그 주변으로 자그마한 눈꽃이 내리고 있었다. 아주 미세해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가자, 보여줄게.”

    엘리아는 살짝 허리를 굽혀 샤미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샤미르는 얼떨떨해하다가 이내 손을 맞잡았다.

    “딸이 생기면 이런 기분이려나?”

    “……또 정보를 빼앗기면 어떡하려고 이렇게 무방비해요?”

    “우리 사이에 뭘. 이제 상관없어.”

    샤미르가 그런 엘리아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예전의 나는 불신으로 가득 차서 늘 혼자였거든. 이젠 믿는다고 생각했으면, 말 그대로 진짜 믿을 거야.”

    “……흐음. 그래요, 그럼. 그렇게 믿어주세요.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 있거든요.”

    엘리아는 제 손을 꾹 움켜쥔 샤미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올곧은 눈빛이 어쩐지 믿음이 갔다. 왠지 모르게 정이 가는 아이라고, 엘리아는 생각했다.

    “그래.”

    두 사람은 성 밖으로 걸어갔다. 믿겠다고 다짐하니, 오히려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가 생긴 것처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 * *

    포치 아래에 서서 엘리아는 잿빛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리도록 푸른빛이 눈에서 새어 나왔다.

    ‘계절의 이능이라니…….’

    날씨를 바꾸는 것도 힘에 부치는데, 계절을 바꿀 수 있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성내의 먹구름이 천천히 걷히고 있었다. 그 뒤에 숨어 있던 찬란한 햇빛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빛이 대지에 스며들자, 순식간에 북부가 환해졌다.

    마른 나뭇가지에는 이파리 한 장 없고 꽃들이 자라지 않는 건 여전했지만, 북부에 잠시 내려앉은 햇살은 더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벌써 안색이 창백해요.”

    샤미르가 엘리아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몇 년간 멜라네시아를 우린 찻물을 마셨거든.”

    “……마나가 온전치 않으신 거군요.”

    샤미르의 말에 엘리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멜라네시아가 무엇인지, 어떤 경위로 마시게 됐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아이였다.

    “이상하네. 멜라네시아 복용자라기엔 이능 사용이 너무 수월해요. 원래는 메마른 마나로 이능을 발현하면 고통이 동반되거나 아주 일시적으로 나타나거든요.”

    “그래? 그러고 보니, 제국에서 발현했을 땐 찰나처럼 지나갔어.”

    “이능을 오랜 시간 발현시킨 적이 있나요?”

    “응. 분명, 바바리안 때…….”

    그러고 보니, 펠릭스가 잠시 성을 비웠을 당시 쓰러진 이후부터 이능 사용이 한결 수월해졌던 것도 같았다.

    ‘분명 몸이 약해서 쓰러진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προφητικός κράτος ἀναγεννάω.」

    그 문장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신의 문장을 읽은 것 같아…….”

    멍하니 중얼거리는 엘리아의 말에 샤미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렇다면, 모든 게 이해돼요.”

    샤미르의 연갈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 * *

    샤미르는 헬리오스의 연대기와 제로석을 챙기며 엘리아에게 연구에 필요한 몇 가지 도구들을 요청했다.

    엘리아는 그 요청에 순순히 응하기는 했으나, 어린아이가 알 수 없는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는 샤미르의 정체가 점점 궁금해졌다.

    ‘아이가, 아이가 아닌 것 같아…….’

    샤미르는 순수한 아이처럼 제레미와 투덕거리다가도, 그녀도 모르는 지식과 의외의 생각들을 툭툭 내뱉으며 엘리아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머리가 상당히 비상한 아이 같긴 한데.’

    애써 상념을 떨쳐낸 엘리아가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엘리아는 아르티젠 성의 최근 보수 내역이 담긴 서류를 펼쳐보았다.

    성이 지어진 지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외곽의 무너진 부분을 보수하는 비용이 꽤 많이 들었다.

    서류를 살펴보니 다행히 관광 사업으로 벌어들인 자금의 규모가 상당하여, 이로 인해 보수 작업에 크게 무리는 없어 보였다.

    ‘펠릭스도 그래서 북부를 관광 사업지로 개발시키고 있는 거겠지.’

    자원이 부족한 북부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사업이기도 했다.

    똑똑.

    “마님, 앤드류입니다.”

    “들어오세요.”

    북부의 일을 처리하며 어느샌가 앤드류의 방문이 익숙해진 엘리아였다.

    “요청하신 물건을 아이에게 전달해 두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대체 왜 그것들을…….”

    앤드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아가 살짝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 성장에 도움을 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러시군요, 라고 이해하기엔, 애가 다룰 물건이 아니긴 하던데 말입니다…….”

    “괜찮아요. 그리고 유능한 앤드류가 항상 신경 쓰고 문제 생길 부분들 미리 챙겨주고 있잖아요.”

    “……그거야 뭐, 하긴 이렇게 훌륭한 집사가 있는 이상 문제 될 게 없긴 하죠!”

