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07)

포크질에 성공한 제레미가 포크를 움직여 생선 살을 입안에 넣었다. 음식을 씹는 입술은 오물오물 귀엽게 움직이고 있었다.

“얌얌!”

그 모습이 귀여워 엘리아의 입가에 행복한 웃음이 걸렸다.

“자, 이것도 먹어보렴.”

그녀는 가끔씩 엇나가는 제레미의 나이프를 잡아 도움을 주기도, 제레미가 슬쩍 밀어놓은 음식을 접시에 다시 올려주기도 하였다.

제레미는 이제 그런 엘리아의 행동이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펠릭스는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도 느긋이 앉아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일, 설산을 오를 생각이야.”

두 사람의 접시가 거의 비워질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설산이요?”

‘설산…….’

그의 말을 속으로 곱씹던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제로석.

북부의 부흥과 몰락을 한꺼번에 던져주었던 제로석.

‘아니야, 아닐 거야. 이렇게 빨리 발견될 리 없어.’

어느샌가 진땀이 난 손바닥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몇 번의 심호흡을 했다.

“그곳에 무슨 일로?”

“당신이 앤드류에게 이능에 대해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고 하던데.”

“아, 맞아요. 하지만 그는 힘들다고 하던데…….”

엘리아의 퍼덕이던 심장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래, 하지만 앤드류가 설산 너머에 사는, 제국 아카데미에서 교수 겸 연구를 했던 친구를 알고 있다고 하더군. 그자라면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아카데미 교수요?”

“그래, 하지만 그냥 오라고 하면 아마 힘들 거라고 하더군.”

“……?”

엘리아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당신이 가서 이능을 보여주면 흥미를 느낄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아!”

“억지로 데려올 순 없으니, 함께 가겠나?”

*** “가고 싶어요, 함께.”

엘리아는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 그래도 이능 운용이 막혀 답답함이 가득했던지라 그의 이야기가 반가웠다.

옆에 앉은 제레미는 영문을 모르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제레미도 갈래요!”

아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일이 있어 가는 것이다. 다음에 같이 가도록하자. 제레미.”

식당 안에 펠릭스의 묵직한 음성이 펴졌다.

“흥, 엘리아 님! 저도 갈래요.”

펠릭스의 단호한 표정에 제레미는 엘리아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어, 아하하…….”

엘리아는 난처한 상황에 펠릭스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안 된다. 부인을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라.”

“치. 흥!”

아이가 앙증맞게도 팔짱을 끼며 두 볼을 부풀렸다.

화가 난 제레미를 무엇으로 달랠까 잠시 고민하던 엘리아는 아이를 바라보며 짓궂은 미소를 흘렸다.

“제레미, 아도니스가…….”

“아아! 또!”

말을 꺼내자마자, 아이가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엘리아는 그 모습에 삐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아이를 달래었다.

한결 더 친근해진 두 사람을 지켜보는 펠릭스의 입가에도 슬쩍 미소가 띠어졌다.

* * *

펠릭스는 마차 앞에서 엘리아가 나오길 기다렸다. 자기를 빼놓고 설산에 간다고 삐친 제레미를 달래느라 아무래도 준비가 늦어지는 모양이었다.

마차 뒤에서는 루카스와 여러 명의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이고, 벌써 해가 중천에 떴구먼. 왜 나오시질 않는답니까?”

루카스의 뒤에서 까불거리던 데니스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데니스, 도련님 고집 꺾기가 좀 쉬운 줄 아냐?”

게일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 한심한 얼굴로 데니스를 바라보았다.

“뭐, 그렇긴 하지만 말입니다아.”

“그나저나 설산이라니, 결혼하고 1년 만이군. 흠흠, 거기서 아내와 미래를 약속했지.”

“으엑, 게일 님! 설마 또 그 이야기입니까?”

“오르는 내내 손도 잡고, 안고 올라가기도 하고, 마지막엔 운이 좋게도 오로라 아래서 찐한…….”

평소에도 부인 사랑이 지극한 게일이 연애담을 꺼내려 하자 데니스가 또 듣기는 싫다는 듯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으아악! 그만! 그만하십시오. 기사단 내 괴롭힘으로 신고해도 됩니까?”

“쯧쯧쯧, 건방진 놈. 듣는 시늉이라도 좀 하고 그래라.”

“체, 귀가 썩을 것 같단 말입니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 줄…….”

딱!

“아앗!”

“낄낄낄! 자식이 말이야 좋은 말로 할 때 들어야지.”

데니스의 비아냥 뒤에는 곧바로 응징이 따랐다.

