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07)
  • “아카데미에 수석으로 입학했다고요? 혹 집사님도 이능이 있나요?”

    “하하, 저는 이능은 없지만, 워낙에 똑똑하고 유능했으니까요.”

    집사는 과장된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이능이 없는데, 가능하셨던 거예요?”

    엘리아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럼요. 모든 시험에 만점을 받았기에, 평민이지만 특별히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앤드류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와!”

    “흐험!”

    16년 만에 처음으로 앤드류가 수석 입학자라는 걸, 아니 아카데미에 다녔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두 손을 허리춤에 얹은 채 가슴을 편 앤드류가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그 모습에 엘리아의 입가에 살풋 미소가 어렸다.

    바바리안 습격 이후 그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생겨서인지 앤드류는 가끔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쨌든 그의 말의 요지는 그래서 엘리아의 이능을 눈치챌 수 있다는 소리였다.

    “대단해요. 다시 봤어요, 앤드류.”

    엘리아는 짝짝,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은근슬쩍 이런 식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흠, 흠흠. 어쨌든, 마님. 이능 보유자가 맞으신 거죠?”

    “아, 뭐.”

    엘리아는 잠시 고민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렇, 군요. 그때 전례 없던 비가 내렸던 게…….”

    “……아, 물론 대공님도 알고 계세요.”

    “뭐, 그것 역시 짐작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무시무시한 얼굴로 달려와 단번에 적을 제압하고 성으로 들어오진 않으셨을 테니까 말입니다.”

    턱을 쓸며 고개를 끄덕이는 앤드류를 바라보며 한참 골똘히 생각하던 엘리아가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양손을 마주 잡았다.

    *** “아! 그럼, 아카데미에 장학생으로 있었다면, 이능도 물론 잘 아시겠네요? 이능을 잘 아는 분이 필요했는데.”

    엘리아가 뛸 듯이 기뻐하며 맑게 미소 지었다.

    이능에 대한 무언가라도 배울 수 있다면, 아카데미에 가지 않더라도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을 터였다.

    “네? 아니 그게……. 마님이 이리 기뻐하시니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앞서 이야기해 드렸다시피 제겐 이능이 없습니다.”

    “네? 그런데요?”

    “이론 가지고는 힘들다는 소립니다. 이능도 가문마다 각기 다른데, 어찌 제가 이론만 가지고 알려 드릴 수 있겠습니까.”

    엘리아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렇네요. 답답한 마음에 그만.”

    푸념처럼 늘어놓는 말에 앤드류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말이 없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낙담한 엘리아 앞에서 한참 만에야 앤드류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애써 실망한 내색을 지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멋대로 기대한 것뿐인걸요.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싱긋, 웃으며 말하는 엘리아의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에는 열의가 담겨 있었다.

    앤드류는 가만히 그런 그녀를 지켜보다가, 황급히 발길을 돌렸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아, 우산은 여기 둘 테니 나갈 때 사용하십시오.”

    “네. 볼일 보세요.”

    뒤돌아 가는 그를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걷혀 봄날의 하늘처럼 푸르던 세상이 금세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벌써 돌아왔네.’

    그녀는 멀뚱히 하늘을 보다 문득,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싫으면, 밀어내도 돼.”

    그리고 짓궂게 웃던 그의 얼굴까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감각이 아직도 선연하게 남아 있었다.

    ‘좀만 더 밖에 있을까.’

    몰려오는 바람에 어깨를 감싸며 몸을 움츠렸다.

    * * *

    앤드류는 요즘 실수하는 일이 잦았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 주변 사람들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하아!”

    대공비가 실망하던 모습이 떠올라 앤드류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다 손에 들린 서류들을 놓쳐 버렸다.

    와르르!

    멍한 시선을 들어 올린 앤드류는 대공의 모습에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주섬주섬 서류를 집었다.

    “……쯧.”

    바닥에 엎어져 서류를 정리하는 앤드류의 머리 위로 짧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보통은 혀를 차는 게 아니라 발밑에 떨어진 서류를 한 장이라도 집어주지 않습니까?”

    앤드류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로하자,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종이 한 장을 와그작 짓밟아주곤 제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새하얀 종이 위엔 펠릭스의 구두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남아 있었다.

    “전하께선 참……. 제게만 야박하게 구십니다.”

    “네가 했던 행동을 생각해, 앤드류.”

    “제가 뭘요?!”

    “뭘요?”

    앤드류의 말을 따라 하며, 대공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볼멘소리를 떠들던 입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앤드류는 그의 사나운 시선을 외면한 채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왜, 대공이 기력이 쇠했다고 제국에도 소문을 내지 그래?”

