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07)

“그러고 있지 말고 좀 마셔봐요. 이 추운 곳에선 속이 뜨뜻해야 하잖아요?”

“이 사람은 술을 못해.”

엘리아의 옆에 앉은 펠릭스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신 답을 주었다.

“에이, 그래도 한 잔 정도도 못 마시겠어요.”

스카디는 엘리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마셔보라는 듯이, 조금쯤 기대가 섞인 눈빛이었다.

“……그럼, 조금만 마실게요.”

파티가 열린 식당은 어느샌가 술집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펠릭스는 이 시끌벅적한 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가장 가운데에 앉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앉아 있었다.

누군가 근처에 앉으려고만 하면 펠릭스가 사람을 뚫어지게 보는 탓에 차마 가까이 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녀의 몫으로 놓인 술잔을 들기가 무섭게 펠릭스가 손잡이를 잡아 잔을 내려놓았다.

*** “안 돼.”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엘리아는 살짝 침을 삼키며 조금은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어머? 드셔보세요. 이 술, 저희가 직접 빚은 거예요. 이름도 얼마나 로맨틱한데요?”

“로맨틱한 이름이요?”

“후후후, 이 술의 이름은 <잊지 못할 기억>이에요.”

“아,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네요.”

엘리아는 조금 전보다 더 아쉬운 마음이 드는지 아이가 사탕을 바라보듯 눈을 반짝이며 술잔을 응시했다.

술에선 달콤한 향이 났다. 과일주가 아닌 것 같은데, 묘하게 상쾌하고 화한 향이었다.

엘리아를 사이에 두고, 스카디와 펠릭스의 작은 신경전이 벌어졌다.

펠릭스는 스카디의 계속된 권유에 커다란 손으로 잔을 감싸 쥐고 있었다.

그때 엘리아가 웅얼거리며 굵은 손가락을 톡, 건드렸다.

“……조금만.”

그러자 펠릭스는 당황한 얼굴로 엘리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약간 목덜미가 붉어진 것도 같았다.

엘리아는 그의 손에 힘이 빠진 기회를 틈타 냉큼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와!”

향만큼이나 부드럽고 달콤한 액체가 혀끝에 닿았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뜬 그녀를 보고 스카디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대공비도 인정한 술이라고 자랑이라도 하고 다녀야겠네요.”

펠릭스는 그런 스카디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술을 맛보고 있는 엘리아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여 더 말리지도 못했다.

홀짝이며, 한 잔을 다 마셨을 때쯤 루카스가 다가와 펠릭스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는 사이 엘리아의 반대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시끄럽다 못해 서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분명 장난치듯 말하는 것 같은데, 덩치만큼이나 목소리가 커서인지 도무지 조절을 못 하고 있었다.

“자네가 이걸 할 수나 있을 것 같나? 이것 보시게!”

“내가 왜 못 해! 네까짓 것도 하는 걸!”

휘릭, 휘릭.

거나하게 취한 건지 다들 얇은 나이프를 가지고 경쟁을 하며 묘기를 부리듯 굴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나이프를 세 개나 더 들고 저글링 하듯 손에서 굴리기 시작했다.

허공을 찌르고 둥글게 굴러가던 나이프를 구경하던 찰나였다.

“어어……?”

“조심! 어이쿠!”

옆에서 곧잘 따라 하던, 살짝 어려 보이는 사내가 나이프를 놓쳤다. 손에서 돌고 있던 나이프가 엘리아를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피, 피해야 하는데……!’

당황한 탓에 차마 피하지 못하고, 엘리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챙-!

순간, 엘리아를 향해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와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눈을 떴을 땐 바로 옆에 있던 펠릭스가 자신을 품에 안은 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는 스카디가 은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나이프는 그녀가 은쟁반으로 쳐낸 듯했다.

식당에는 정적이 흘렀다. 나이프로 놀던 사내들이 사색이 되어 굳어 있었다.

쾅!

이를 빠득, 깨문 스카디가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건가?”

“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색이 된 사내들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사죄했다. 스카디는 테이블 위에 박힌 나이프를 집어 들더니 무리 지은 사내들을 향해 나아갔다.

펠릭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스카디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자신에게 안겨 떨고 있는 그녀를 느끼는 순간 걱정을 가득 담고 그녀에게로 향했다.

“괘, 괜찮아요. 다친 곳 없어요. 당신이 지켜줬잖아요…….”

꼼꼼히 살피는 펠릭스의 시선에 엘리아는 가슴팍을 살짝 밀어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당신은 잠시 나가 있는 게 좋겠군.”

얼굴은 평소랑 똑같은데,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 화났어요?”

그러는 사이, 스카디가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와 바닥에 패대기쳤다.

“당장 무릎 꿇고, 빌어.”

