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107)

휙, 돌아본 보랏빛 눈동자가 무언의 압박이라도 보내듯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입까지 올라오는 싫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먼 북부까지 온 손님의 부탁을 거절할 순 없었다.

“와아. 신나라. 저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 있죠?”

이사벨라의 새하얀 얼굴 위로 꽃이 피듯 환한 미소가 자리했다.

펠릭스에게 말을 거는 이사벨라의 분홍빛 머리카락이 자꾸만 그의 어깨에 부딪혔다.

‘이런 건 좋지 않아…….’

불쑥불쑥 솟는 어두운 감정을 몰아내듯 엘리아는 연신 고개를 휘저었다.

* * *

엘리아는 이사벨라와 마주 보고 앉아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준비가 많이 늦어지는 모양이에요.”

“옷이 좀 더우셨는지 갈아입으러 가셔서 시간이 좀 지체되나 보네요.”

펠릭스는 날이 조금만 따뜻해져도 더위를 참지 못해 옷을 갈아입곤 했다.

“하긴, 펠릭스는 어렸을 적부터 더위를 많이 탔어요. 제국에 여름이 찾아오면 늘 그늘진 나무 아래 누워 있기를 좋아했는데, 여기선 그러기도 어렵겠네요.”

호호, 이사벨라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엘리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 굳이 대답하진 않았다.

“릴리가 살아 있을 적에는 무척 잘 웃는 아이였는데, 지금은 좀 차갑지요?”

“…….”

“아. ……릴리가 누군진 알죠? 첫 번째 대공비. 그 아이가 제 친구이기도 하거든요. 어렸을 적부터 함께 자라서 그런가 릴리랑 제가 좀 닮았어요. 후후.”

이사벨라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어 보였다.

“……그러시군요.”

“네. 그러하답니다. 펠릭스도 항상 절 볼 때마다 그 아이가 생각나는지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얼마나 애절한지, 그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에요.”

“…….”

딱히 그가 이사벨라를 바라보는 눈빛이 애처로워 보이지 않았지만, 엘리아는 속내를 꾹꾹 참으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엘리아 님!”

열린 식당 문 사이로 제레미가 들어오며 소리쳤다. 아이는 이사벨라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다가 가만히 엘리아 옆자리에 가 앉았다.

“오랜만이구나, 제레미.”

“……안녕하세요. 로렌츠 영애.”

이사벨라의 화사한 인사에 제레미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샤미르, 펠릭스도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이사벨라는 다소곳이 인사하는 샤미르를 평가하듯이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사교계에서 못 보던 아인데…….”

“아, 샤미르는 북부에서 나고 자란 아이라 제국과 거리가 멀 거예요, 영애.”

“아, 아아. 제레미의 놀이 친구구나?”

“…….”

모두가 정적에 휩싸였다. 귀족이 말하는 놀이 친구는, 말 그대로 장난감이었다. 그런데도 이사벨라는 여전히 해맑은 얼굴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꽃사슴 같은 순수한 눈망울.

“놀이 친구와 함께 식사라. 북부는 역시 색달라서 좋아요.”

이사벨라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날의 정찬은 이사벨라의 이야기에서 이사벨라의 이야기로 끝이 났다.

아무도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지만, 그녀는 놀랍게도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식사가 끝나고, 엘리아가 의기소침해 있는 제레미와 별 표정 없는 샤미르를 챙겼다.

펠릭스는 급한 업무를 전하러 온 앤드류와 함께 식사 중간에 자리를 떠난 후였다.

“대공 부인.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저와 함께 차 한잔하시겠어요?”

고개를 든 엘리아는 말간 얼굴의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응? 이전에는 나한테 이런 제안을 했던 적이 없었는데…….’

이사벨라가 결혼식을 올려 북부에 올 수 없을 때까지, 그녀가 엘리아에게 관심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일까?

‘펠릭스와 관계가 달라져 상황이 바뀌어 버린 걸까.’

이전과 다른 그녀의 행동에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엘리아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네. 그러도록 하죠.”

* * *

엘리아는 아이들을 루시에게 맡긴 후, 이사벨라와 함께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사용인들은 서둘러 응접실 벽난로 안으로 장작을 잔뜩 넣었다. 활활 나무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잠시나마 채워주었다.

따뜻한 차를 내온 하녀들이 물러갔다. 엘리아는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북부는 참 운치가 있어요. 뭐, 흠이라면 사시사철 추운 날씨려나.”

“아무래도 그렇죠.”

“……그나저나 펠릭스는 괜찮나요?”

“……?”

갑작스러운 물음에 찻잔을 내려다보던 엘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벌써 7년 전 일이긴 하지만, 우리 펠릭스가 릴리가 떠난 이후로 많이 힘들어했거든요.”

이사벨라의 입가엔 여전히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도망친 전 대공비도, 아마 릴리의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었을 거예요. 부인께서도 그 전철을 밟을까, 솔직히 조금 걱정이 되네요.”

이사벨라는 마치 그녀가 안쓰럽다는 듯 거짓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로렌츠 영애,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흐응. 사교계랑 거리가 영 먼 분이라, 말귀를 잘 못 알아듣네.”

