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07)
  • ‘스카디…….’

    지난 일을 잠시 떠올리던 엘리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모든 게 오해로 비롯된 일이라 할지라도 제레미를 해치려 한 사람이라 쉽게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앤드류, 할 일이 없나? 만들어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요즘 자기 방인 양 매일같이 엘리아의 방을 드나드는 펠릭스의 냉랭한 목소리였다.

    ‘오늘도 왔구나…….’

    고개를 들어 문가에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올 때마다 기다리던 편지를 뜯는 소녀처럼 가슴이 떨렸다. 엘리아는 열기가 오르는 볼을 매만졌다.

    “아닙니다! 저는 이만 일하러 가보겠습니다.”

    앤드류가 고개를 깊숙하게 숙여 인사를 한 후, 다급하게 문밖으로 사라졌다.

    펠릭스는 문턱에 서서 가만히 엘리아와 제레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엘리아의 말에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아이는 침대맡에 앉아 짧은 다리를 번갈아 흔들고, 커다란 눈을 깜박이면서 펠릭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이서 나란히 앉은 모습이 꼭…….”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침대 위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말끝을 늘리던 그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꼭?”

    엘리아가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옆에 앉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꼭, 뭘까?”

    싱긋 웃으며 묻자 아이는 한여름의 햇살처럼 따사로운 함박웃음을 지었다.

    “눈사람이요!”

    “응, 눈사람?”

    “네, 이렇게 엘리아 님, 아버지, 나.”

    아이의 해맑은 대답에 엘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듯 피어올랐다.

    “그랬나 보다. 그렇게 다정해 보였나 봐.”

    “밖에는 세 눈사람이 나란히 있으니까, 아버지도 오세요!”

    아이가 제 옆의 빈자리를 툭툭 치며 소리쳤다. 그는 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거침없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새하얀 침대보 위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뭘 하고 있었지?”

    그의 물음에 아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책을 높이 들어 올렸다.

    “책 읽고 있었어요! 엘리아 님은 아버지보다 제레미 목소리가 훨씬 좋대요!”

    잔뜩 신이 난 아이의 말에 그는 심술이 난 듯 불퉁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흐음.”

    엘리아가 그의 눈길을 피해 살짝 고개를 숙이자 바로 그의 입가는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오늘도 플라타너스의 숲길을 걸었습니다. 나뭇잎 조각들이 땅거미 진 바닥 위로 검게 자라 서로를 마주 봅니다.”

    아이는 동화책을 읊어나갔다. ‘한여름 밤의 숲’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아이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나뭇잎이 빼곡히 자라난 플라타너스 그림을 보더니 동화책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플라타너스에는 나뭇잎이 이렇게 많이 자라요?”

    아이가 엘리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가 자그마한 손끝으로 그림을 짚어나갔다.

    “플라타너스……. 예쁘겠다.”

    “……보고 싶니?”

    “으음. 아뇨! 제레미한텐 아도니스 있자나요!”

    “아, 아도니스? 호호호 그렇구나.”

    한참 작았던 아이는 고작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쑥쑥 자라났다.

    “아도니스가 못 들었겠죠?”

    키만큼이나, 아이의 다정한 마음도 가지를 뻗으며 자라나는 것 같았다.

    ‘네가 자라는 순간마다 계절이 바뀌었으면 좋겠어.’

    언젠가 이 사랑스러운 분홍빛 머리카락 위에 잔뜩 벚꽃잎을 뿌려주겠노라, 그녀는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식물은, 식물일 뿐이야.”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펠릭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들 사이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아도니스는 내 동생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이가 발끈한 듯 소리쳤다. 표정에는 ‘아빠 미워’라고 적혀 있는 듯했다.

    “꽃한테 동생이라니, 참…….”

    그가 어이없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을 잇자,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에 이내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싫어…….”

    아이가 울먹이며 엘리아의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아이는 펠릭스와 말이 통하지 않을 때마다 버릇처럼 엘리아를 찾았다.

    그게 귀엽고도 사랑스러워서, 그녀는 아이에게 진지한 상황임을 알면서도 웃음이 절로 비어져 나왔다.

    “흠흠. 아도니스는 북부에 첫 꽃잎을 피운 특별한 꽃이라고요.”

