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07)
  • 엘리아는 그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그의 손은 커다란 크기만큼이나 뜨거운 기운을 품고 있었다.

    따스함을 느끼며, 얕게 눈이 쌓인 길 위로 발을 내디뎠다.

    “아…….”

    마차에서 내리고 처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앙상한 나뭇가지 위로 피어오른 얼음꽃이었다.

    길 양옆에 길게 늘어선 나무들, 그 위를 수놓은 얼음꽃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만 같았다.

    넋을 놓은 채 주변을 살피던 찰나였다. 마차 뒤를 따르던 기사들이 펠릭스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말에 올라탔다.

    “응? 어어, 펠, 다들 어딜 가는 거예요?”

    “근처 마을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어.”

    “함께 움직이는 게 아니었나요?”

    “뭐,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아, 시간이 없군. 어서 움직이지.”

    황급히 말을 마치고 자리를 뜨는 그를 따라 엘리아도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난생처음 봐요.”

    걸음마다 아름다운 풍경에 정신을 빼앗겨 자꾸 걸음을 멈추곤 하였다.

    “그래봤자 마물 때문에 자주 못 오는 곳인데, 뭐.”

    감탄 섞인 말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둘은 평평한 지대를 지나, 점점 가파른 곳을 향해 나아갔다. 숨을 푹푹 몰아쉴 때마다 입김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추위에 코를 훌쩍거리던 엘리아는 왔던 길을 몇 번이고 되돌아봤다.

    “……아쉬워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제레미는 못 봤겠죠?”

    “와봤어.”

    “네?”

    “그 애도 여기 왔었어. 와서 여기부터 저기까지 가더니, 돌아가자 그러던데.”

    생생하게 전달되는 행동 묘사에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엘리아를 한층 짙어진 눈빛으로 쳐다보던 그가 다시금 걸음을 재촉했다.

    “아닌 척하더니, 다 데려가긴 했네요. 내내 토라져 있어서 마음이 안 좋았는데…….”

    바짝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내 훌쩍이던 아이의 자그마한 뒤통수가 눈에 밟히는 듯했다.

    “아!”

    엘리아는 갑자기 걸음을 멈춘 그를 바로 보지 못하고 등 언저리에 코를 박았다.

    “왜 항상 내 뒤를 따라 걷다가 부딪히는 것 같지?”

    뒤돌아서며 웃는 그의 모습에 엘리아는 코를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잠시 딴생각 하느라 미처 못 멈췄을 뿐이에요.”

    그는 토라진 듯 중얼거리는 엘리아를 내려보다가 작은 손을 잡아 쥐었다.

    제레미 손만큼이나 앙증맞은, 작고 새하얀 손이었다.

    “길을 잃으면 안 되니, 손을 잡고 가는 게 좋겠군.”

    *** “……혼자 갈 수 있어요.”

    애 취급하는 듯한 짓궂은 목소리에 손을 빼려고 하자 큰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내가 잃어버릴까 봐 그래.”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에 온몸이 녹아내릴 듯 따뜻해졌다. 고작 손을 맞잡았을 뿐인데, 그에게 온몸을 내맡긴 기분이었다.

    펠릭스는 요즘 처음과 달리 확실히 부드러운 어조와 몸짓으로 엘리아를 대하기 시작했다.

    그게 어색하면서도 한편으론 좋았다.

    엘리아는 꽁꽁 얼어붙은 비탈길에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다. 그럴 때마다 펠릭스는 가뿐히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 * *

    “하아, 하아.”

    밭은 숨소리가 귓속에서 메아리칠 때쯤, 펠릭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힘든가.”

    “괘, 괜찮아요. 다행히 눈도 많이 내리지 않아서, 걷기 수월한걸요.”

    엘리아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고작 한 봉우리 넘은 것 같은데 벌써 산길이 험해져 걷기 쉽지 않았다.

    “……업어줘?”

    “훗, 됐어요.”

    엘리아는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며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

    엘리아는 그가 뒤따라오지 않자 의아한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그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제자리에 서서 심각한 얼굴로 묻는 그를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걷는 게 기분이 좋아요.”

    “좋다고? 그렇게 휘청거리면서?”

    “건강하다는 증거잖아요. 걷는 거, 달리는 거.”

    ‘몸이 점점 회복되고 있다는 게 느껴져.’

    생각보다 더 힘들었지만, 이렇게 산을 오를 수 있는 몸이 되었다는 게 마냥 기뻤다.

    “……그럴 수도 있겠군. 몇 달 전엔 정말 툭 하면 부러질 것 같았으니까.”

