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열린 문 너머로 아이의 책상에 올려진 두꺼운 책들이 보였다.
“어머. 공부 중이었니?”
“네.”
엘리아는 기특한 마음에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제레미. 할 말이 있단다.”
엘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레미에게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뭔데요……?”
“내일이 항구 도시로 상단을 맞으러 나가는 날이란다.”
아이를 침대 위에 앉히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너에게 부탁을 좀 하려고 하는데, 들어줄 수 있겠니?”
“…….”
“우리가 없는 동안, 제레미가 성을 잘 지키고 있어주었으면 하는데.”
아이는 잠시 아무 말도 안 하고, 끙 앓는 소리만 냈다.
정말 한참 만에야 입을 연 아이가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제레미두 갈래요!”
“어쩌지. 이건 어른들만 갈 수 있는데……?”
“치, 제레미두 갈래!”
아이가 고개를 휙, 돌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모습에 엘리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아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 손길을 거부했다.
‘어쩌면 좋지…….’
아이의 태도는 꽤 완고해 보였다. 그래서 더 난감하기만 했다.
한숨을 삼키던 엘리아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순간 눈동자가 반짝였다.
“……제레미가 성에 없으면, 아도니스는 어떡하지?”
*** 그 말에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어, 아도니스…….”
아이는 매일같이 밖에 나가 꽃이 시들진 않았는지 확인하고 돌아오곤 했다.
“그래, 아도니스.”
“지켜줘야 하는데…….”
“그렇지? 아도니스는 제레미가 없으면 슬퍼서 분명 금방 시들고 말 거야.”
꽃을 살피던 사랑스러운 그 모습이 떠올라 미소가 절로 새어 나왔다.
“……그, 그래도 갈래요.”
“내가 선물한 꽃이 시들어도 상관없는 거니?”
엘리아는 세상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코를 훌쩍거리는 시늉을 했다.
울상이 되어 아이를 바라보자, 제레미는 우물쭈물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우, 울어요?”
아이가 연신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몇 번 아이 앞에서 운 전적이 있던 엘리아는 뜨끔한 마음이 들었다.
“울면 안 되는데…….”
그녀의 어색한 연기에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제레미는 덩달아 울상을 짓고 있었다.
“……히잉, 알겠어요.”
“응?”
“알겠다구요!”
“정말?”
아이의 답변에 얼굴이 활짝 펴졌다. 하지만 곧 단순하고 순수한 아이의 모습에 쓸데없는 걱정까지 떠올랐다.
‘이렇게 순수해서야, 아카데미에 혼자 가서 잘해낼 수 있으려나.’
아이는 고개를 휙, 돌리며 무릎을 세우고 두 손 위에 턱을 괬다.
“화났니?”
아이에게 가까이 붙어 앉으며 물었다. 아이는 여전히 턱을 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제레미두 아버지처럼 이만큼 커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이의 청록색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이만큼 커진 사람?”
“네. 그러면 같이 갈 수 있자나요…….”
아이의 말에 괜히 또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엘리아는 제레미만 생각하면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
“빨리 돌아와야 해요.”
“그럼, 누구보다 빨리 달려올게.”
엘리아의 말에 아이는 금세 환하게 웃음 지었다. 때 묻지 않은 아이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천천히 컸으면 좋겠는데…….’
아이의 성장이 늘 벅차고 감동적인 한편, 아쉬운 마음도 컸다. 곧 제레미는 엘리아의 품에서 벗어나 훨훨 세상 밖으로 날아갈 것이다.
아이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히익, 또……!”
품 안에서 궁시렁거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이는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가슴 가득 퍼지는 온기에 아이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 * *
상단을 마중하러 항구가 있는 해란으로 가는 길, 사박사박, 말들이 눈을 밟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눈이 많이 쌓이지 않았음에도, 마차가 눈길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
“…….”
가는 길 내내 엘리아는 펠릭스와 한마디의 말도 섞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하지?’
머뭇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식사 때도 잘 못 보고 오랜만에 마주하니, 왠지 더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인가 눈이 마주쳤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되었다.
