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07)
  • 스카디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챙!

    날이 선 단검이 스카디의 바로 앞으로 던져졌다.

    “이 단검이 그대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이 되겠군.”

    펠릭스가 뒤돌아 막 계단을 오르려는 찰나였다.

    “……저희를 살려주는 이유가, 비단 맹약 때문만은 아닐 테지요.”

    스카디의 나직한 목소리가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뒤돌아본 그녀의 눈동자는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잘 아는군. 어찌 보면 목표가 같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펠릭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스카디를 시작으로 바바리안 병사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들도 알게 된 것이다. 진짜 자신들의 적이 누구인지.

    그들의 인사를 뒤로하며 두 사람은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참, 이게 무슨 일인지. 아직도 어리둥절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의구심이 가득했다.

    “이번 싸움으로 다친 이들도 있지만, 다행히 사망자도 없고, 로이드라는 공동의 적이 생겼으니 서로가 필요하기도 하고.”

    “그건, 그렇습니다. 황태자가 그렇게까지 전하를 모함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너무 안일했지. 욕심이 많은 아이라는 걸 그새 잊어버렸으니.”

    “전하…….”

    앤드류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이제 나도 정신을 차려야지.”

    “네. 저도 더 정신을 바짝 차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저들의 정착지로 어디를 생각하십니까.”

    앤드류는 머릿속으로 이곳저곳을 예상해 보며 펠릭스의 의견을 물었다.

    “성 근처 수도는 이미 오래 정착한 주민들이 있어서 자리를 잡기 힘들 테지. 설산 기준으로 북부 마을에 정착시키면 좋을 것 같군. 자유로운 부족이니, 알아서 적응하겠지.”

    “북부, 마을이요? 거긴 옛적에 산사태로 무너져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 아닙니까?”

    앤드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척박한 북부에 편하고 좋은 곳이 어딨나.”

    그의 지적에 앤드류는 빠르게 인정하며 꼬리를 말았다.

    “아하, 또 그건 그렇네요.”

    “초기에 자리 잡을 때까지는 어느 정도 지원을 해주고, 이후는 본인들이 개척해서 살아가야지.”

    “네, 그게 좋겠습니다.”

    “그럼 그들이랑 차후 일을 자네가 더 논의해 보게.”

    “네!”

    앤드류는 대답을 하며 여전히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안 가나?”

    펠릭스는 걸음을 멈추며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앤드류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네?”

    “저들과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지.”

    “지금이요?”

    ‘끙차’ 마지막 지하 감옥의 계단을 다 빠져나온 앤드류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응, 지금!”

    “……네.”

    앤드류가 축 처진 어깨로 지하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체, 다 올라와서 다시 내려가라고? 점점 고약해…….”

    펠릭스의 귓가에 앤드류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꽂혔다.

    “자네? 뭐라고 했나?”

    “헙, 아닙니다.”

    펠릭스의 목소리에 놀란 그는 후다닥,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뭐지?”

    급히 사라지는 발소리에 펠릭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 * *

    복도를 걸으며 이마 위로 살짝 내려앉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던 펠릭스는 문득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던 그녀를 떠올렸다.

    ‘좀 더 일찍 출발했어야 했어.’

    해란 근처 마을까지 쳐들어온 군단을 막고 있을 때쯤 성에만 비가 내리는 걸 봤다. 그는 곧장 루카스를 호출했다.

    “상단주로 위장한 여자는 지금 어딨지?”

    전투 중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물음에 루카스가 알아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카디와 몇몇 일행이 기사 몇을 때려눕히고 빠져나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에 마음이 더 조급해진 펠릭스는 빠르게 적들을 밀어내며 성 쪽으로 황급히 말을 몰았다.

    ‘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그 생각만 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펠릭스는 곧장 2층 복도 맨 끝에 있는 제레미의 방으로 향했다.

    살짝 열려 있는 문 사이로 침대맡에 앉아 아이의 이마 위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하늘하늘하고, 새하얀 슈미즈 드레스 차림인 엘리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제레미의 말랑한 분홍빛의 볼살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아이는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똑똑.

    그는 이미 열려 있는 문 위로 노크를 했다.

    “유리! 이리 와서 제레미 좀 봐봐. 잠든 상태로…….”

