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07)
  • 검은 구름이 아득하게 보름달을 가린 날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북부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잘 때나 입을 법한 얇은 셔츠와 바지 한 장만 걸친 차림이었다. 그에게서 희미한 알코올의 향이 났다.

    “…….”

    그의 얼굴에는 바바리안과 싸운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들어가요, 여긴 너무 추워요.”

    차마 그를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건넸다. 말을 걸 때조차 거절당할까 두려워 속으론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게.”

    “네?”

    “북부는 여전히 춥군.”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그 단 한 마디에 턱, 숨이 막혔다.

    세찬 바람에 그의 칠흑같이 어두운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 “헉, 헉.”

    지난날의 꿈을 꾼 엘리아는 식은땀을 잔뜩 흘린 채 깨어났다.

    그때의 참상이 쉬이 잊혀지지 않아 엘리아는 한참 동안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래, 이건 꿈일 뿐이야……. 아직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어.’

    손끝에서부터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몸을 웅크렸다. 등줄기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당시 상단으로 위장한 바바리안의 습격으로 아르티젠 영지민 절반이 죽어 나갔다. 그들의 공격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고, 자비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확실하지 않다고 손 놓고 있을 수 없어. 대비를 해야 해.’

    엘리아는 책상 위에 앉아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생각난 일들을 모조리 빼곡하게 적기 시작했다.

    바바리안에 대한 모든 것. 그때 보았던 사건들. 전부. 책상 위에 올려놓은 촛불이 촛농이 떨어짐에 따라 일렁거렸다.

    어느샌가 창밖으로 동이 트고 있었다.

    * * *

    낮 동안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펠릭스가 이날 저녁 식사 자리에 함께했다.

    두툼한 청어구이와 조개수프 그 옆에는 연어로 만든 샐러드가 놓여 있었다. 간단하지만, 나름대로 푸짐한 저녁이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엘리아는 힐끗, 곁에서 머무는 사용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없이 식사하던 그가 고개를 들어 사용인들에게 눈짓했다.

    “…….”

    모두가 나가고, 그는 말해보라는 듯이 엘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제레미는 갑자기 장내가 조용해지자 의아한지 꿀꺽, 음식을 넘기다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난번에 제게 잘못 들어왔던 서류 말인데요.”

    “알아. 그때 경황이 없어서 미처 가져오지 못했군. 나중에 집사를 시켜서 가져가도록 하지.”

    안 그래도 무심한 그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딱딱한 것처럼 느껴졌다.

    엘리아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물로 목을 축였다.

    “……타국에서 온 상단이 접안 요청을 했더라고요.”

    어쩐지 목소리가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북부에는 사시사철 눈이 내려요. 또 언제 눈보라가 칠지 알 수도 없고요. 하필 이런 곳에 배를 댈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

    어느 때보다 더 진지한 이야기라, 덥지 않은 데도 손에 자꾸만 땀이 찼다.

    “북부의 항구가 그리 넓은 곳이 아닌데, 그렇게 큰 배가 들어오려는 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해요. 의심해 볼 필요가…….”

    “…….”

    표정 없던 그의 굵직한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저, 상단이 위장 세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상단에 대한 조사는 철저하게 진행 중이야.”

    펠릭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다시금 포크를 집어 들었다.

    ‘어떻게 해야지 내 말을 들어줄까…….’

    엘리아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자 이를 물끄러미 지켜본 펠릭스가 먼저 입을 뗐다.

    “상단에 대한 뒷조사는 철저하게 진행할 거야. 항구에 배를 댈 때 확인차 나가볼 생각이기도 하고. 그러니, 당신은 이런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항구? 항구에 가서 확인해 볼 수 있다면…….’

    “펠. 그럼 저도 항구에 함께 가도 될까요?”

    “같이? 계속 나를 믿지 못하고 있군.”

    그는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듯한 엘리아의 발언에 얼굴이 살짝 굳었다.

    “네? 그게 당신을 못 믿는다는 게 아니라, 그 상단이 굳이 항구 쪽으로 들어온다고 하니…….”

    펠릭스는 냅킨을 집어 입가를 닦은 후 내려놓았다.