“자,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마님.”

사색이 되어 떨고 있는 사내가 머리를 조아리며 싹싹 빌었다.

“제 부하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대공 전하, 로이드 부인.”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마님, 정말 잘못했습니다.”

“아니, 저는…….”

엘리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사내와 펠릭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스릉.

“그럴 거 없어. 용서할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까 말이야.”

엘리아의 말을 단번에 끊어버린 펠릭스가 허리춤에 찬 검을 꺼내 그의 목을 겨누었다.

“잠시만요! 대공님! 아무도 다치지 않았잖아요. 제발 진정하세요.”

“진정? 내 앞에서, 당신이 다칠 수도 있었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진정할 수 있지?”

덩치 큰 사내는 목덜미에 깊게 파고든 검을 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곧 그의 날카로운 검 끝에 사내의 살갗이 스치며 주르륵, 피가 흘렀다. 그가 이 사람을 정말 죽일 수도 있겠구나, 싶을 때였다.

“……제 부하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사내의 옆에 서 있던 스카디가 무릎을 꿇으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잔뜩 취기에 절어 있던 그녀의 부하들 역시 뒤에서 하나, 둘씩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엘리아가 펠릭스의 검을 든 소매를 꼭 붙잡았다.

“펠, 전 정말 괜찮아요. 네?”

답답한 듯 그녀를 바라보는 펠릭스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봐요. 다들 진심으로 사죄하잖아요.”

“금방 당신이 죽을 뻔했어.”

“아니에요. 당신이 옆에서 지켜주는데 그럴 리 없잖아요.”

“정말, 당신은……!”

“펠 제발!”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 펠릭스는 거칠게 머리를 넘기며 분노를 삭였다.

모두가 숨을 죽인 실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렇게 한참 펠릭스의 눈치를 보던 엘리아가 이내 무릎을 꿇은 채 앉은 스카디에게 손을 내밀었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로이드 부인.”

스카디는 술을 마셨음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무마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아. 이래서 모두의 신뢰를 얻고, 상단주가 되었던 걸까.’

스카디의 생각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냥 넘어가 주고 싶었다. 펠릭스의 손에 굳이 피를 묻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고, 이렇듯 사과도 받았으니까.

뒤에선 펠릭스의 한숨 소리와 함께 검을 집어넣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검집에 검을 넣는 소리가 거칠었다.

“당신, 잠깐 나 좀 보지.”

퉁명스러운 말에 그녀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에게 손목이 잡힌 채 바깥으로 끌려 나갔다.

“……당신, 무슨 생각으로 저들을 용서한 거지?”

“그게 아니라, 이 일이 그 사람 목을 칠 정도의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아니, 죽여도 모자랄 상황이었지.”

펠릭스의 단호한 말에 엘리아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상황에도 당신이 절 위해서 화내준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기뻐요. 그냥, 그저 제 이기심이에요. 당신 손에 피 묻히고 싶지 않았어요.”

“…….”

“이런 건, 대공비의 위치에 맞지 않은 생각인가요?”

“그래,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해선 안 돼. 설령 그게 나로 비롯됐을지라도.”

단호하게 안 된다고 연거푸 되뇌던 펠릭스가 짙은 한숨과 함께 뒤로 돌았다. 그때 엘리아의 부드러운 손길이 팔에 와 닿아 그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하아, 제대로 화도 못 내게 만드는군. 됐어, 이제 파티는 끝이야. 당신도 이의는 없겠지?”

“그럼요, 펠. 이미 파티는 옛적에 끝나 버린 것 같은걸요?”

엘리아는 어느 때보다 고요한 문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펠릭스에게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하려던 순간이었다.

덜컹.

문이 열렸다. 스카디가 다가와 엘리아 앞에 섰다.

“로이드 부인. 우리의 관계를 위해서 어떻게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할까, 생각해 봤어요.”

“아, 네.”

“초면에 이런 무례를 끼치다니,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 참 어렵네요. 그러니, 빚을 달아놓겠습니다.”

“빚이요?”

스카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번 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곧 고개를 든 스카디는 흐트러짐 없는 시선으로 엘리아를 응시했다.

“아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경황이 없어 아깐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 했네요.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스카디.”

펠릭스는 내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엘리아는 그녀의 진중한 태도가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시간이 되신다면, 잠시 저와 담소를 나눌 수 있을까요?”

“……이 밤에 말인가?”

“둘이서 나누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펠릭스와 스카디 사이로 약간의 묘한 기류가 흘렀다.

‘이게 스카디를 좀 더 알 기회가 될지도 몰라.’

“밤이라 조금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다 함께 가는 건 어떨까요?”

“…….”

잠시 대답이 없던 그가 엘리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이내 졌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아주 잠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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