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07)

“괜찮, 겠죠?”

불안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투둑, 툭.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연신 동굴 내부에 울려 퍼졌다.

언뜻언뜻 푸른빛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그조차 선명하지 않았다.

“……글쎄. 추위만 피한다면?”

살짝 고민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엘리아는 무릎을 세워 앉아 그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얼굴이 꽝꽝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스윽.

펠릭스가 옆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당신은, 춥지 않아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고개조차 들지 않고 물었다.

“춥지.”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툭 말을 뱉었다.

얼굴을 들어 올린 엘리아가 주섬주섬, 두꺼운 장갑을 벗으며 옆에 앉은 사내의 뺨을 찾으려 손을 뻗었다.

천 자락이 느껴져 엘리아는 손을 조금 더 높이 올렸다.

“……거기가 아니야.”

그가 손깍지를 끼듯 엘리아의 손등을 움켜쥐어 뺨에 가져다댔다.

손이 얼어서 그런지 감촉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불룩 튀어나온 흉터만이 손끝에 미세하게 와 닿았다.

“얼음장 같아요…….”

민망한 분위기에 당연한 소리를 내뱉었다. 엘리아의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펠릭스가 제멋대로 엘리아의 손을 자신의 뺨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다.

“손이 차군.”

입술의 움직임이 전부 다 느껴졌다.

후후, 펠릭스가 뜨거운 입김으로 엘리아의 손을 녹여주었다.

“앗.”

엘리아는 손바닥이 불타서 재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어어?”

그 순간 펠릭스가 엘리아를 들어 마주 보듯 무릎 위에 앉혔다. 몹시 당혹스러운 마음에 몸을 바르작거거렸다.

“얼어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닿은 품이 따뜻하고 안락했다.

그는 허리춤에 있던 검집을 내려놓고, 로브를 벗어 떨고 있는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괜찮아요. 당신도 춥잖아요.”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부드러운 금색의 머리카락이 펠릭스의 볼을 간지럽혔다.

“……추워. 그러니 움직이지 마. 그나저나, 당신이 머리 묶는 걸 한 번도 못 봤군.”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며, 가늘고 긴 머리카락을 빗질하듯 매만졌다.

“아. 부, 북부는 추우니까요.”

생각지도 못한 그의 다정함에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묶어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엘리아는 담담히 귓가에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작게 웃음 지었다.

“감사해요.”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스르륵, 그는 연신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굴리며 놀았다.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다정한 손길에 엘리아는 결국 몰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눈꺼풀을 감았다.

*** 여독에 잠든 엘리아가 깨어난 건,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동굴을 비출 즈음이었다.

“으음, 펠……?”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무언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펠릭스였다.

어렴풋한 빛이 새어 드는 동굴 내부엔 곳곳마다 고드름이 길게 자라 기둥을 이루고 있었다.

동굴 안은 마치 얼음 성처럼 하얗고 푸른 조각들로 가득했다.

“여기 있어.”

엘리아를 가뿐히 안아 내려준 펠릭스가 곁에 놓여 있던 검을 챙겼다.

동굴 안쪽에서 짐승의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착각이 아니라면, 필시 여러 마리였다.

“자, 잠시만요!”

엘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검을 집은 팔뚝을 붙잡았다.

“……둘러만 보고 올 거야.”

“함께 가요.”

어두운 이곳에서 그녀는 잠시라도 그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 펠릭스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아갈수록 커다란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크르릉.

엘리아는 동굴에 울리는 낮고 음산한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며 한 발자국씩 앞으로 걸어갔다.

펠릭스의 넓은 보폭에 엘리아는 어느덧 그의 뒤에 자리하게 되었다.

“엘리아.”

그가 뒤를 돌아보며 엘리아를 불렀다. 바짝 긴장한 터라 작은 소리에도 몸을 움찔, 떨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더 움직이지 마.”

다정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를 바라본 순간이었다.