    “……그렇게 의심스러운 건가?”

    펠릭스가 찌푸린 미간을 꾹꾹 짚으며 중얼거렸다.

    “네. 저도 그들이 단순한 상인인지 두 눈으로 확인한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부탁드릴게요.”

    최대한 간절한 표정으로 펠릭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한참 고민하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 가서 내 옆에만 있겠다고 약속하면 허락하지.”

    “네! 물론이죠. 정말 감사해요!”

    엘리아가 환하게 웃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펠릭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일어나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성큼성큼 식당을 빠져나갔다.

    ‘나한텐 바바리안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있으니, 가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거야.’

    “엘리아 님……!”

    순간 제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아이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제레미, 다 먹었니?”

    “네……. 아버지 화났어요?”

    “응?”

    “아버지 눈이 이렇게 올라갔는데요.”

    제레미가 양쪽 검지로 눈 끝을 올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호호, 아니야, 아니란다.”

    “아니에요?”

    제레미가 작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건 화난 게 아니야. 가끔 서로 생각이 다를 때 이렇게 이야기를 할 때도 있는 거야.”

    “다른 생각?”

    그녀의 설명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근심 어린 눈동자만큼은 여전했다.

    “안심해도 된단다.”

    엘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품속에 꼭 안아주었다.

    “……히익, 엘리아 님!”

    당황해하는 아이의 모습이 귀여웠다.

    ‘이런 모습조차도 이렇게 예뻐 보여서 앞으로 어떡하지…….’

    나이에 비해 의젓한 면도 있었지만,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호호, 다 먹었으면, 함께 산책하러 나가고 싶은데 같이 가주겠니?”

    “에휴, 알았어요.”

    그에 제레미는 엘리아의 품에서 버둥거리며 벗어났다.

    ‘그나저나, 정말 바바리안이면 어떡하지…….’

    내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펠릭스 역시 상단의 방문을 아예 의심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어쨌든, 영지민들만큼은 지켜야 해.’

    * * *

    집무실 책상 앞에 앉은 펠릭스는 한참 동안 한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앤드류.”

    “네, 전하.”

    “배를 대겠다던 상단 조사는 마친 상태인가?”

    “그게, 아무래도 다른 대륙 상단이라…….”

    펠릭스의 물음에 앤드류가 난처한 듯 시선을 돌렸다.

    “철저하게 알아보도록 해. 뭐든 신중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니.”

    “네. 알겠습니다.”

    앤드류는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살짝 한숨을 내쉰 펠릭스의 이마 위로 옅은 주름이 잡혔다.

    “그나저나 마님과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

    말을 꺼내자마자 펠릭스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뻔하죠, 요즘 전하의 관심사는 온통 마님이 아닙니까? 맨날, 부인은 어딨지? 부인은 뭘 하고 있지? 그렇지 않아도 몸이 열 개가 있어도 모자란데, 사용인들에게 마님 안부 묻기 바쁩니다.”

    “……몸을 갈기갈기 찢어서 열 개로 만들어줄까.”

    살벌한 펠릭스의 대답에 앤드류는 어깨를 움츠리며 슬쩍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모르긴 몰라도, 제가 모시는 주인이라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가서 시킨 일이나 처리해.”

    집무실에 음산하게 퍼지는 목소리에 앤드류는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발걸음을 옮겼다.

    “하아…….”

    집사가 나간 집무실에 울리는 펠릭스의 한숨 소리가 짙었다.

    일정한 리듬으로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쉬이익.

    창틈으로 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동안 아무리 척박한 북부라고 할지라도 이런 위협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펠릭스는 눈을 감으며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 한편에 자리한 집무실의 불빛만이 오랫동안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 * *

    엘리아는 며칠 동안 펠릭스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는지 내내 바빴고, 아침은 물론이고 점심, 저녁까지도 집무실이나 바깥에서 해결했다.

    그사이 방문 예정일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일단 제레미에게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해둬야겠다.’

    똑똑똑.

    “제레미?”

    “……엘리아 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벌컥 문이 열렸다.

    아이는 상기된 얼굴로 엘리아를 맞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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