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07)

펠릭스는 스카디를 살짝 노려보듯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싱긋, 웃고 있는 건 오직 엘리아뿐이었다.

*** 눈꽃이 엘리아의 금실 같은 머리카락을 하얗게 적셨다. 그녀는 스카디와 함께 코를 살짝 훌쩍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펠릭스는 멀찍이 서서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있었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푹푹 패는 소리와 함께 발목이 눈 속에 파묻혔다.

“로이드 부인, 아까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겐 정말 가족 같은 이들이거든요.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도 함께 버텨 더 소중합니다.”

“그렇군요.”

스카디가 엘리아에게 또 한 번 사과한 뒤 과거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제국 출신인 스카디는 미천한 신분에 어릴 적 아버지까지 잃으며 힘든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작은 상단마저 위태로워져 상단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고.

스카디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엘리아의 눈망울이 금세 촉촉해졌다.

“어느 날은 먹을 게 없어 구걸을 해 돌아왔는데 아이 하나가 아사했더라고요.”

“어머, 그런 일이……. 하지만 그건 스카디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런가요? 그때 처음으로 책임이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무서운 건지 깨달았어요.”

바닷가 근처에 자리 잡은 숙소라 그런지 저 멀리 파도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어두워서 스카디의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다. 그저 금색 눈동자만이 희미하게 빛날 뿐이었다.

“그 후로 악착같이 살면서 돈을 벌었어요. 내 사람들만큼은, 내 손으로 지키고 싶어서. 아까도 그래서 그랬어요. 지키고 싶어서.”

스카디는 잠시간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에 가려 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은 어둡다 못해 칠흑처럼 새카맸다.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지 짐작이 되네요.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셨군요.”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내 부인께서 불편하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힘든 이야기인데…….”

그녀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했다. 또한 내 사람을 지키고자 했던 그녀의 마음도 깊게 공감이 되었다. 같은 이유로 그녀도 다시 돌아왔기에.

그리고 힘든 시간을 버티고 이 자리에 선 그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부인의 배려 감사합니다.”

스카디의 눈꼬리가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그 모습에 엘리아는 같이 미소 지으며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아차, 싶어 뒤로 돌자 펠릭스가 멀찍이 서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만 들어갈까요? 전하께서도 지루해하시는 것 같은데.”

옆에 있던 스카디가 엘리아를 펠릭스 쪽으로 살며시 밀었다.

“가보세요. 전 조금만 더 산책하다가 들어갈게요. 부디 좋은 밤 되세요.”

망설이던 엘리아는 스카디의 말에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볼게요. 스카디도 좋은 꿈 꿔요.”

엘리아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펠릭스를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엘리아가 뒤돌자 내내 웃고 있던 스카디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 * *

계단을 오르던 펠릭스가 엘리아의 손목을 잡고 한쪽으로 이끌었다. 그곳은 펠릭스가 머물기로 한 방이었다.

“왜, 이곳에……?”

얼떨결에 침실로 들어온 엘리아는 당황하여 말끝을 흐리며, 멀뚱멀뚱 펠릭스를 바라봤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누지.”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살짝 놓으며 벽난로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상단주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

짧은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펠릭스였다.

“스카디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어요. 왜 그러세요?”

“어린 시절?”

“네, 어린 시절 고생했던 이야기를 해줬어요.”

“…….”

그녀의 말에 팔걸이를 톡톡톡 치며 펠릭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말이 없어졌다.

“펠릭스?”

그는 아직 상단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마음에도 다 떨치지 못한 불안함은 있었다.

“……상단이 의심스러워.”

“저도 그런 마음이 아직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스카디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의심스러운 마음이 조금 사라지기는 하네요.”

“그래?”

“네,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거든요.”

엘리아의 말을 들은 펠릭스가 한숨을 내쉬며 당부했다.

“후, 하지만 너무 마음을 놓지는 말아야 할 거야.”

“당신은 그들이 여전히 의심스럽군요.”

“그래, 하지만 당신은 그 정도만 알아둬.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펠릭스의 말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알아서 하겠다니. 좀 다정하게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하나 싶었다.

“……펠. 그래서 제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에요?”

자세를 바꿔 다리를 꼰 펠릭스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아는 간단하고도 명료한 대답에 기가 차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뭐가 그리 우스운 건지 펠릭스가 실소를 터뜨렸다.

“왜 웃어요? 전 진지한데!”

“알아, 당신은 항상 진지하지. 그 작은 머리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말이야.”

