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07)
  • 계단을 오르는 제레미는 샤미르의 얼굴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어느샌가 다짐하듯이 제 감정을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절대 싫어!”

    제레미는 방문을 쾅 닫고 침대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작은 몸이 푹신한 침대보 위에 파묻혔다.

    * * *

    똑똑.

    엘리아는 조심스럽게 제레미의 방문을 두드렸다. 저녁까지 거르고 밀린 장부를 처리한 끝에 겨우 여유가 생겼다.

    “…….”

    안에선 아무런 답이 없었지만, 문 앞에 서성이는 아이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열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제레미, 묻지도 않고 친구를 데리고 와서 속상했니?”

    툭. 왔다 갔다 하던 아이는 결국 문에 등을 기대길 선택했다. 엘리아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함께 등을 기댔다.

    “연회 때 아이들과 잘 어울려서 이번에도 잘 지낼 수 있을 줄 알았어.”

    엘리아는 굳이 문이 열리길 기대하진 않았다. 아이가 어련히 제 마음이 정리되면 다가와 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아이가 샤미르를 정말로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랑 처음 만났을 때, 그때 눈빛과 비슷했지.’

    잔뜩 털을 세우곤 있지만, 호기심 어린 그 눈빛. 아이는 제 마음에 꼭 들더라도 습관처럼 밀어내기 바빴다.

    “푹 쉬고. 조찬 때 이야기 나눠보자꾸나.”

    달칵.

    문에서 등을 떼어낼 때쯤, 문이 열렸다.

    몸을 돌리자 말간 얼굴의 아이가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같이 잘래요.”

    그 말을 끝으로 아이는 후다닥 제 침대맡으로 달려가 앉았다. 새하얀 베개도 품에 꼭 안고 엘리아를 기다렸다.

    엘리아는 침대로 다가가 아이를 눕혀주었다. 아이를 향해 슬며시 웃어주자 아이의 양 볼이 발그레해졌다.

    사락사락, 이불보를 정리하는 소리와 장작이 타는 소리가 함께 화음처럼 섞였다.

    “제레미, 샤미르가 정말 싫니?”

    엘리아는 제레미의 마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이도 제 진짜 마음을 알아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상처받을까 봐 미리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밀어내는 제레미가 안타깝기도 하고 또 그 여린 마음이 이뻐서 사랑스럽기도 했다.

    “……모르겠어요.”

    방 안은 이미 어둠으로 물들어 촛불이 겨우 아이의 희끄무레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모르겠어?”

    “네……. 그 애가 웃으면, 마음이 이상해요.”

    아이의 말에 눈을 깜빡이던 엘리아가 살짝 웃음소리를 냈다.

    “이것도 그건가? 싫지만 좋은?”

    그런 건가, 엘리아의 말에 작게 중얼거리던 아이는 이내 깜박이던 두 눈을 감았다.

    “정말 귀엽다니까.”

    아이의 가슴팍을 부드럽게 두드리던 엘리아가 중얼거리며 미소 지었다.

    제레미의 벚꽃잎 같은 머리카락이 어둠에 물들어 한층 짙어졌다.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추측이 아닌 확신이었다. 엘리아는 잠든 아이의 이마 위로 살짝 입술을 붙였다 뗐다.

    따스하고, 보드라운 살결에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제레미가 오늘 밤도 좋은 꿈을 꾸길, 엘리아는 속으로 기도하며 베개 위에 머리를 뉘었다.

    * * *

    서재 책장 뒤에 숨은 제레미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엘리아와 샤미르를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신이 내린 권능이 이능이니까, 아버지는 그 외에도 신이 내린 무언가가 여기저기 숨겨져 있다고 말씀하세요.”

    “예를 들자면?”

    “음, 제가 알기론 성서에 쓰인 문자나 성물 같은 것들이 있어요.”

    “문자……?”

    ‘무슨 말이야?’

    두 사람의 말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한 제레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만 삐쭉 내밀었다.

    “네. 그보다, 주의해야 할 점이 있어요. 마나가 바닥난 상태로 이능을 쓰면 생명력이 사용돼요. 마나는 회복되지만, 생명력은 회복되지 않거든요.”

    “음, 생명력이 사용되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몸의 이상이 생겨요. 최근 아버지께 들어본 것 중 하나는 불임이었어요. 더 심하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샤미르의 말에 엘리아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잠시 정적이 일자 제레미가 참지 못하고 엘리아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엘리아 님! 엘리아 님!”

    제레미의 목소리에 엘리아가 금세 다정한 미소를 되찾았다.

    “제레미 왔구나.”

