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07)
  •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섰던 엘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이상하다니, 당혹스러운 마음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돌아선 펠릭스는 다시 한번 엘리아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다 걸음을 집 쪽으로 돌렸다.

    그 뒤를 엘리아는 새끼 오리처럼 졸졸 따랐다.

    펠릭스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유독 느렸다. 마치 엘리아와 발맞춰 걸어주는 것처럼.

    * * *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레이놀즈 부부의 근심 어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마님, 샤미르를 아르티젠 성에 데려가신다고요?”

    엘리아가 겉옷에 묻은 눈을 털고 있을 때쯤, 레이놀즈 부인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엘리아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샤미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새초롬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엘리아와 펠릭스가 오기 전, 샤미르가 성에 가고 싶어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었다.

    “아아. 너무 염려하진 마세요. 제 결정만으로 당장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없다는 거, 잘 압니다. 천천히 고려해 보시고…….”

    “다 함께 가도록 하지, 지원도 해줄 수 있으니까. 자네들 역시 성도에 머물면 안심할 수 있겠지.”

    펠릭스는 안심하라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 그것이, 저희는 갈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아들놈도 기다려야 하고. 보잘것없는 마을이지만, 퍽 정도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저희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노부부는 서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며 말을 멈추더니, 깊이 허리를 숙였다.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닙니다. 마을에 정착하면서 닥친 문제 대부분을 제 아비와 함께 해결하고, 자기 이능을 활용해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준 적도 많았습니다. 그게 틀린 적도 없었고. 그런 아이가, 스스로 성에 가야만 한답디다.”

    “이유가 있으니 보내 달라고 하더군요. 심히 걱정되긴 하지만, 한 번도 선택이 틀린 적 없던 아이이니 저흰 그저 믿고 보내줄 수밖에요.”

    노부부가 번갈아 아이에 관련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이가 학업에 열중할 수 있도록 힘써주신다는 것 역시 들었습니다. 하지만 노파심에 아이가 혹여라도 민폐를 끼칠까 걱정도 되고…….”

    “민폐라니요.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가 감사를 드려야 할 상황이에요.”

    횡설수설, 길어지는 노부부의 말에 엘리아가 나섰다.

    “탁월한 이능을 가진 샤미르에게 제가 부탁해서 성에 가는 거예요.”

    다정하게 미소 짓는 엘리아를 바라보며, 레이놀즈 부인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리 다정하신 분이 대공비셨다니…….”

    샤미르가 노부인에게 작은 손수건을 내밀며, 힐끗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이렇게 될 줄 예상한 사람처럼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는 끝난 것 같으니, 내일 아이를 데리고 출발하겠소.”

    펠릭스가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낯선 곳에서 묵는 방 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그와 한 침대에 눕는 건 드문 일이었지만, 그렇게 어색하지만은 않았다.

    밤새도록 노모와 샤미르의 재회를 다짐하는 작은 목소리가 문 너머로부터 자장가처럼 울렸다.

    “샤미르, 얘야. 네가 마님의 뭘 본 건지는 모르겠다만, 그저 그게 너의 행복을 위해 나아가야만 할 길이길 바란단다.”

    “……할머니 마음 잘 알아요. 머지않아 금방 돌아올 거예요.”

    곧이어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엘리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제레미는 뾰로통한 얼굴로 노란 꽃송이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따라가지도 못하고!”

    제레미가 눈싸움하듯 꽃을 한참 째려봤다. 제레미의 눈가가 시큰거릴 때쯤 작고 여린 아도니스가 바람에 휘청거렸다.

    “어어?”

    당황한 마음에 무릎을 굽힌 아이가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아도니스 주변에 쌓인 눈더미를 살살 치우기 시작했다.

    “에휴, 넌 잘못 없써…….”

    엘리아가 제레미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날이 지났다.

    나도 가고 싶었는데. 제레미는 잔뜩 심술이 난 상태였다.

    “에잇!”

    제레미는 추위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손으로 아도니스 옆 눈밭을 마구 헤집었다.

    “오면 말 안 해!”

    다짐하듯 아도니스에게 말했다. 아도니스 역시 찬 바람에 연신 휘청거리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언제 오지.”

    호기롭게 다짐하다가도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던 아이는 아도니스의 꽃잎을 아주 조심스럽게 툭, 건드려 보기도 했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가늘게 늘어진 입김이 허공을 타고 피어올랐다.

    “도련님! 또 여기 계시지요?”

    제레미의 유모 루시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풀숲 틈에 몸을 들이밀었다.

    제레미와 다르게 몸집이 큰 루시는 다소 힘겹게 풀숲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여긴 제레미 공간이라고 했잖아, 루시!”

    아이의 볼멘소리에도 루시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기엔 마님께서 오신 이후로 이미 성안 사람 모두 이곳을 알고 있는걸요.”

    “……치이.”

    휙, 고개를 돌리며 아이가 볼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숨어 다니는 제레미를 가장 빠르게 발견하는 사람은 늘 엘리아였다.