    떠넘기는 엘리아의 말에 껌벅 넘어간 앤드류가 당당하게 제 가슴팍을 치며 다짐하듯이 외쳤다.

    “그나저나 설산의 상태는 어때요?”

    앤드류를 보며 웃음 짓던 엘리아가 웃음기를 거두며 물었다. 항상 이맘때쯤 되면 북부는 설산을 예의 주시하곤 했다. 날씨가 살짝 풀릴 시기에 일어나는 눈사태는 북부의 골칫거리였다.

    “……마님께선 가끔 모르는 게 없으신 것 같습니다.”

    앤드류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엘리아는 아차, 싶은 마음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게, 아직 별 조짐이 보이진 않습니다. 대공 전하께서도 안심하고 예정대로 제국행 선박에 오르실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네. 그럼 내일 아침에 함께 배웅하실 겁니까?”

    그는 새벽이슬이 맺히기도 전에 떠날 예정이었다.

    “그럼요.”

    엘리아의 경쾌한 대답에 앤드류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나 싶지만, 요즘따라 두 분 보기가 참 좋습니다.”

    “……그, 그런가요?”

    엘리아의 볼 위로 옅은 홍조가 비쳤다. 그녀의 수줍은 모습을 지켜보던 앤드류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아,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네.”

    앤드류는 싱긋 미소 지으며 집무실 밖으로 단정한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부쩍 태도가 부드러워지긴 했지.’

    어제 펠릭스와 정원을 산책했다. 정원이라고 하기에는 휑하고, 추웠지만 그와 함께였기에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날 엘리아와 펠릭스는 제국에서 언제 돌아오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국에서 돌아오면, 다 함께 설산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엘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흔쾌히 그러자고 대답했다. 그가 약속했던 걸 잊지 않아 기뻤다.

    그리고 기쁜 만큼 그가 없는 동안 북부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더 신경 쓰고 싶었다.

    ‘펠릭스가 돌아오기 전까지 내 몫의 일만큼은 완벽하게 처리하자.’

    엘리아는 속으로 다짐하며 다시금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창가를 등진 채 인장을 찍던 그녀의 등 뒤로 어느덧 새벽빛 한 줄기가 내려앉았다.

    * * *

    북부 기사단은 그들의 다급한 성미를 알려주듯 서로 앞다투어 달리며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펠릭스와 기사단을 배웅하던 사용인들과 집사가 물러서자 성 앞에는 엘리아와 제레미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지난 기억에 슬며시 미소 지으며,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제레미, 어때? 아직도 그러니? 아직도 대공님께서 제레미를 신경 안 쓰시는 것 같아?”

    “…….”

    제레미는 뒷짐을 진 채 두 볼을 붉히다가도 눈동자를 또륵, 굴려 딴청을 피웠다. 아이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엘리아가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주었다.

    “엘리아 님! 그런데요.”

    “응?”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주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샤미르, 말이에요. 왜 방에서 안 나와요?”

    “어머, 제레미. 그게 신경 쓰였구나?”

    “밥도 맨날 방에서 혼자 먹구…….”

    “그럼 한번 가보지 그러니?”

    엘리아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제안하자, 제레미는 동그랗고 큰 눈을 여러 번 깜박거리더니 당황한 듯 두 손을 휘적거렸다.

    “제, 제가 왜요! 제레미는 싫어요!”

    “정말? 그렇구나. 아쉽네. 제레미가 간식 들고 찾아가면 샤미르가 무척 좋아했을 텐데.”

    “정말요?”

    “후후. 그럼.”

    망설이는 듯한 제레미의 얼굴에 엘리아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레미, 샤미르의 어디가 좋아?”

    엘리아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제레미를 향해 불시에 물었다.

    “웃을 때, 엘리아 님을 닮아서…… 네? 싫다니까요!”

    허둥대던 제레미가 다급하게 뒤돌아서 성 쪽으로 달려갔다.

    ‘내 웃는 모습과 닮아서 좋다는 거야?’

    제레미의 말을 곱씹으며 엘리아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어쩜, 날이 갈수록 더 사랑스럽네.’

    엘리아는 멀어져 가는 제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갔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었다.

    *** 꿀꺽, 제레미는 샤미르의 방문 앞에 서서 침을 삼켰다. 그 옆에는 제레미의 유모 루시가 쟁반 위에 샌드위치와 차를 들고 서 있었다.

    “도련님.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셔요.”

    루시가 아이를 재촉했다. 제레미는 난처한 듯 손을 들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이가 무언가를 다짐한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노크 안 해!”

    그리곤 벌컥, 문을 열어버렸다. 방 안에서 희뿌연 연기가 허공을 떠돌았다. 역하고 이상한 냄새도 함께였다.

    “으엑, 이게 무슨 냄새야?”

    제레미가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막았다. 옆에 있던 루시도 냄새를 맡고는 쟁반을 들고 있던 손을 살짝 떨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샤미르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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