    제레미가 깰까 소곤거리던 엘리아가 문 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는 멍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유리가 아니라 미안하게 됐군.”

    펠릭스의 목소리가 반갑게 고개를 들던 그녀는 순간 멈칫하며, 옷매무새를 급히 수습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페, 펠이었군요.”

    엘리아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펠릭스가 삐딱하게 서서 팔짱을 꼈다.

    ‘쯧…….’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하녀보다 반기지 않는 남편이라니, 너무 늦게 도착해서 그런 건가.

    “내가 이 자리에 가장 적절한 사람 같은데, 아닌가 보군?”

    성큼,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엘리아는 그가 다가설 때마다 몸을 움츠리더니 결국 고개를 숙였다. 길고 부드러운 금발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제레미를 보러 오셨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펠릭스가 황급히 일어서는 엘리아의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았다.

    “……?”

    놀라 고개를 든 엘리아와 펠릭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은 만개한 초여름의 붉은 장미보다 더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당신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 왔어.”

    “말, 말씀하세요.”

    그 말에 또다시 엘리아는 은근슬쩍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대체 왜 피하는 거지?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가 보군?”

    “불만이라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작은 목소리에 뒷말이 잘 들리지도 않았다. 펠릭스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자 얼른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럼 대체 왜 피하지?”

    “……피, 피한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부끄러운 거예요!”

    대뜸 펠릭스의 가슴팍을 밀어낸 엘리아가 소리쳤다.

    그제야 펠릭스는 그녀의 드러난 가슴골이 눈에 들어왔다.

    “큼. 뭐가 부끄러운 거지?”

    펠릭스는 능청스럽게 헛기침을 했다. 엘리아가 또다시 두 손 위에 얼굴을 파묻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지 입가가 절로 씰룩거리는 듯했다.

    ‘미쳤지. 그래,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어.’

    손 틈새로 그를 올려다보는 하늘 같은 눈동자가 보였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안 그래도 작은 몸이 잔뜩 움츠러들며 더 작아지는 신기한 광경을 지켜보던 펠릭스의 입가에 어느새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천천히, 가깝게 다가서자마자 은은한 허브 향과 함께 작고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펠, 펠……?”

    “…….”

    당황한 엘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작은 몸을 끌어안은 채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당신한테 해야 할 말이 있다고 했지? 별건 아니지만, 그래. 인정하지. 당신 이능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이번 일은 당신에게 큰 신세를 졌군.”

    그의 말에 잔뜩 움츠린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 * *

    “참, 면목이 없습니다. 제레미 님께서도 나선 일을…….”

    오가는 사용인들은 엘리아를 볼 때마다 그들을 위해 나서주던 모습이 떠올라서인지 고개를 숙이며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거기에 앤드류는 자신이 먼저 나서서 미리 보호해 주지 못했던 것에 대해 자책하며, 콧잔등을 찡그리곤 했다.

    “……괜찮다니까요, 앤드류. 정말 괜찮아요.”

    엘리아는 그때마다 괜찮다고, 마음 써준 거 다 안다고 몇 번이나 거듭해서 대답해 주었다.

    옆에 앉아 책을 읽던 제레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이, 정말 그만!”

    “네?”

    “계속 똑같은 소리!”

    아이는 반복되는 앤드류의 사과에 양손으로 두 귀를 막아버렸다.

    “제, 제레미…….”

    “도련님…….”

    당황한 엘리아와 물기 어린 앤드류의 목소리가 동시에 방 안에 울렸다.

    “도련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저 역시 북부에 날벼락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고 얼마나 아득바득 외부인을 막고 있었는데요! 저는 억울하다 이겁니다!”

    “모야. 그래서 막아써?”

    “그, 그건…… 물론 서둘러 달려오신 전하께서 처리하시긴 했지만…….”

    엘리아는 앤드류와 제레미의 투덕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 사건이 있고, 벌써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엘리아는 잠시 손에서 일을 놓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시간을 보냈다.

    스카디에게서 편지가 오기도 했는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바바리안의 향후 거취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이미 펠릭스가 바바리안을 북부에 흡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뒤였기에 편지 내용이 그리 놀랍진 않았다.

    시간이 흘러, 만남이 허락된다면 그때 다시 사죄하겠노라는 이야기도 덧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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