    “그나저나, 누가 오셨는지 아세……?”

    “엘리아 님!”

    누군가 왔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제레미가 벌떡 일어나 풀숲을 뛰쳐나갔다.

    *** “아이고, 뛰시면 안 된다니까 그러네!”

    뒤에서 루시의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제레미는 있는 힘껏 내달리기 바빴다.

    검술, 그리고 예법과 격식에 대한 수업을 모두 마치며 기다리고 기다렸던 시간이었다.

    눈을 치우느라 바쁜 정원사와 급히 정문 쪽으로 향하고 있는 하녀들까지 모두 지나친 후에야 아이는 걸음을 멈춰 세웠다.

    “……!”

    숨을 잠시 고르던 아이의 청록색 동공이 어렴풋이 확대되었다.

    마차가 정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 주변으로 집사와 하녀들이 고개를 숙이며 서 있었다.

    “엘리아 님.”

    아이는 새삼스레 중얼거리며,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차 안에서 펠릭스와 엘리아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뒤로, 제레미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아이가 그녀의 손길을 따라 아르티젠 성 안에 발을 디뎠다.

    “제레미!”

    멈춰 있던 아이의 눈동자가 그토록 기다리던 이에게 향했다.

    “치, 안 보고 싶었다 뭐!”

    제레미는 엘리아를 향해 환하게 웃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초롬 고개를 돌렸다.

    “제레미, 어서 이리 오렴.”

    제레미는 저도 모르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다가 또 가까이 가서는 미적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흥, 안 갈 건데…….”

    펠릭스는 그런 제레미의 머리에 큰 손을 한번 얹은 뒤 바쁜 듯 성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미소 짓는 엘리아의 뒤쪽으로 여자아이가 제레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응?”

    제레미가 그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인사해. 3살 많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함께 지낼 친구란다.”

    제레미는 힐끗,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주 봐 오던 영애들과 다르게 단발인 소녀는 싱긋, 웃으며 제레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샤미르 레이놀즈라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 제레미의 시선은 꼭 맞잡고 있는 엘리아와 소녀의 손에 꽂혀 있었다. 제레미의 얼굴이 삽시간에 불타는 화로처럼 붉어지기 시작했다.

    “음? 왜 그래, 친구가 너무 예뻐서 그래?”

    “아, 아니에요. 제레미는, 제레미는…….”

    한참 말을 더듬던 제레미가 입술을 삐죽이며 엘리아의 드레스 소매를 잡아당겼다.

    “쟤 싫어요…….”

    “제레미? 처음 보는 숙녀 앞에서 그런 말은 실례가 아닐까.”

    제레미와 샤미르의 얼굴을 번갈아 살펴보던 엘리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저쪽 마을에서도 아이들과 별로 친하진 않았어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던 샤미르는 연갈색 눈동자를 또르륵 굴려 제레미를 훑기 시작했다.

    제레미는 그 시선에 뺨을 붉히며 서둘러 엘리아의 치맛자락 뒤로 몸을 숨겼다.

    엘리아는 난처하게 웃으며 앤드류에게 샤미르의 방을 하나 내어달라 청했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 손님방을 이용하시고, 추후 어린 숙녀분께 맞는 방을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해요.”

    짧은 대화를 마치고, 모두 성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레미는 걸어가는 내내 뒤에 있는 샤미르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엘리아 님, 미워!’

    제레미의 눈에 엘리아와 샤미르가 여전히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이 보였다.

    다 같이 손을 잡고 들어가자는 엘리아의 제안을 거절했던 제레미는 한껏 토라져 볼을 부풀렸다.

    “……엘리아 님, 쟤는 왜 머리카락이 짧아요?”

    앞장서서 걷던 제레미가 휙, 뒤돌아 엘리아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이듯 물었다.

    “제레미, 쟤가 아니라 샤미르란다.”

    엘리아의 단호한 표정을 보자, 아이가 주눅이 든 것처럼 눈꼬리를 내렸다.

    “……저는 짧은 게 편해요. 귀족 가문 영애도 아니고 굳이 격식을 차릴 필요도 없고요.”

    “…….”

    “답이 되었나요?”

    제레미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소녀가 하는 말을 전부 다 귀에 새겨들었다.

    “……너, 너한테 안 물어봐써!”

    퍼뜩 정신을 차린 제레미가 얼굴을 붉히며 다시 한번 쏘아댔다. 샤미르는 비웃듯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렇구나, 제게 안 물어보셨군요.”

    샤미르는 약간은 놀리는 듯 아이의 말을 받아쳤다.

    “갈래.”

    그에 잔뜩 심술이 난 제레미의 눈동자 아래로 살짝 물기가 서렸다.

    ‘나는, 정말 정말 싫어.’

    휙, 돌아선 제레미가 홀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 제 방으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엘리아가 뒤에서 제레미를 불렀지만 아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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