잔잔하게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이 보였다. 칠흑처럼 어두운 머리카락 아래로 짙은 눈썹과 가느스름하게 좁혀진 눈가, 두 사람의 눈길이 엉켰다.

그리고 본능처럼 두 사람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펠릭스는 황급히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뭐지?”

문가를 향한 그의 목소리가 잔뜩 날이 섰다.

“전하, 요청하신 자료 가져왔습니다.”

“큼, ……기다려라.”

반갑지 않은 불청객의 등장으로 두 사람의 얼굴은 민망함에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크흠, ……내일 바빠질 테니, 부인은 어서 가서 자야겠소. 내가 데려다주지.”

불그스름한 목덜미를 쓸어내리던 펠릭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빠르게 말을 내뱉은 그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방으로 데려다주겠다던 사람이 혼자 나가 버린 것이다.

덩그러니 방에 남은 엘리아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펠?”

그날 루카스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대공의 짜증을 받아내야만 했다.

‘마님, 돌아오세요!’

* * *

외부에서 들리는 분주한 움직임에 엘리아는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창 너머를 바라보니, 펠릭스를 제외한 그의 북부 기사단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지?’

유심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누구지?”

엘리아는 숄을 걸치고 방문을 열었다.

“어어, 스카디……?”

방문 앞에는 스카디가 있었다.

“로이드 부인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른 아침인데도, 졸린 기색 하나 없이 그녀는 싱그러운 미소 짓고 있었다.

“지금이요?”

“네, 괜찮으시다면 지금 부탁드려도 될까요?”

살짝 난감한 얼굴을 했던 엘리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하며 말하는 스카디의 얼굴에 차마 싫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금방 준비하고 나올게요. 잠시 기다려 주세요.”

“천천히 나오세요.”

방에 들이려던 엘리아는 스카디가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어젯밤 펠릭스와의 이야기가 떠올라 기사단이 있는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을 바꾸었다.

엘리아는 천천히 방문을 닫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 아침에 온 거지?’

스카디의 사연을 듣고 나니 그녀가 안쓰러운 한편, 의심스럽다는 펠릭스의 말에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지금으로선 확실치 않으니 정확한 증거를 찾는 게 어쩌면 제가 해야 할 일일지도 몰랐다.

‘좋아. 뭐든 부딪혀 보면 답이 나오겠지.’

엘리아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오셨어요?”

준비를 마치고, 숙소 밖으로 나오자마자 스카디가 엘리아를 반겼다. 꾸벅, 가볍게 묵례하는 모습이 그녀다운 인사라서 말없이 웃어주었다.

“네, 그런데 다들 바쁜 것 같아요. 주변이 북적거리네요.”

“아아, 어제 조금 일이 있어서요. 선박에 좀도둑이 들었지 뭐예요.”

“……좀도둑, 이요?”

“흐음. 전혀 모르셨군요.”

스카디는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든 채 물었다. 한데 그 모습이 영, 께름칙했다.

한참 경직된 자세로 서 있는데, 스카디 근처로 다가온 상단원이 그녀에게 귓속말로 무어라 일러주기 시작했다. 그녀는 슬쩍 엘리아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생겨서 그런데, 잠시 여기 계시겠어요? 금방 오겠습니다.”

“……? 그래요. 다녀오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아에게 스카디는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는 다급한 발걸음을 옮겼다.

‘대체 뭐지? 본인이 불러놓고 이렇게 가버리네?’

스카디의 뒷모습에 조금은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는 거지?’

다급한 그녀의 모습이 의심스러워 조심스럽게 스카디의 뒤를 쫓았다.

저 멀리 스카디의 검은 로브가 보였다.

‘뭘, 하는 거지……?’

천천히 그쪽으로 옷깃을 여미며 나아갔다. 걸을 때마다 입김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스카디는 춥지도 않은지 로브만 걸친 채 등을 보이며 가만히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어어?’

천천히 다가가던 그녀는 스카디에게로 새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 새는 망설임 없이 스카디의 팔 위로 가 앉았다.

인기척이 느껴졌던 건지, 스카디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아, 로이드 부인.”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싱긋 웃으며 뒤돌아섰다. 동시에 검은 새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저것은…….”

“눈밭에 쓰러져 있었어요. 조금 도와줬더니, 절 무척 잘 따르네요.”

‘저 새는…….’

팔뚝 위로 우수수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후후, 웃던 스카디가 엘리아에게 다가오며 어서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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