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107)

레이놀즈가 헐레벌떡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그러는 동안 펠릭스는 쓰러진 샤미르를 가볍게 들어 방에 있는 침대 위에 눕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엘리아는 침대맡에 서서 근심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일단 의원도 오고 있으니, 아이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보도록 하지.”

노부인의 깊은 한숨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사색이 된 아이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 * *

의원이 다녀가고, 샤미르가 눈을 뜬 건 반나절이 지나고 난 후였다. 아이는 잔뜩 가라앉은 눈빛으로 식탁 앞에 앉았다.

“……아주, 아주 짧게 보려고 했어요. 최근 것만. 그런데 갑자기 바로그가 보여서, 깜짝 놀랐을 뿐이에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아이의 말에 엘리아는 안심하며 오르내리는 가슴팍 위에 손을 얹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샤미르가 무사히 깨어났다는 것에 안도하는 한편, 그녀가 시간을 되돌아온 일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 마음이 놓였다.

“그랬구나. 사실은 오기 전에 마물을 마주쳤거든. 많이 놀랐겠구나.”

엘리아의 다정한 위로에 샤미르는 잠시 두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바로그들이 강물에 휩쓸려 온 것도 다 두 분이 하신 일이었네요.”

샤미르의 말에 당황한 엘리아가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맞아. 혹시, 그 일이 마을에 피해를 끼쳤을까?”

“아니요. 다들 좋아하셨어요. 설산에 득실대던 바로그들이 없어졌으니, 저녁에 나무도 벨 수 있겠다면서요. 그리고 바로그 가죽으로 올해는 춥지 않게 보낼 수 있을 테니까요.”

엘리아가 안심하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라도 이곳에 피해가 됐을까, 조바심이 들던 찰나였다.

“무사히 깨어난 것도 봤고, 우린 이만 가는 게 좋겠군.”

묵묵히 앉아 있던 펠릭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창 너머에는 해가 곧 떨어질 듯 기울어 있었다.

“흠…….”

설산에 오르는 시간이 꽤 걸렸기 때문에, 서둘러 내려가지 않으면 또다시 밖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엘리아는 난처한 듯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아직 이능에 대해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해 아쉬움도 컸다.

“주무시고 가세요. 아버지께서 머무시던 방이 마침 남아 있거든요. 저는 할머니, 할아버지랑 자면 돼요.”

아이의 말에 펠릭스와 엘리아가 서로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원하신다면 이능에 대해서,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샤미르의 곧은 눈빛이 엘리아를 향했다. 엘리아는 생각지 못한 제안에 펠릭스의 눈치를 보았다.

“당신 좋을 대로 해.”

담백한 대답에 엘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거실 안쪽, 부엌으로 레이놀즈 부인이 저녁으로 내올 수프를 끓이겠다며 서둘러 들어갔다.

엘리아와 샤미르가 식탁에 앉아 말을 나눌 때쯤, 펠릭스는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레이놀즈와 함께 잠시 바깥으로 나갔다.

“대공님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엘리아와 둘만 남자 샤미르가 대뜸 입을 열었다. 당황한 엘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응? 부부인데, 당연하지.”

“높으신 분들께선 사랑 없는 결혼을 많이 한다고 아버지께 들었어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도 가문에서 도망쳐 아버지한테 온 거래요.”

아이는 또박또박 제 의견을 전달했다. 8살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의사소통 능력이었다.

“……대공 부인께서도 그래서 북부로 다시 돌아오신 거잖아요. 대공님과 그 아일 사랑했기 때문에.”

“……!”

“다시 결혼하지 않을 방법이 있었는데도 말이에요.”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머뭇거리는 태도와는 달랐다.

부엌에선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분주히 준비하는 레이놀즈 부인의 움직임 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어색하게 웃던 얼굴을 굳히며 눈앞에 마주 앉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긴 속눈썹 사이로 옅은 갈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티끌 없이 맑고 순수한 눈망울이었지만,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달리 눈빛이 더 깊어져 있었다.

그 조금은 낯선 모습에 엘리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도 아르티젠 성으로 가고 싶어요.”

얼어붙은 엘리아를 일깨운 건 샤미르의 목소리였다.

“시간을 되돌려 준 게, 정말 신일까요? 궁금해요. 왠지 그곳에 가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식탁 위에 턱을 괸 아이가 슬쩍 미소 지었다. 엘리아의 눈이 놀라움으로 서서히 커졌다.

“제레미라는, 그 아이도 궁금하네요.”

“……설마, 내 기억을 전부 본 거니?”

“깊게는 못 봤어요. 세세한 걸 다 볼 순 없거든요.”

“나는, 나는 좀 당황스럽구나. 이런 식으로 내 기억을 봤다는 게…….”

엘리아는 황망한 마음에 차마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보고 싶다고 해서 다 보는 게 아니에요. 타인의 정보를 읽는 이능이란 게 그래요. 제게 꼭 필요한 걸 보여주는 거라서. 그래서 이상한 거예요. 왜 그것까지 나한테 보여줬을까.”