“왜,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빤히 바라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이 쳐다보길래.”
“아.”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여전히 뺨 위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상단에 대한 조사는 이미 마쳤어. 앤드류 말로는 달리 나온 게 없다고 하던데, 자세한 건 직접 알아봐야 할 것 같아.”
“네.”
‘상단을 꼼꼼히 봐야겠어.’
엘리아는 의지를 불태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펠릭스는 엘리아에게 더 할 말이 있는 듯 몇 번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기를 반복했다.
“……그러니, 걱정 말라고.”
간단한 몇 단어만 내뱉은 그의 목덜미가 살짝 불그스레했다.
덩달아 달아오르는 뺨에 그의 시선을 따라 흔들리는 차창 밖의 풍경을 보았다.
‘그나저나 뭘 저렇게 보는 거지?’
눈앞에는 스포디아쿠스의 부두가 보였다. 잿빛 하늘과 검은 모래가 맞닿아 있다고 해서, 다들 ‘스포디아쿠스 부두’라고 불렀다.
“앗, 결혼식 날 이곳을 제대로 못 보고 와서 아쉬웠는데.”
“……흐음, 이곳을 잘 아나 보군.”
“그럼요. 아. 그러고 보니, 온천도 여기에서 가깝지 않나요?”
“…….”
그는 그것도 아냐는 듯한 눈빛으로 흥미롭게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엘리아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북부는, 관광지로 유명하잖아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물론, 관광지보단 펠릭스 로이드 대공의 소문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말이다.
바닷물 사이로 빙하 조각들이 떠다녔다.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고, 단단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북부는 참 이상해요.”
“뭐가?”
“사람이 살기 힘들 정도로 춥고, 척박한데 이렇게 또 보란 듯이 아름답잖아요.”
펠릭스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엘리아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와 눈이 맞닿았다. 날이 흐려서 그런 걸까. 유독 그의 잿빛 눈동자가 맹수의 눈빛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어디 한번 버티고 살아봐. 이런 느낌이랄까.”
“…….”
그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마차 안은 침묵에 잠겨 덜컹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쉭쉭, 바람이 창을 뚫고 들어오려 몸부림을 쳤다.
* * *
“반갑습니다. 마르가리타 상단의 상단주 오스틴 스카디라고 합니다. 그냥 스카디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래, 반갑군.”
펠릭스는 ‘스카디’라는 여성과 짧게 인사말을 나눴다.
‘상단주가 여성이었다니…….’
상단원 대다수가 남성이었기에 상단주 역시 남성이겠거니 했는데, 섣부른 생각이었다.
스카디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미소가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스카디의 키는 펠릭스보다는 작았지만, 엘리아에 비해선 훨씬 컸다.
로브에 가려져 있지만 몸은 여리여리하지 않고 근력이 넘쳐 보였다. 걷는 걸음조차 씩씩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척 보기에도 유쾌한 사람이었다.
“북부가 아름답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스카디가 찬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끝부분만 노랗게 물들어 있는 검은 머리칼 그리고 흐릿한 날씨에도 반짝이는 금안이 마치 호랑이를 연상케 했다.
“어머나, 이분이 바로 그 유명한 대공 전하의 부인이시군요.”
펠릭스 뒤편에 서 있던 엘리아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스카디의 상냥한 목소리를 듣고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반가워요. 로이드 부인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아, 네. 이리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말 요정 같으세요.”
“아, 감사합니다.”
정말 반가운 듯 미소 짓고 있는 스카디를 보며 엘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시일이 너무 이르다고는 생각했는데, 모든 게 정말 내 착각이었을까.’
엘리아는 유심히 상단원들을 살펴보았다. 스카디 뒤로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 짐 가방을 짊어진 채 훈련된 기사처럼 절도 있게 서서 대기 중이었다.
펠릭스의 신장이 제법 큰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보다 훨씬 덩치도, 키도 컸다. 거인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사내들이었다.
‘바바리안의 특징이 월등한 신체라고 들은 적 있었는데…….’
의아한 마음에 스카디와 사내들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바로 앞에 서 있던 펠릭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물러나 루카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자리를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