    그는 볼이 한껏 달아오른 엘리아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다시금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새하얗게 덮인 설산은 끔찍한 마물이 나오는 곳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검은 구름과 맞닿을 정도의 넓고 새하얀 산등성이가 그들 너머로 펼쳐져 있었다.

    “하…….”

    점심을 먹고 제레미를 달래 겨우 출발한 터라, 벌써 하늘이 어둑해져 있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어오고 있었다.

    두꺼운 장갑을 꼈음에도 손이 시렸다. 엘리아가 깊은 한숨과 함께 몸을 덜덜 떨었다.

    “조금만 더 가면, 오두막이 있는데…….”

    난처한 듯 중얼거리는 펠릭스를 바라보며 엘리아는 추위에 얼어붙은 발을 애써 한 발 한 발 옮겼다. 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데, 몸이 마음처럼 잘 따라주지 않았다.

    펠릭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새하얀 눈더미가 깔린, 어딘지도 모를 설산 중턱에서 그들은 서로를 잠시 마주 보았다.

    “……마물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고, 밤에는 돌아다닐 수가 없겠어.”

    마물들은 야행성이었다.

    엘리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오두막이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가지.”

    그는 이내 작은 몸을 거침없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

    엘리아도 몹시 지친 상태라 잠시 얼굴만 붉힐 뿐, 얌전하게 그의 품에 안겼다.

    밤이 되자, 잠시 눈이 그쳤다. 그는 무심한 발걸음으로 눈밭을 헤치며 걸어 나갔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엘리아는 그의 목 부근 쪽으로 살짝 얼굴을 묻었다.

    “어두워졌어요.”

    작은 목소리가 펠릭스의 귓가에 울렸다. 맞닿아 있어서 그런지 미약한 숨소리조차 이상하리만치 가깝게 느껴졌다.

    “……저기 좀 봐.”

    묵묵히 걷던 그는 잠시 엘리아를 내려주었다.

    “오로라……!”

    그에게 안겨서 눈으로 덮인 땅만 내려다본 채 이동했던 엘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자마자 쉬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잿빛 하늘 위를 수놓은 푸른 장막과 초록 장막 둘이 서로 그림을 그리듯 얽혀 있었다. 수많은 빛 조각들이 파도처럼 펼쳐져 끊임없이 넘실거렸다.

    그는 감탄하고 선 엘리아의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추위에 움츠린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추워서.”

    같은 말이지만 아까보다 더 부드러워진 그의 말에 잠시 소리 내 웃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존재했네요. 여기 북부에.”

    엘리아는 빛으로 커튼을 쳐놓은 듯한 하늘을 내내 두 눈으로 담아두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과 눈앞에 펼쳐진 경관이 마치 환상처럼 완벽했다.

    찬란하도록 행복했던 이 몇 달간의 기억이 혹시나 꿈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죽어서 꾸는 꿈이 아닐까.’

    보석을 세공한 것처럼 반짝이는, 푸른 눈망울에 물기가 스며 있었다.

    “하하. 그냥, 당신이 이곳을 왜 이렇게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아서요. 여긴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네요.”

    민망함에 둘러댄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16년 동안 단 한 번도 눈에 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이걸 지금에서야 본 자신이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두 번 봤다간 엉엉 울겠군.”

    쯧쯧. 혀를 차며 말한 그였지만, 그래도 가만히 엘리아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펠. 저는 다시 태어나고, 거듭해서 태어난다고 해도 또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 같아요.”

    “같이 오길 잘한 것 같네.”

    둘은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 보다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살짝 얼굴을 붉힌 그는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다정했다.

    펠릭스가 두꺼운 옷깃에 쌓인 눈덩이를 쓸어내리더니 다시 엘리아를 안아 올렸다.

    “이젠 정말 가야 해.”

    “……아쉬워요.”

    “다음에 또 오면 되지.”

    “그땐 제레미도 함께 올 수 있을까요?”

    “그럼.”

    그저 일상적인 대화일 뿐인데도, 심장이 쿵쿵 요동쳤다.

    펠릭스와 엘리아는 밤하늘을 수놓은 오로라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 * *

    오래지 않아 그들이 당도한 곳은 컴컴한 동굴이었다.

    동굴 안은 커다란 입구만큼이나 넓었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은 매서운 눈보라가 되어 동굴 안으로 들이닥쳤다.

    두 사람은 좀 더 안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이제 내려주세요.”

    아직까지 안겨 있던 그녀는 버둥거리며 말했지만, 손발이 굳어서 그런지 움직임은 미미했다.

    펠릭스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안에는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잘 보이지도 않는 곳인데, 그는 자연스럽게 앉을 수 있을 만한 곳에 엘리아를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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