이사벨라는 혼잣말하듯이 나직하게 중얼거렸지만, 필시 다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네?”

“뭐, 제대로 된 사교계 활동도 한 적이 없으시니, 귀족들의 사교계 언어 이해가 힘드실 거예요. 이해하니 걱정 마세요. 호호호호.”

이사벨라는 대놓고 그녀를 무시하는 말을 내뱉었다.

“……말이 심하시네요. 영애!”

모욕적인 말에 엘리아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호호호, 로이드 부인껜 조금 천박하긴 해도 직설적인 화법이 알아듣기 쉽잖아요. 그렇죠?”

이사벨라는 여전히 반듯하게 허리를 세운 채로 아무렇지 않게 깔깔 웃기 시작했다.

“하…….”

그녀의 언행은 실로 안하무인이었다.

“부인. 대공비, 그거 그렇게 쉬운 자리 아니에요. 아, 제레미는 잘 돌보고 계신 거죠?”

쯧쯧, 혀를 차던 이사벨라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이가 릴리와 제가 닮았다고 어찌나 저를 따르는지 항상 마음이 쓰여서요.”

“…….”

이사벨라가 딱딱하게 굳어진 엘리아의 표정을 관찰하듯 살펴보며 싱긋, 웃었다.

*** “아, 이것도 너무 어려운 말이었나.”

“이것 보세요. 그런 식으로…….”

“그러니까 부디 조신하게 애나 잘 돌봐주시라는 말이에요. 딴 데 한눈팔지 말고. 이 정돈 알아듣죠?”

이사벨라는 엘리아의 말을 끊으며 자기 할 말만 늘어놓았다. 그리고 어이없어하는 그녀의 얼굴에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면서 조소를 보냈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네. 먼저 일어서 볼게요. 아참, 돌아다니면서 물건 좀 사려고 하는데,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필.요. 없습니다.”

“사양할 필요 없어요. 북부 사정을 제가 모르겠어요? 이 정도는 제가 충분히 베풀어 드릴 수 있거든요.”

이사벨라가 또다시 친절한 웃음을 입가에 걸고 상냥하게 미소를 건넸다.

“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으응, 대답 기다리다 해 지겠네. 부인, 바빠서, 먼저 실례, 후훗.”

미소 짓고 떠나는 그녀의 빈자리에 아직도 식지 않은 차가 모락모락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 * *

“안 갈래요.”

제레미가 고개를 휙 돌리며 안 그래도 작은 몸을 더 작게 웅크리기 시작했다.

“으음, 왜 가기 싫을까?”

엘리아가 제레미를 살살 달래듯이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그냥 싫단 말이에요!”

“우리 제레미는, 나랑 가는 게 싫구나?”

시무룩, 고개 숙인 엘리아 앞에서 제레미가 안절부절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그, 그런 게 아니라요오.”

아이는 말끝을 늘이고, 볼을 부풀렸다. 그러다 제 뜻을 알아주지 않는 엘리아가 야속하다는 듯이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제레미는 온천 축제에 펠릭스, 엘리아뿐만 아니라 이사벨라 또한 동행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런 제레미의 마음을 풀어주는 건 엘리아의 몫이었다.

유리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미소 짓고 있었지만, 탐탁지 않은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마님, 마님께선 괜찮으신 거예요?”

참다못한 유리가 입을 열었다.

“……손님인데, 문제 될 건 없지.”

한참 뜸을 들이던 엘리아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무리 대공님과 친우 사이여도,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굴 건 없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아, 유리. 그래도 로렌츠 공작 가문의 여식이야. 북부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인 데다 무엇보다 대공님의 손님이기도 하고.”

엘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요. 로렌츠 아가씨께서 오신 지 3일이 흘렀는데, 어디 나가시지도 않고 마님의 일거수일투족에 계속 사설을 붙이잖아요. 하다못해 온천 축제까지……. 제가 대공님께 언질이라도 드려볼까요?”

그동안 엘리아의 바로 옆에서 일하며 쌓인 게 많았는지 유리가 잔뜩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아니야. 누군가에게 의지해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 않아. 이건 내 몫이야.”

“마니임…….”

엘리아가 말끝을 늘이며 애원하는 자신을 올곧은 시선으로 바라보자 유리가 단념하듯 고개를 숙였다.

“마음 써줘서 고맙구나. 유리.”

엘리아는 유리의 움츠린 어깨를 살짝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녀의 표정은 울상이었다.

“……갈 거지?”

아래로 시선을 내린 엘리아가 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는 입술을 한참 달싹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말? 우리 제레미랑 같이 간다니까 벌써 기대가 되네.”

엘리아의 말에 아이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정말 가기 싫지만, 유리의 말을 들으니 따라가서 엘리아를 지켜줘야 할 것 같았다.

“어서 준비해야지?”

그녀는 아이의 분홍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올렸다. 그러자 새하얗고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내가 혼내줄게요.”

“응?”

“나만 믿어요!”

아이가 허리춤에 손을 짚으며 소리쳤다. 제법 당돌하고, 힘 있는 외침이었다.

“……그래요! 도련님. 마님은 저희가 지키자구요!”

“응!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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