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바라보던 엘리아는 옆에서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시선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스카디가 엘리아의 눈높이에 맞춰 살짝 얼굴을 숙였다.
“로이드 부인, 이곳에서 마을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 두 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런데 점점 눈이 쌓이고 있어서, 오늘 마차를 움직이기가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하.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한참 말을 나누던 두 사람 곁으로 펠릭스가 다가섰다.
“인근 마을까지 갈 필요 없이, 그냥 해란에서 묵고 이틀 정도 재정비를 마친 다음 제국으로 출발하는 게 좋지 않겠나.”
펠릭스의 제안에 스카디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히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도 그렇네요. 좋습니다. 어이! 다들 움직여!”
“옙!”
스카디가 유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에 맞춰 사내들이 커다란 음성으로 대답했다.
고함 같은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온 부두가 다 울릴 정도로 다들 목소리가 컸다.
모두 기본적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덩치와 상반되게 표정은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다.
‘사람들도 유쾌해 보이고. 한결 마음이 놓이기는 하는데…….’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불신은 여전했다.
자연스럽게 펠릭스와 엘리아가 앞장서서 걸었다. 그 뒤를 북부 기사들이 따랐다.
어느샌가 스카디는 뒤에서 사내들을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음, 이들이 아닌가?’
바바리안은 야만족으로 유명한 무리였다. 저 여인은 조금 거친 것처럼 보여도 분명 예의를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고 섰지?”
앞장서서 걷던 펠릭스가 뒤돌아섰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 “좋은 사람, 같죠?”
“글쎄.”
“……가요.”
엘리아가 복잡한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행렬의 가장 앞에는 짐을 실은 수레를 끄는 말과 그것을 이끄는 무리가 있었다.
푸르릉, 말들이 신음을 내뱉을 때마다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긴 시간을 선박에서 보낸 탓인지, 다들 지친 티가 났다.
“제가 잠시 동행해도 괜찮을까요?”
전혀 지친 기색이 없는 스카디가 후후,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펠릭스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샌가 눈이 수북하게 쌓여 발목까지 빠질 정도였다.
한참 말없이 걷던 세 사람 중에 가장 밝은 표정의 스카디가 입을 열었다.
“상단을 운영하면서 여러 곳을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곳은 특히 신기해요. 이 시기에 이렇듯 눈이 날리는 것도 그렇고, 살이 에일 정도로 춥긴 하지만 그래도 정이 간다고 해야 할까요?”
스카디의 말을 듣고도 펠릭스는 무심하게 앞을 향해 나아갔다. 워낙에 말이 없는 사람이라 그런지 별 호응조차 없었다.
반면 엘리아는 아르티젠 북부 자체를 내내 긍정적으로 말해주는 스카디에게 왠지 모르게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호호호, 그렇죠? 북부에서는 일정 시기마다 온 하늘을 다 뒤덮을 정도의 오로라를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온천수도 경관이 아주 볼만하답니다. 가끔 그 근처에서 무지개도 뜨는데…….”
얌전하게만 보이던 그녀가 갑자기 이야기를 쏟아내자, 펠릭스가 살짝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아, 그렇군요.”
스카디는 그녀의 이야기에 크게 호응을 하며 흥미로운 눈길로 엘리아를 살폈다.
“흠, 부인께서 나보다 더 북부를 잘 아는군.”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얘기에 펠릭스는 말을 멈추곤 헛기침을 했다.
당황한 엘리아가 옆을 돌아보자, 그녀는 만면 가득 싱그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두 분, 참 행복해 보여요.”
스카디의 말에 얼굴을 붉힌 엘리아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허둥거렸다.
“가, 감사해요.”
결국은 짧은 인사만 건넬 뿐이었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선 그와의 사이가 남들이 볼 땐 퍽 다정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보기 좋네요. 나중엔 여행 겸 북부에 와야겠어요. 부인께서 이렇듯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시니, 얼마나 아름다울지 궁금하네요.”
스카디는 엘리아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활짝 웃는 여인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바라보았다.
‘묘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네.’
무표정일 땐 선뜩한 카리스마가 있었는데, 이렇게 웃는 모습은 또 천진난만한 아이 같기도 했다.
스카디와 엘리아는 가는 길 내내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이 엘리아가 생각하는 북부에 관한 이야깃거리였다.
스카디는 이따금 흥미를 보이며 경청했다. 한참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느라, 펠릭스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을 정도였다.
* * *
숙소는 꽤 컸지만, 한곳에 모두 머물긴 무리였다.
기사와 상단 사람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나란히 있는 두 개의 숙소를 통째로 빌려야만 했다.
스카디는 엘리아와 펠릭스가 머무는 숙소에 묵게 됐다.