“폭력으로 해결하겠다, 이겁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마를 감싼 데니스의 머리 위로 갑자기 그림자가 졌다. 데니스를 제외한 기사들이 경직된 자세로 앞을 바라보자,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순식간에 변해 버린 분위기에 어리둥절해하던 데니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엔 다소 심기 불편한 표정의 펠릭스가 서 있었다.

보통 그들은 잠깐의 여유가 생기면 사사로운 농담을 했다. 그만큼 기사단은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펠릭스 역시 이를 용인하곤 했다.

오늘은 무언가 단단히 그의 심기를 비튼 것인지 그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준비는 다 한 건가.”

그의 냉랭한 목소리에 모두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준비는 이미 다 마쳤습니다.”

루카스는 바싹 얼어붙어 있는 기사단을 한번 노려본 후, 펠릭스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그럼요! 전하, 저희가 누굽니까! 이른 아침부터 달려서 설산 정상 밑 오두막을 깨끗하게 치우고, 닦고! 신혼집처럼 아름답게 꾸며놓았습니다아!”

“…….”

펠릭스의 심기를 되돌리기 위해 데니스가 나서서 입을 놀렸다. 역효과를 예감한 주변 기사들은 하나같이 얼음처럼 굳어 데니스를 노려보았다.

“하하하, 뭐 그렇게 고마워하실 필요는…….”

눈치없는 데니스의 모습에 같이 있던 기사단 모두가 망했다, 는 표정으로 이마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쩌면 오늘 지옥보다 더한 훈련을 받을지도.

툭툭.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그때였다.

“그래. 믿음직스럽네.”

데니스가 정강이를 차일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이 빗나갔다.

그가 데니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하고 있었다. 그것도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린 채.

헤실헤실 웃는 데니스를 제외한 기사단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미안해요! 다들 많이 기다리셨죠?”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엘리아가 서둘러 나오고 있었다. 하녀들이 뒤를 따르는 가운데 그 옆에 선 유리가 그녀의 머리에 모자를 씌워주고 있었다.

엘리아는 복슬복슬한 털로 이루어진 로브와 흰 장갑, 털이 달린 모자까지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그녀는 하도 껴입은 탓인지 뒤뚱뒤뚱 걷고 있었다.

펠릭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못내 사랑스럽다는 듯 픽, 소리 내 웃고 있었다.

전하께서 마님에게 단단히 빠졌구나. 기사단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뱉을 용기는 누구에게도 없었다.

호위를 위해 기사단이 서둘러 말에 올랐고, 엘리아와 펠릭스는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탔다.

* * *

“앗!”

심하게 덜컹거리의 마차의 움직임 때문에 엘리아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다 그만 건너편에 앉은 펠릭스에게 기댄 자세가 되었다.

“어머, 죄송해요!”

민망한 마음에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그냥 이대로 가지.”

귓가에 닿는 나직한 목소리에 뺨이 후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펠릭스의 품에 안긴 듯한 모양새라 처음엔 민망했지만, 펠릭스의 품속은 추위도 한결 가시게 하며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죄, 죄송해요.”

“참 죄송할 것도 많군.”

“네?”

“그만 죄송하고, 편히 있으란 소리야.”

“네, 네에…….”

어색하게 답한 엘리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때 펠릭스가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려 돌린 후 자신의 무릎 위에 슬쩍 앉혔다.

“어머!”

덜컹, 덜컹.

마차가 움직일 때마다 두둥실, 몸이 떴다가 더 깊숙이 그와 거리가 좁혀졌다.

그의 무릎에 맞닿은 엉덩이가 조금 더 안쪽으로 미끄러졌을 때쯤, 펠릭스는 엘리아의 허리를 양손으로 받쳐 들고는 그의 허벅지 가까이로 당겨 앉혔다.

“어어, 죄송해요. 불편하죠?”

엘리아는 저도 모르게 다시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뒤에 앉은 그는 별말이 없었다. 왠지 등 쪽이 후끈후끈 열기가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때 달그닥거리던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엘리아는 마차가 멈추자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급히 다리를 꼬며, 마차가 도착했는데도 움직이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왜 저러지?’

의문을 품던 그때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마부가 고개를 조아렸다.

“마차로는 여기까지가 한곕니다, 대공 전하.”

산 하부까지 마차를 이끈 마부가 깍듯이 허리를 굽히며, 두 사람에게 난처한 어투로 말했다.

“크흠.”

“펠? 어디 아프세요?”

펠릭스는 어디가 불편한 듯 숨을 고르는 듯 보였다. 잠시 후 상기되어 발갛게 올라왔던 볼이 어느새 원래의 빛깔로 돌아왔다.

“크흠, 이제 나가지.”

“네? 아 네.”

왠지 열기가 가득했던 마차에서 펠릭스가 먼저 내리며 엘리아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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