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07)
  • 제레미는 침울한 표정으로 아도니스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이쁘고 사랑스러운 꽃을 보고 감탄하지 않는 샤미르가 이상했다.

    힐끗힐끗. 아무리 샤미르의 얼굴을 바라보아도 아무 말도, 표정도 없었다.

    “아, 아직 아파?”

    “……아니, 생각 좀 하느라.”

    샤미르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제레미는 샤미르의 대답이 반가워 아도니스를 이쁘다고 말하지 않는 그녀를 용서하기로 했다.

    “생각 뭐?”

    “너를 어떻게 처리해야 되나.”

    “처, 처리……?”

    선뜩한 소리에 깜짝 놀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제레미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너는 참,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멍청이였네.”

    샤미르의 거침없는 말에 제레미가 울상을 지었다.

    “내가 왜 멍청이야!”

    “……됐어. 돌아가자.”

    “뭐어?”

    소녀는 우물쭈물 내뱉는 제레미의 손을 놓더니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야!”

    득달같이 쫓아간 제레미가 다시금 샤미르의 따뜻한 손을 붙잡았다.

    “에, 엘리아 님이 손잡고 돌아오랬어.”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샤미르의 눈빛에 제레미는 애써 말을 덧붙였다.

    둘은 손을 잡은 채 듬성듬성 눈이 쌓인 화원을 걸어갔다. 어색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제레미는 몇 번이고 얼굴을 붉혔다.

    “아도니스를 같이 봤으니까, 반말한 건 특별히 용서해 줄게!”

    제레미의 말에 샤미르는 우습다는 표정으로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 * *

    엘리아는 창을 통해 다람쥐처럼 오도도 걸어오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책상에 앉은 엘리아는 방금 전 샤미르와의 대화를 곱씹으며 헬리오스의 연대기를 꺼내 들었다.

    ‘성서에 쓰인 문자…….’

    세월의 흐름과 함께 누렇게 변색된 종이가 팔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넘어갔다.

    딱 한 문장만 적혀 있고, 나머진 전부 백지였던 마지막 장.

    ‘이럴 리가 없는데…….’

    그러나 전과 달리 한 문장도 적혀 있지 않은, 그저 백지가 드러났다. 어떤 페이지를 펼쳐보아도 그때 봤던 그 문장은 없었다.

    모든 게 사라지거나 혹은 흡수된 것처럼, 그저 빈 페이지였다.

    타다다닥!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돌아왔다. 엘리아는 책을 펼친 그대로 당혹스러운 마음을 갈무리하며 아이들에게 다가섰다.

    “화해했니?”

    엘리아가 묻자, 제레미와 샤미르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더니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이 일을 어쩌면 좋지…….”

    귀여운 두 꼬마를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엘리아가 다 함께 놀러라도 갈까 하며 중얼거렸다.

    “노, 놀러 가요?”

    살짝 신난 제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 싫어요.”

    샤미르는 그 말만 남기고 뒤돌아 서재를 나섰다. 엘리아는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었니?”

    “몰라요. 날 싫어하나…….”

    “응?”

    “손을 안 잡아줘서, 내가 싫은가 봐요.”

    아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내가 또 잡아줬는데, 치! 나도 싫어요!”

    만약 아이에게 귀와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축 처져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엔, 싫어하는 것 같지 않은걸?”

    “그걸 엘리아 님이 어떻게 아세요……?”

    “음. 그냥 보면 알아. 좋아하는 건 몰라도 싫어하는 건, 그냥 알게 돼.”

    엘리아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얼굴들을 애써 지우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이라면, 저도 아는 거 있어요!”

    아이가 제법 당차게 소리쳤다.

    “엘리아 님은 날 좋아하잖아요! 맞지요?”

    무슨 말을 하려나 했는데, 아이는 꽤나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제레미는 불안한지 입술을 삐죽거리며 엘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당차게 해놓고, 혹시 아니면 어쩌지 따위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눈동자였다.

    ‘좋아. 정말 정말 좋아해.’

    훌쩍 커버린 그 날의 제레미는, 알고 있었을까.

    알았으면 했다. 진짜 어머니가 될 수도, 좋은 어머니가 될 수도 없었던 그 사람이 그래도 날 좋아했다고. 나는 새어머니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갔기를.

    반짝반짝 빛나던 아이의 눈동자가 살짝 흐릿해졌다.

    싫어요? 하고 묻는 듯한 표정의 아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안타까웠다.

    엘리아는 작은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건장한 청년이었던 제레미가 마음 한편에서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많이, 많이 좋아하지. 누구보다 더 많이.”

    한 줄기의 찬란한 햇빛이 창가에 드리웠고 빛은 두 사람 곁을 잠시 머물렀다가 떠났다.