    “네? 그게 무슨……. 아! 설마 아침 점심 저녁으로 대령한 그 약 때문입니까?”

    “……당장 갖다 버려.”

    “그렇지만, 아직도 합방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특별히……!”

    쾅!

    커다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니, 그 충격에 바닥까지 울리는 듯했다.

    “버려.”

    “넵.”

    주섬주섬 서류 정리를 마친 앤드류는 슬쩍 펠릭스의 눈치를 살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앤드류가 입을 열 때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앤드류도 창을 열고 선 그의 시선을 따라 바깥을 바라보았다.

    창 바깥에는 대공비가, 정원의 눈길 위를 거닐고 있었다.

    “저녁은, 안 먹는다던가?”

    앤드류는 펠릭스의 말뜻을 단박에 이해했다.

    “아, 도련님 수업이 끝나면 같이 드실 생각이신지 기다리신다고 하셨습니다.”

    “흠, 앞으론 좀 일찍 끝내도록.”

    “네, 네?”

    “수업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앤드류는 미동 없이 창가에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요즘따라 더 대공비는? 부인은? 그 말만 입에 달고 사시는데 뭐…….’

    오랫동안 그와 같이했던 터라, 앤드류는 펠릭스의 이런 면을 지켜보는 게 왠지 모르게 즐겁고 재미있었다.

    이런 모습은 친우처럼 지냈던 첫 대공비를 대할 때와도 사뭇 달랐다.

    “크흠, 마님의 일로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앤드류가 조금은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마님, 이라는 소리에 펠릭스의 고개가 바로 집사를 향했다.

    “뭐지.”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는 계속해 보라는 듯이 미세하게 끄덕거렸다.

    “마님의 이능…….”

    “잠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마님께 여쭤봤습니다.”

    “……흠, 순순히 알려주던가?”

    삽시간에 사나워지는 펠릭스의 눈빛에 앤드류가 두 손을 들어 이리저리 휘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알려주셨다기보다는 어쨌든 저도 아카데미 출신이고, 북부 날씨가 최근 들어 자주 변덕을 부리는 것 같아서 눈치챘을 뿐입니다.”

    “그렇군.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낸 거지?”

    그의 눈빛이 살짝 수그러들었다. 그에 앤드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 실은 얼마 전에 마님께서 이능 이야기를 하면서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셨거든요.”

    “도움?”

    “네, 마님께서 이능 운용이 자유롭지 않다고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보셨는데, 알다시피 저는 이능 능력자가 아니라…….”

    “…….”

    “흠흠, 그래서 생각해 보니 친한 동무 중 한 명이 아카데미에서 교수 겸 연구자로 활동했는데, 아내가 죽고부터 북부에 정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펠릭스는 그의 말을 듣다 창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다시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수업이 끝났는지 아이가 달려와 엘리아의 품속으로 와락, 안기는 모습이 보였다.

    둘은 북부의 추위도 녹일 만큼 밝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 말은 그자를 데려오면 좋겠다는 거군.”

    “네, 그렇습니다.”

    “그럼, 데리고 오게.”

    앤드류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렇긴 합니다만. 문제가 좀 있습니다.”

    “뭐가 문제인가?”

    “그 친구가 살짝 연구에 미쳐 지내서 이곳에 와서 머물지 잘 모르겠습니다.”

    “흠, 설득이 필요하겠군.”

    “마님께서 직접 가셔서 이능을 보여주고 설득한다면, 그 친구도 흥미를 느끼고 같이하려고 할 것 같기는 한데.”

    앤드류는 눈동자를 굴리며 펠릭스의 눈치를 보았다.

    “흠.”

    “한데, 그 친구가 설산 너머에 산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이라면 이동하기에 쉽지 않겠군.”

    “네, 아시다시피 그곳은 기사들도 조금은 힘들어하는 곳이라. 마님께서 가실 수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마님께선 무리해서라도 설산을 넘으시려고 할 거야. 그분 몸으론 혼자서 무리겠지.’

    앤드류가 며칠간 고민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채비해 둬. 내가 부인과 함께 가면 될 것 같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창밖을 내다보던 펠릭스는 머릿속의 정리가 끝난 듯 지시를 내렸다.

    “……네. 알겠습니다.”

    * * *

    달그락! 달그락!

    아이는 접시에 올려진 생선에 집중하며 포크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의 입술은 무언가 집중할 때면 버릇처럼 앞으로 내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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