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07)

옆에 있던 유리도 덩달아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엘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는 가기 싫다더니?”

아이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한참을 머뭇거리기만 했다.

“로렌츠 영애 이상해요. 정말 싫어.”

“……음, 좋은데 싫은 그런 거야?”

엘리아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제레미는 인상을 쓰며 도리질 쳤다.

“그거 아니에요!”

“음, 그럼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니?”

무슨 일이 있고도 남을 사람이긴 했다. 이사벨라 로렌츠는 유리가 지긋지긋해 할 정도로 3일 내내 엘리아의 곁을 맴돌았다.

“무슨 일을 하시기에, 석찬에 참석하지 않나 하여서요.”

바로 어제 엘리아의 집무실에 들이닥쳐 그녀가 한 말이었다.

엘리아는 한 달 전 앤드류에게서 대공비가 해야 할 일 대부분을 넘겨받았고, 그날은 유독 확인해야 할 물품 목록이 많았다.

‘로렌츠 영애가 계속 지켜보는 통에 다 하지도 못했지만.’

어제의 짧은 기억을 떠올리던 엘리아는 다시금 귀엽고도 사랑스러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퍽 진지해 보였다.

“……제레미 때문에 아버지가 결혼을 못 한댔어요.”

“뭐? 그런 소릴 했다고?”

“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듯 아이의 청록색 눈동자에 우울한 기색이 엿보였다.

“치, 하지만 제레미는 알아요. 아버진 그냥 로렌츠 영애가 싫은 건데.”

“크흡…….”

자못 심각한 아이의 얼굴에 유리가 웃음을 애써 참으며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엘리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 저었다.

‘그이를 좋아하는 건 느꼈지만, 아이에게 그런 말까지 하다니.’

문득 제레미가 자신을 잘 따른다는 식으로 말했던 이사벨라가 떠올랐다. 죄다 허풍이었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지만 아무리 대공의 친구라 하여도 아이에게 못된 말을 지껄이는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다.

“……자, 어서 우리도 준비하자. 제레미에게 못된 말 한 사람에게 질 수는 없지.”

엘리아는 유리의 손에 제레미를 맡기며 상황을 정리했다. 벌써 점심때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제레미를 보며 엘리아 역시 발걸음을 돌렸다.

더 이상 그녀를 참아주고 싶지 않았다.

* * *

엘리아는 처음 가보는 온천 축제라 설레기도 하고 긴장도 되었다.

마차의 행렬을 따라 사람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발을 디딜 틈조차 없어 보였다.

“고요하던 북부가 맞나 싶어요.”

엘리아는 마차에 난 창문을 바라보더니 호기심에 두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펠릭스는 사랑스럽게, 이사벨라는 짜증이 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제레미는 이사벨라를 째려보고, 샤미르는 무심한 눈으로 관찰하듯 모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덜커덩! 덜커덩!

한 마차 안에 다섯이 앉으니, 내부가 살짝 비좁았다. 그래서 그런지 마주 앉은 펠릭스의 무릎이 엘리아와 자꾸만 맞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엘리아는 몸을 웅크리며 닿지 않도록 신경 썼다.

“처음 열린 축제니까. 부인이 괜찮은지 말해줬으면 싶군.”

“아, 그래요. 그러…….”

“펠릭스, 내 의견도 들어줄 거지? 부인께선 이런 쪽에 관심이 영 없어 보이시던데. 아 맞아! 요즘 모자 사업에 투자 중이거든? 그래서 북부에도 후원해 볼까 싶어.”

펠릭스의 말에 얼른 이사벨라가 끼어들며 후후,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반갑게 대답하려던 엘리아는 순간 얼굴이 굳어버렸다.

“……모자? 네가 쓰고 다닐 법한 모자는 북부에 쓸모가 없어.”

펠릭스는 어이없는 소리를 하는 그녀에게 살짝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런 무심한 펠릭스의 말투가 지금 이 순간은 너무 듣기 좋았다.

“그, 그래? 그러면 뭐, 다른 걸 후원해야겠다. 뭐가 좋을 것 같아? 뭘 말하든 다 후원해 줄게. 내겐 별 어려운 일도 아니고.”

제 능력을 어필하는 이사벨라는 펠릭스가 아닌 엘리아를 향해 잡아먹을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흠. 북부에 놀러 온 거 아니었나? 북부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릴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마치 네가 왜 그걸 신경 쓰냐는 듯 그의 목소리는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이, 겸사겸사. 내가 또 북부를 너무 좋아하잖아. 펠릭스가 있는 곳인데 내가 챙겨줘야지. 호호호.”

이사벨라는 웃으며 손을 그의 허벅지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축제나 즐기고 가.”

펠릭스는 그 손길을 불쾌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치워 버렸다. 그렇지만 이사벨라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즐겁다는 듯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떠들었다.

*** 한 시간여를 달려서 도착한 곳은, 성과 해란 사이에 있는 데르티포스 마을이었다.

온천 마을이라고도 불리곤 했는데, 엘리아는 이곳에 관해 이야기만 들었지 직접 방문한 적은 처음이었다.

“저기 봐! 연기예요!”