골똘히 생각하듯 눈동자를 굴리던 아이가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특히 그 아이에 대한 정보. 그게 제일 뚜렷했어요.”

“……나는 모르겠구나. 너를 데리고 간다는 게…….”

“이능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으세요?”

연갈색 눈동자가 엘리아를 꿰뚫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깊은 시선에 얽매인 것처럼 쉽사리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를 내가 믿을 수 있을까?”

“고작 8살인걸요. 다른 꿍꿍이가 있기엔 어린 나이죠.”

“샤미르. 처음 봤을 때와 네가 다르게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일까?”

“글쎄요. 부인께서 그렇다면, 그런 게 아닐까요?”

“…….”

잠시 넋을 놓고 있을 때쯤, 펠릭스와 레이놀즈가 안으로 들어왔다. 때마침, 레이놀즈 부인도 커다란 냄비를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어서 식사부터 하셔요.”

냄비를 식탁 옆에 내려놓은 부인이 샤미르와 엘리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가만있던 샤미르가 벌떡 일어서서 엘리아의 소매를 당겨 귓가에 속삭였다.

*** “이건 아셔야 해요. 충분히 숨길 수도 있었다는 거.”

뒷짐을 지고 싱긋, 웃는 샤미르의 모습은 여느 해맑은 아이와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제가 퍼드릴게요.”

샤미르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접시에 수프를 옮겨 담았다.

‘저 아이는 대체…….’

엘리아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도무지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펠릭스는 그런 그녀를 잠시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그의 말에 엘리아가 짐짓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게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식사는 묽은 수프와 그을린 생선 한 마리가 전부였다. 노부부는 펠릭스와 엘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식사하기 시작했다.

“이곳에도 곧 사람을 보내겠소.”

“아, 아닙니다! 저흰 공물조차 내지 않는데, 어찌…….”

“대접받았으니, 보답해야지.”

그의 무뚝뚝한 대답에 노부부가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엘리아는 수프를 떠먹으면서도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웃을 때는 보통의 아이 같은데, 표정이 없을 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능을 가진 8살 아이.’

샤미르의 말처럼 아직 어린 나이라는 점이 그나마 엘리아에게 안도감을 주는 게 사실이었다.

고요한 식사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덧 설산 너머 마을에도 밤이 찾아왔다.

눈송이가 가랑비처럼 가느다랗게 떨어졌다. 식사를 다 마친 후에도, 마음은 여전히 어수선하기만 했다.

“잠시, 산책 좀 다녀올게요.”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서자 레이놀즈 부인은 손뜨개질하며 어두우니 조심하시라고 걱정을 내비쳤다.

샤미르는 부인 옆에 앉아 말간 눈을 깜박일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판자로 지어진 문을 열자마자, 쌩하니 바람이 불었다.

어깨 위에 두른 로브를 더 단단히 여미며, 눈밭을 걸어갔다.

끼익.

뒤에서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뒤로 돌자, 그곳에 펠릭스가 서 있었다.

“함께하지.”

무심히 툭 내뱉은 그의 말에 엘리아의 입가에는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곧 복잡한 마음 때문인지 그와 같이 있으면서도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란히 서서 길을 걸었다. 사박사박, 눈 밟는 소리가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종소리처럼 맑기만 했다.

“왜 또 그런 표정이지?”

“……제 표정이 어떤데요?”

“음. 세상 걱정은 혼자 다 떠안고 있는 표정?”

사뿐히 걷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엘리아는 뒷짐을 진 채 앞으로 걸어가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랬나?’

슬쩍 뺨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이렇듯 걱정해 주는 모습을 보니 그와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한참을 걸어가던 펠릭스가 이내 뒤돌아섰다. 그는 왜 오지 않냐는 듯한 표정으로 엘리아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엘리아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무엇인지 말해보라는 듯, 그는 엘리아를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샤미르, 그 아이를 아르티젠 성으로 데려가고 싶어요.”

“…….”

“아이도 그러고 싶다고 했어요. 당신이 싫다고 한다면 안 되겠지만,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엘리아는 결국, 아이를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어쩌면 내내 마음속에 맺혀 있던 의문과 모든 실마리를 그 아이가 조금은 풀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부딪혀 보는 거야.’

그러기 위해선, 펠릭스의 결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엘리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 때문에 여태 그런 얼굴이었던 건가?”

“네? 아, 네.”

뜻밖의 질문에 살짝 당황하긴 했으나, 엘리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펠릭스는 그런 얼굴을 보더니 픽, 실소를 터뜨렸다.

“아르티젠 성에는 방이 많아. 아이 하나 몸 둘 곳이 없진 않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다시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뒤편에서 엘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감사드려요.”

예전에는 쉽게 전하지 못한 진심이었다.

사실, 그에게 전하지 못했던 수많은 감정들이 마지막 순간엔 아쉽기만 했다.

솔직한 엘리아, 대담한 엘리아, 아르티젠 북부를 사랑하는 대공비 엘리아. 이제 그런 엘리아가 되고 싶었다.

노을이 자취를 감추듯 사라졌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서늘한 밤, 펠릭스의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도 풍경에 묻혀 흐릿했다.

“당신은 참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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