말과 마차를 정비하는 시간, 엘리아는 숙소 안에 있는 꽤 넓은 창가에 서서 스카디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단을 운영하다 보면, 생각지 못한 곳을 오고 가게 돼요. 여러 대륙의 소식도 자주 접하고 말이에요. 북부의 아름다운 성에 관련한 소식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답니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하는 스카디를 바라보며 엘리아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성을 봤을 때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때는 거대하고 웅장한 느낌에 위축됐던 것 같기도 하고.’
지난날의 겁쟁이 같던 자신을 떠올리니 그땐 많이 어렸었구나, 싶었다.
“맞아요. 아름답죠. 저 역시 처음 봤을 땐 깜짝 놀랐으니까 말이에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스카디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상단 사람들 대다수가 남자인 데다가 거칠어 보이던데 힘들진 않으세요?”
엘리아의 물음에 스카디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겉보기엔 저래도, 속은 여리다 못해 하나같이 다 애 같아요. 조금만 놀려도 토라져서는, 섬세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니까요?”
“어머나, 정말요? 그건 참 의외네요.”
“하하, 뭐, 어쩌다 칭찬이라도 해주면 입이 찢어지게 웃으면서 좋아합니다.”
말투에 애정이 묻어나 있었다. 엘리아는 그런 스카디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스카디가 좋은 사람이라서, 좋은 부하들만 모였나 봐요.”
엘리아의 칭찬에 뜻 모를 침묵이 흘렀다. 스카디는 애매한 미소를 지은 채 묵묵히 눈이 쌓인 창밖을 내다봤다.
“……좋은 사람이라.”
“네? 잘 못 들었는데,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너무 작은 소리라 미처 듣지 못한 터라, 스카디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다름이 아니라, 로이드 부인 역시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어요. 제가 부하들을 아끼듯이, 부인께서도 북부를 사랑하시잖아요.”
“……그렇죠. 이곳은,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니까요.”
닫힌 창틀이 거센 바람에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스카디는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사르륵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렇군요.”
쿵쿵!
“스카디 님! 식사하시랍니다.”
소리와 함께 덩치 큰 사내가 얼굴을 비치며 소리쳤다.
“그만 갈까요?”
오른손을 안내하듯이 내민 스카디가 앞장서서 걸었다.
“오늘은 밤에 파티가 있을 거예요. 로이드 부인께서도 참석하실래요? 아까도 말했듯이 저희 아이들이 덩치는 저래도 참 귀엽답니다.”
“글, 쎄요. 전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서툴러서…….”
“그러니까, 함께 친해지자는 거예요. 괜찮죠?”
휙, 뒤돌아선 그녀가 엘리아의 두 손을 꼭 잡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네. 좋아요.”
결국 제안을 수락했다.
스카디에게 호감이 생기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에 자리한 불안감을 지울 기회라는 생각에서였다.
수락이 기뻤던 건지, 스카디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둘이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샌가 식당 앞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식당에는 넓은 테이블과 개인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늦었군.”
이미 앉아 있던 펠릭스가 힐끗 두 여인을 바라보더니 무심하게 말을 내뱉었다.
“이런, 그렇네요. 로이드 부인과 떠는 수다에 시간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몰랐답니다. 아! 저희 파티에 로이드 부인을 초대했습니다.”
“…….”
자연스럽게 펠릭스 반대편에 앉은 스카디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그가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대공 전하의 허락은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끝으로, 스카디는 포크를 들어 흰살생선의 살을 발라냈다.
“……파티라, 너무 피곤하지 않겠소?”
“조금만 머물렀다가 방으로 올라갈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엘리아는 질문의 의도를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물을 들이켰다.
“휴, 정 가고 싶다면, 함께 가지.”
“……네. 네?”
깜짝 놀란 탓에 다시금 되물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던 스카디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뭐, 문제 있나?”
“아, 아니요. 그저 당신은 파티를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맞아.”
“네……?”
“싫어한다고.”
그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싫은데, 대체 왜 오시는지…….’
“하, 아아. 정말, 이런 말씀 드리기 그렇지만, 너무나 사랑스러운 부부네요.”
크게 웃음 지은 스카디가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내며 말을 건넸다.
“……?”
그녀는 당황한 엘리아를 향해 싱긋, 미소 지으며 보기 좋다고 덧붙였다.
엘리아는 달아오르는 뺨을 느끼며, 다시금 물을 들이켰다.
‘남들이 보기엔 우리 사이가 좋아 보이는 걸까?’
16년을 되돌아왔다. 그와 결혼한 지 고작해야 몇 달. 그와 관계가 진전되었다고 볼만한 건 잠깐의 입맞춤 정도가 다였다.
‘그 이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니까.’
* * *
“크으! 기가 막히네요. 북부는 추워서 그런가, 술도 엄청 독하네요!”
스카디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잔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를 시작으로, 상단 사람 모두가 술잔을 들었다. 그들이 가져온 커다란 술독은 마셔도 마셔도 줄지 않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