제레미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폴짝폴짝 뛰며 좋아라, 했다. 엘리아가 웃으며 아이의 모직 코트 앞자락을 잘 여며주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목욕하는 거예요?”

아이의 물음에 엘리아는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야외에서 목욕이라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호호호, 제레미. 그런 걸 부인에게 물어보면 어떡하니?”

그사이 엘리아의 얼굴 표정을 본 이사벨라가 훗, 웃으며 끼어들었다.

“네?”

“호호호, 부인이 이런 곳을 즐겨보기라도 했겠니. 호호호 보통 이런 온천 축제는 족욕만 한단다.”

이사벨라가 이젠 알겠냐는 듯 제레미가 아닌 엘리아를 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아아, 그렇군요. 저는 축제에 참여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서요.”

엘리아는 그녀의 말에 살짝 기분이 나빠졌지만 또 맞는 소리기도 해서 입을 다물었다.

“호호, 축제가 처음이라니 다른 가문 영애들과는 너무 다르시네요.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인가?”

이사벨라가 제 말만 하고는 휙, 뒤돌아 걸었다.

펠릭스는 그런 이사벨라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크흠.”

그리고 그 모습을 황당하게 쳐다보던 엘리아는 축제를 망치고 싶지 않아 애써 표정을 풀었다.

“애들아, 이리 오렴. 우리도 가보자꾸나.”

펠릭스와 엘리아는 아이들을 챙겨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북적이는 사람들 틈 사이,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대공 전하, 정말 죄송합니다. 오셨다는 말씀 듣고 급히 달려왔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너무 몰려서……. 당장 안내부터 드리겠습니다.”

콧수염 난 사내가 달려와 연신 허리를 숙이며 말을 늘어놓았다.

“아! 혹, 이분께서 대공비 전하이신지…….”

“아, 네. 반가워요. 엘리아 로이드라고 합니다.”

“아휴, 정신이 없어서 소개도 못 했네요. 저는 이안이라고 합니다. 대공 전하의 은혜로 북부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과, 과찬이세요.”

살짝 얼굴을 붉힌 엘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앞쪽에서 피식,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엘리아와 이안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엔 앞서 걷던 이사벨라가 비틀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제국 분은 아니신가 보죠?”

이사벨라가 하찮은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이안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이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지만, 그는 곧 장사꾼의 얼굴이 되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국 너머 이웃 나라에서 이곳까지 왔죠. 원래는 행상인이었는데, 대공 전하께서 좋은 제안을 해주신 덕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흐음. 그래서 저를 몰라보셨구나.”

“누구신지?”

“하, 아직도 모르시다니, 저는 이사벨라 로렌츠, 공작가의 공녀랍니다.”

이사벨라의 말에 이안이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하하. 제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제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흥, 뭐 무식해서 그런 거니 용서해 주도록 하죠.”

“아하하, 제가 무식해서…… 공녀님의 넓으신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허허, 애써 웃던 그는 한층 더 어색해진 분위기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가지.”

펠릭스의 한마디에 상황은 일단락됐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먹거리와 각종 장신구를 파는 상인들로 거리가 빼곡했다.

앞에선 펠릭스와 이안이 축제 얘기를 나누었다. 뒤에선 제레미와 샤미르가 투덕거리며 싸우고 있었다.

엘리아는 옆에서 걷고 있는 이사벨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불편하네. 휴…….’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이사벨라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대공 부인께선 저와 펠릭스 사이에 혼담 이야기가 오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까요?”

“그게 무슨…….”

엘리아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이사벨라의 말을 곱씹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당혹스러움이 밀려왔다.

“아! 모르셨군요. 괜한 말을 꺼냈네. 부디 잊어주셔요. 아까 대공비 전하시냐고 묻는데 제가 대답할 뻔했지 뭐예요. 그게 웃겨서 그만.”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엘리아의 발걸음이 현저히 느려졌다. 엘리아는 펠릭스에게 사뿐히 다가서는 이사벨라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 *

언덕을 향해 한참을 걷자 비탈길 너머 모락모락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언덕 꼭대기에 도착하자, 온천 앞에 작은 테이블, 의자, 그리고 캐노피가 설치되어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 방문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특별히 따로 마련한 곳입니다.”

이안의 과장된 손짓과 의기양양한 표정에 조금 전 상황이 조금 짜증스럽게는 했지만 엘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부디, 축제를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이안은 정중히 인사를 한 후, 물러섰다. 이에 펠릭스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온천 뒤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제레미는 양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우와! 이거 봐. 샤미르, 온천이야!”

“알아. 나도 봤어.”

샤미르는 관심 없다는 듯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정말 너!”

“너, 뭐?”

“씨이, 너 진짜 싫어.”

“도련님, 너는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거야?”

아이들은 투닥이면서도 이전보다 더 편하게 말을 나누고 있었다. 엘리아는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 정답고 좋았기에 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 의자에 앉자 축제에 따라나선 몇몇 하녀들이 천천히 차를 우려 찻잔에 따라주었다.

“엘리아 님! 우리 저기 가봐요!”

“……어어?”

엘리아는 제레미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와 아이들은 온천수가 흐르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신이 난 아이는 김이 피어나는 온천물에 서슴없이 발을 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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