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07)
  • 콰광!

    작은 창이 번쩍이며 밖에서 천둥이 쳤다. 번쩍임과 함께 창을 들어 올린 스카디의 긴 그림자가 엘리아와 제레미를 뒤덮었다.

    파팍!

    둔탁한 소음과 함께 스카디의 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후두둑, 진액 같은 핏물이 엘리아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큭!”

    뒤에 서 있던 스카디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서슬 퍼런 칼날이, 창을 들고 있던 스카디의 손목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활짝 열려 있는 현관 앞에는 펠릭스와 앤드류가 서 있었다.

    “펠……!”

    거센 비바람이 성 내부까지 들이닥치고 번쩍이는 번개가 그를 비추다가 이내 사라졌다.

    “엘리아!”

    그는 턱 끝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늦어서 미안하오.”

    “펠, 펠 우리 제레미가…… 흑흑!”

    그의 모습을 확인한 엘리아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복받치는 슬픔에 흐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레미!”

    펠릭스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아 꺼질 듯 숨을 몰아쉬는 아이를 살폈다.

    이어 기사단이 빠르게 달려와 스카디를 포박했다.

    그리고 앤드류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마님, 도련님께선 치료가 필요하십니다.”

    “흑흑, 앤드류…….”

    눈을 꼭 감은 아이는 마치 잠이 든 것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네, 마님. 도련님을 어서 저에게…….”

    엘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앤드류의 품으로 넘겨주었다. 이미 힘이 다 빠진 상태라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

    펠릭스도 감정을 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레미를 빨리 옮겨 치료해라.”

    펠릭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묵직하게 실내에 울렸다.

    유리가 눈물에 범벅된 얼굴로 엘리아를 부축해 주었다.

    검에 꿰뚫린 스카디의 손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도 그녀는 펠릭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북부에 쳐들어온 놈들 모두 붙잡혔다.”

    “……개새끼.”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녀의 눈동자 위로 핏발이 섰다. 여태 어떻게 버텼는지, 놀라울 정도로 태도가 확 돌변해 있었다.

    “날뛰지 말고. 얌전히 처분이나 기다려라.”

    펠릭스의 말에 스카디는 금방이라도 몸에 묶인 밧줄을 풀어낼 듯 으르렁대며 발버둥 쳤다.

    “……아버지의 원수, 널 죽일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스카디가 잔뜩 핏발 선 눈으로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네놈만큼은 절대. 죽어서도, 절대 용서 못 해!”

    스카디는 비명 같은 목소리로 그를 저주했다. 그녀의 손등을 타고 피가 흘렀다. 안 그래도 꿀렁이며 솟구치던 핏물이 바닥을 적실 정도로 흥건해졌다.

    스카디의 울부짖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시선을 돌려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저 일을 처리할 테니, 제레미에게 가 있도록 하시오.”

    그의 시선이 핏물이 흐르는 엘리아의 목 언저리에 머물렀다.

    “난, 난 괜찮아요.”

    “아직 피가 흐르고 있소, 유리, 마님을 모셔라.”

    “네, 대공 전하.”

    엘리아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유리의 부축을 받으며 이동하였다.

    걱정 어린 시선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펠릭스의 시선이 스카디에게 향하면서 무섭도록 차갑게 변했다.

    “대체 누가 누굴 죽였다는 거지?”

    “……하, 발뺌이라도 할 속셈인가?”

    “바바리안 족장이 죽기라도 했다는 건가?”

    둘은 서로를 노려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당신이 죽였잖아!”

    “난 죽이지 않았다. 뭔가 잘못 알고 있나 보군.”

    의문이 담긴 눈빛에 스카디는 더 분노하며 소리쳤다

    “……이제 와 사실을 부정하겠단 소리냐?”

    “맹약은 깨지지 않았다.”

    “헛소리하지 마. 그래, 아버지의 서신이 왔었지. 당신과 맹약을 하였다고. 그래서 우린 모두 안심하면서 아버지의 귀환을 기다렸어.”

    “……?”

    “너도 네가 저지른 짓이 추잡하다는 걸 아니 숨기고 싶었나 보지? 그래. 맹약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성스러운 영역이니까!”

    결박당한 채 이를 악문 스카디가 소리쳤다.

    “하, 정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자.”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펠릭스는 늘 차고 다니던 단검을 꺼내 툭, 스카디의 앞으로 던졌다.

    “알고는 있겠지? 바바리안족이 직접 만든 성검, 맹약의 증표다.”

    “이건…….”

    무릎을 꿇은 채 가만히 단검을 내려다보던 스카디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맹약을 지키지 않을 시에 신의 힘이 담긴 검이 모래알처럼 사라진다고 하더군. 나는 맹약을 지켰다. 이게 그 증거겠지.”