익숙한 품이 얼굴에 닿았다. 그의 등 너머로 흉흉한 기운이 오싹할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앞에, 마물이 있어.”

“……네, 네.”

두려움에 침을 삼키며 간신히 대답했다.

“피가 튀니까.”

펠릭스는 넌지시 경고하듯 어깨 위로 두른 로브를 엘리아의 머리끝까지 올려주었다.

“펠……?”

“보지 않으면 좋겠군.”

아이를 어르듯, 그가 로브 위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젯밤 동이 틀 때까지 가지고 놀았던 그 머리카락이었다.

펠릭스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엘리아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스무 발자국 정도로 떨어진 곳에서 펠릭스가 서슬 퍼런 검을 한 손으로 든 채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온몸이 털로 뒤덮인 채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드러낸 베어울프가 있었다.

덩치 큰 베어울프 두 마리가 동굴에 서 있으니, 내부가 꽉 차 보일 정도로 비대했다.

쿵쿵쿵.

한 마리의 베어울프가 그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엘리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사람 몸통만큼 큰 앞발이 바로 그의 코앞에서 휘둘러졌다. 저 육중한 앞발에 맞으면 분명 온몸이 찢길 터였다.

휘이익.

그런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펠릭스는 베어울프의 앞발이 닿기도 전에 그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서걱, 베어울프의 두꺼운 목이 날아갔다.

쏴아아.

사방에 핏물이 튀겼다.

엘리아는 멍하니 로브를 꾹 움켜쥔 채, 사뿐히 땅 위에 착지한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펠릭스의 앞에 있던 베어울프가 죽자마자, 나머지 한 마리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어어, 위험, 위험해요! 펠!”

놀라 나선 몸짓에 쓰고 있던 로브가 바닥 위로 흘러내렸다.

쿵!

날렵하게 몸을 숙인 펠릭스 탓에 베어울프의 몸이 벽에 처박혔다.

그는 한 치의 자비도 없었다. 또 다른 베어울프의 목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날카로운 검날에 흩뿌려진 마물의 뜨거운 피가, 꽝꽝 얼어붙은 동굴 여기저기 튀었다. 물론 가깝게 다가선 엘리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로…….’

숨 한 번 헐떡이지 않고 걸어오는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전투력이었다.

오늘따라 그의 뺨 위로 새겨진 날카로운 흉터가 더욱 짙어 보였다.

“기어이, 피가 튀었네.”

턱 끝에 묻은 피를 맨손으로 닦아낸 그가 안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는 엘리아의 이마와 뺨, 그리고 입술 언저리까지 잘게 튄 핏방울을 살며시 닦아주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그의 전투를 직접 본 것은 처음이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서워서?”

“……무섭죠. 정말, 다치면 어쩔 뻔했어요!”

엘리아가 감정이 북받쳐 소리치자, 펠릭스가 그녀를 달래듯 머리카락에 묻은 피를 마저 닦아냈다.

“괜한 걱정인 걸 알잖아.”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어떻게 걱정이 안 돼요. 마물인데. 마주치면 괜한 수고 말고 죽으라는 사람도 있다고요.”

아까부터 쿵쾅거리는 심장을 대변하듯,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펠릭스의 눈동자에 어렴풋이 이채가 돌았다.

“내 목숨 하나 못 지키는데, 당신을 여기까지 데려왔을 것 같나?”

“…….”

펠릭스의 깊어진 눈빛에 엘리아는 아무 말 못 하고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내 사람 하나 못 지킬 정도로, 나는 나약하지 않아.”

‘내 사람.’

설산으로 여행하는 그 순간부터 펠릭스는 매 순간순간 그녀가 알지 못하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가 내뱉은 이 말이 그녀를 더욱 행복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제 것이라며 덤덤히 이야기하는 이 남자.

그녀의 안전을 확인한 펠릭스가 쓰러진 마물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마물이 나왔던 동물 안쪽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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