    * * *

    북부에도 막 여름이 시작되었다. 여름이라고 춥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나마 눈이 소복하게 쌓이진 않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엘리아는 유난히 북적거리는 사용인들의 모습을 창가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사벨라 로렌츠.

    로렌츠 공작가의 하나뿐인 외동딸이자, 펠릭스의 소꿉친구인 그녀가 휴양차 방문하는 시기였다.

    똑똑.

    “마님, 손님을 맞이할 시간입니다.”

    항상 엘리아의 곁에 머물며 시중을 드는 유리의 목소리였다.

    “그래.”

    엘리아는 고개를 돌려, 화장대 위에 올려진 황동 거울을 바라보았다.

    날씨도 풀린 겸, 유리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땋아 올려 묶었다. 꽃과 덩굴을 수놓은 벨벳 소재의 자줏빛 이브닝드레스는 그녀의 화사한 얼굴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옷매무새를 정돈하던 엘리아는 다시금 들리는 노크 소리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북부 성 사람 모두가 나와 공작가 영애를 맞았다. 제레미와 샤미르는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예외였다.

    엘리아는 오늘따라 곁에 서 있는 무심한 얼굴의 펠릭스가 얄밉게 느껴졌다.

    ‘미리 언질도 안 해주는구나…….’

    이게 그의 성격이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엘리아는 살짝 속상했다.

    ‘사이가 좋아진 건 분명한데.’

    그는 설산에 다녀오고 난 뒤 언제나 엘리아의 방을 찾았다. 아침은 걸러도 꼭 점심과 저녁을 함께 먹었다. 더군다나 여유로울 땐 티타임도 자주 함께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엘리아에게 로렌츠 공작가의 ‘로’ 자도 꺼내지 않았다.

    “……잘 어울리네.”

    무심한 목소리로 펠릭스가 엘리아의 머리 스타일을 보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네? 어머.”

    이사벨라의 방문만 생각하고 있던 엘리아는 펠릭스의 뜻밖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무심함을 가장한 그의 관심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엘리아는 조금 전 가졌던 마음을 숨기기라도 하듯 고개를 돌려 정문을 바라보았다.

    다그닥! 다그닥!

    정문 너머, 금박을 두른 마차 한 대가 빠르게 성안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값비싼 보석과 조화로 치장되어 있는 마차였다.

    “워! 워!”

    마부의 목소리에 맞추어 멈춰 선 사륜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연륜이 넘치는 부인이 나와 반듯이 고개를 숙였다.

    “로렌츠 공작 가문의 이사벨라 영애십니다.”

    부인은 곧장 레이스와 핑크빛 천으로 이루어진 우산을 펼쳐 들었다.

    엘리아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오긴 하나, 잘 보이지도 않고 희미했다.

    새하얀 드레스와 화려한 숄을 걸친 이사벨라가 마차에서 내려왔다.

    “오랜만이야, 펠릭스!”

    환한 미소와 눈웃음. 화사한 분위기임에도 느껴지는 우아한 손짓. 그 모든 게 이사벨라를 한결 빛나게 해주고 있었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 부인. 펠릭스의 오랜 친우, 이사벨라 로렌츠예요.”

    엘리아를 바라보는 이사벨라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어져 있었다. 예전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이사벨라와의 첫 만남이었다.

    “……반갑습니다, 로렌츠 영애.”

    엘리아는 분홍빛 머리카락과 제비꽃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펠릭스의 손님이니까,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지.’

    그런데도 좀처럼 미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엘리아는 힐끗,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사벨라에게 짧은 인사말을 건넬 뿐 이렇다 할 표정도, 말도 없었다.

    “펠릭스, 이번에 아르티젠 북부에서 온천 축제를 연다지?”

    이사벨라가 자연스레 펠릭스 옆에 서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엘리아는 두 사람 뒤를 조용히 따랐다.

    이사벨라가 방문하는 날은 늘 이런 식이었다. 둘 사이에 낀 이방인 같은 기분에 이사벨라가 돌아갈 때까지 방에 박혀 나오지 않았던 그때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함께 축제에 가줄 거지?”

    이사벨라가 펠릭스의 소매 끝을 살짝 붙잡으며 애원했다.

    “내가 왜?”

    심드렁한 그의 말에도 이사벨라는 더 환한 미소로 답했다.

    “같이 가줄 거잖아. 그렇지?”

    “안 돼. 그 날은 아내와 동행하기로 했거든.”

    순간 이사벨라의 눈에 잔뜩 짜증이 서렸지만, 사람들이 눈치채기도 전에 사라졌다.

    엘리아는 간사하게도 순간 그의 무뚝뚝한 말투가 너무도 듬직하고 노랫소리처럼 듣기 좋았다. 티타임 때 스쳐 지나가듯 했던 말을, 그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 아아. 그래? 그렇구나. 뭐, 다 함께 가면 되지. 저도 끼워줄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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