    사근사근, 8월쯤이 되어서야 아주 잠깐 북부에 내비치는 햇살처럼 따사로운 목소리였다.

    제레미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엘리아의 손을 잡았다.

    “이제야 말을 거시네요. 아까부터 책장 사이에서 숨어 계시더니.”

    샤미르가 씩, 웃으며 놀리듯 말을 내뱉었다. 아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니거든! 너 안 봤어!”

    “음? 저는 절 봤다고 말 안 했는데요?”

    “너, 너…… 미워! 싫어!”

    “저도 도련님이 썩 좋진 않네요.”

    제레미는 단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샤미르를 보며 연신 씩씩거렸다. 난처한 표정을 짓던 엘리아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싸우면 안 된다고 아침에 분명 말했는데, 둘 다 약속을 못 지켰네.”

    “…….”

    “…….”

    아이들은 엘리아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벌을 받아야겠지?”

    엘리아는 짐짓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적이 처음이었던 제레미가 울먹거렸지만, 샤미르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 엘리아가 내린 벌은 제레미와 샤미르가 손을 잡고 아도니스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손을 잡고 아도니스를 보고 오라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도니스는 제레미에게 동생처럼 소중한 존재였고, 그걸 샤미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이건 새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만 아는 비밀인데. 새엄마가 이상하다.

    “그만 우세요.”

    무정한 샤미르의 말투에 제레미는 콧물을 훌쩍이던 행동을 멈추었다. 눈꼬리에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히끅, 안 울었거든?”

    “자, 이제 손잡아야 해요.”

    현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샤미르가 손을 내밀었다. 2층 창문에서 엘리아가 두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뭇머뭇.

    제레미는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금 꼬리를 말며 내뺐다. 놀리듯 반복되는 행위에 샤미르가 짜증이 나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제레미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

    샤미르의 몸이 한순간 빳빳하게 굳어졌다.

    “……어! 왜, 왜 그래?”

    제레미를 응시하던 눈빛이 순간 빛을 잃으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난 제레미가 샤미르의 몸을 반복적으로 흔들었다. 그다지 힘을 준 건 아닌데, 너무나 쉽게 이리저리 흔들렸다.

    “…….”

    샤미르는 털썩, 주저앉으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히익, 왜, 왜 그러냐구!”

    제레미가 허리를 낮춰 샤미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연갈색 눈동자가 양옆으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가쁜 숨소리가 들리자, 제레미는 언젠가 엘리아가 쓰러졌던 날을 떠올렸다.

    ‘안 돼!’

    그때 창가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엘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들아, 무슨 일이 있니?”

    “어, 샤미르가……?”

    제레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샤미르의 축 늘어진 어깨를 움켜쥐었다가 놓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런, 거였어. 그래서…….”

    샤미르가 입을 열었지만, 소리가 아주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제레미가 창가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엘리아에게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제레미는 바짝 샤미르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갖다 댔다.

    “괘, 괜찮아?”

    초점이 없는 눈동자에 덜컥 겁이 났다. 울상을 짓던 제레미는 문득, 샤미르의 눈동자 위로 차오르는 물기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우, 운다…….’

    잔뜩 당황한 제레미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후두둑.

    샤미르의 뺨 위로 이슬이 맺혔다가 떨어졌다.

    “왜, 왜……? 소, 손 안 잡아서 그래? 자, 잡을게. 응? 우, 울지 마.”

    샤미르의 손을 잡았다가 놓기를 반복하던 제레미가 발을 동동 굴렀다.

    “…….”

    물끄러미 제레미를 바라보던 샤미르는 이내 작은 두 손을 들어 핑크빛으로 물든 말랑하고 통통한 볼살을 꼬집었다.

    “아앗! 무든, 딧디얏!”

    하도 쭉쭉 늘리는 통에 제레미는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가자.”

    이내 볼살을 놓은 샤미르가 내뱉은 말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샤미르가 덥석 제레미의 손을 움켜쥐었다. 제레미는 한 손으로 살짝 얼얼한 볼을 매만지며 쫓아갔다.

    “어어, 내 볼 막 당기고 사과도 안 하고…….”

    제레미는 샤미르의 안색을 살피며 괜스레 핀잔을 주었다. 하얗게 질린 채 울던 때와 달리 화색이 도는 소녀의 얼굴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아 님도 그렇고, 쟤도 그렇고 다 너무 약해.’

    제레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까 아파써?”

    “…….”

    “……왜 대답 안 해?”

    “…….”

    아무리 조잘조잘 떠들어도 샤미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앙증맞은 아도니스를 보고도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내 소중한 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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