    “그럴, 그럴 리가 없어……. 참전했던 바바리안 일족 모두 몰살당하고, 아버지도 돌아가셨어! 처참히 찢어발겨진 채로!”

    “하,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로 들리는군.”

    펠릭스는 더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스카디에게 등을 돌렸다.

    “아닌데, 분명, 분명 황태자가…….”

    횡설수설 중얼거리는 스카디의 말 중에 지나칠 수 없는 단어가 있었다. 펠릭스가 계단을 오르려던 동작을 멈추고, 다시금 스카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펠릭스와 시선이 마주치자 스카디의 금빛 눈동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스카디의 눈에서 금세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아버지의 갈기갈기 찢긴 시신을 들고, 황태자가 직접 바바리안 거처에 찾아왔었어.”

    스카디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황태자라고?”

    펠릭스는 그녀의 두서없는 이야기에도 무슨 상황인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그가 그렇게 말했어. 당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

    “잔인한 당신이 죽은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 모욕까지 했다며, 잔혹한 형 대신 사과를 한다고까지 했었어.”

    온갖 술수를 다 쓰며 무엇이든 독차지하려는 그의 성미를 보면, 그런 모략을 꾸미고도 남을 놈이었다.

    ‘체이스 로이드의 짓이었군.’

    “그땐 죽은 아버지 생각만 하느라 눈이 멀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 당신을 죽여 버리겠다는 복수 외에는…….”

    그녀의 목소리는 허공을 부유하듯 의미 없는 이야기로 들렸다.

    “하, 너의 그런 섣부른 판단이 너를 따르던 부하들과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하게 만들었군.”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스카디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나를, 나를 죽이십시오.”

    그녀는 포박당한 채 바닥에 몇 번이고 이마를 짓이기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차피 황실에 끌려가면, 죽을 목숨. 그 쓰레기 같은 새끼 손에 죽을 바에 차라리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황태자에게 놀아났다는 것을 이제야 확실하게 깨달은 듯 비통하게 소리치는 그녀의 목소리가 초라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펠릭스는 냉정하게 눈빛을 굳혔다.

    “……끌고 가라.”

    그의 명령에 기사들이 지하 감옥으로 스카디를 끌고 갔다.

    * * *

    “도련님께선 내상을 입으셔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십니다. 그리고 마님께선 다행히 깊은 상처가 아니어서 간단하게 조치를 취했습니다.”

    조심스러운 앤드류의 보고에 펠릭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스카디와 그 외 일당들이 모두 포박당한 채 북부 성 지하 감옥에 갇혀 최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인은?”

    “마님께서는 치료가 끝나자마자 도련님 침실로 이동하셔서 내내 머물러 계십니다.”

    “……흐음. 별다른 말은 없었나?”

    “네. 없었습니다.”

    “……송구합니다. 도련님께서도 나선 마당에, 집사란 자가 침입자에게 발이 묶여서…….”

    앤드류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만, 자책할 필요 없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으니.”

    “그건 그랬겠지만……!”

    자신의 실책에 앤드류는 다시 한번 사과하려 고개를 숙였다.

    “……거기까지 하도록 하지.”

    펠릭스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차단했다.

    “……네. 전하.”

    “그들은 모두 정리가 되었나?”

    “네. 흩어졌던 잔존 세력들도 모두 정리해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흠, 같이 가보도록 하지.”

    “네.”

    두 사람은 집무실을 벗어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철창을 열어라.”

    펠릭스는 앤드류와 함께 지하 감옥에 당도했다.

    스르륵, 탁!

    무거운 자물쇠가 풀리고 철창이 끼이익, 낡은 소리와 함께 개방됐다. 벽에 기대어 앉은 스카디의 허망한 눈빛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족장이 딸에게 편지를 보낼 거라며 즐거워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게 수다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딸의 자랑을 했었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가지고도 남은 것 같군.”

    “…….”

    “생각이 바뀌었다.”

    “……무슨 뜻입니까?”

    “너에게 기회를 줘볼까 한다.”

    “기회라니?”

    죽어 있던 스카디의 눈빛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 “너도 너의 아비와 같은 생각이라면 우린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더군.”

    “……!”

    “맹약의 조건에는 바바리안의 기술력을 빌려주는 조건이 있었지. 그리고 나는 그 대가로 그대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기로 했고. 물론, 모종의 사건으로 동포를 모아 북부에 닿지 못한 것 같지만.”

    “그럼……!”

    “네가 동의한다면 맹약은 지켜질 거야.”

    감정 없는 펠릭스의 목소리가 지하 감옥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다른 감옥에 있던 바바리안 병사들도 철창 가까이로 와 숨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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