    그녀는 아이의 앙증맞은 코끝을 콕 찌르며 아이의 편을 들어주었다.

    “응, 특별한 꽃!”

    아이는 자신만을 향한 다정한 미소에 환한 웃음으로 대신 답하며 책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보러 가야겠어요!”

    아이는 재빠르게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이참, 도련님! 그렇게 뛰면 다치세요!”

    하녀들이 서둘러 아이를 따라나섰다. 아이의 뒷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펠릭스는 그런 엘리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는 아이의 발걸음 소리가 자장가처럼 감미로운 한낮의 오후였다.

    “당신은, 아이만 보면 웃고 있어. 그게 참 이상해.”

    창 너머에서 전해지는 아이와 하녀들의 투덕거림에 귀 기울이고 있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우물처럼 깊은 잿빛의 눈동자가 보였다.

    “……저도 제가 이상해요.”

    머뭇머뭇, 손가락을 마주 얽다가 겨우 말을 내뱉었다.

    “아이를 보기만 해도 좋아서 웃음이 나와요. 저에게 가족은 그냥 서류상의 기록에 불과했는데.”

    밖에서 들리는 아이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창밖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진짜 가족이 무엇인지, 죽음의 끝에서야 알아버린 게 너무 불쌍해 보여 신이 나를 이곳으로 돌려보냈을까.’

    “……그렇군. 그럼 지금은 무엇인가 달라졌다는 이야기인가?”

    잔잔한 눈빛의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펠릭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있나?”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후후, 뭐든 다 줄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뭐, 못 해줄 것도 없지.”

    그녀가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죄송하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이번엔 제 차례거든요.”

    “차례?”

    “네.”

    복잡한 표정의 펠릭스를 뒤로한 채 벌떡 일어선 엘리아가 창가로 다가가 살짝 까치발을 들었다.

    “제레미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요.”

    금발이 가냘픈 허리춤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긴 드레스 끝자락에 얇은 발목이 잠시 드러났다가 모습을 감췄다.

    “부인.”

    펠릭스의 낮은 목소리에 엘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샌가 그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엘리아는 창밖 풍경에 정신이 팔려 전혀 생각지 못한 터라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앞에 흰 셔츠를 입은 그의 가슴팍이 보였다.

    “펠?”

    당황한 듯, 그녀는 마른 숨을 삼켰다.

    그의 얼굴이 더욱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싫으면, 밀어내도 돼.”

    펠릭스는 엘리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꺾었다.

    “잠…….”

    춥,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짓궂게 미소 짓는 펠릭스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른 엘리아 사이로 제레미의 말간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 * *

    성 바로 밑 커다란 포치 아래, 엘리아가 포치 바깥으로 새하얀 손을 살짝 내밀었다.

    포슬거리는 눈송이가 손바닥에 닿자마자 사르륵, 녹아내렸다.

    탁.

    “마실이라도 나가시려는 겁니까?”

    커다란 우산을 펼쳐 든 앤드류가 다가왔다.

    “아, 앤드류군요?”

    엘리아의 눈빛에 잠시 실망감이 비쳤다 사라졌다.

    “……혹시 대공님이신 줄 아셨습니까?”

    “아, 아니에요.”

    엘리아는 민망한 마음에 괜스레 눈길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어서 성으로 들어가십시오. 5월이라곤 해도 날이 상당히 추울 겁, 어라?”

    앤드류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다가 멈춰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검은 구름이 걷히고, 어느샌가 눈송이가 가루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앤드류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고개를 내려 다시금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푸르게 빛이 비치고 있었다.

    “……혹시나 싶었는데, 그날 줄기차게 내렸던 비도 역시 우연이 아니었군요. 이능 보유자셨던 겁니까?”

    복잡한 표정을 짓던 앤드류가 사뭇 진지하게 물어 왔다.

    “갑자기 이능이라니 무슨…….”

    당황한 엘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어차피 이능 보유자가 아니고서야 일반 사람들은 이능에 대해서 잘 몰랐으므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긴장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저도 대공 전하의 사람이고 또 나름 아카데미에 수석으로 입학했던 사람이라 이능이라면 좀 알고 있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