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07)

“여기예요.”

엘리아가 잔가지들이 무성하게 자라난 정원 사이로 들어갔다.

제레미 역시 펠릭스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엘리아의 뒤를 따랐다. 그곳은 제레미가 검술 수업을 피해 혼자서 숨던 곳이었다.

“……!”

늘 아이가 앉아 있던 자리에 푸릇한 풀잎이 돋아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중앙에 노란 꽃송이가 보송보송한 자태를 드러내며 피어올라 있었다.

*** “우, 우와. 꽃이야. 꽃이에요! 아버지! 북부에 꽃이 폈어요!”

아이는 꽃을 향해 후다닥 달려가 쭈그리고 앉았다.

“이건…….”

펠릭스가 꽃을 보더니, 멍하게 중얼거렸다.

“아도니스예요. 동방 대륙에선 추운 계절에 피어나는 강한 꽃이라고 유명해요.”

“……그렇군.”

“우와. 이런 건 처음 봐요.”

아이는 연신 꽃 주변을 맴돌며 신기한지 두 눈을 반짝거렸다.

“제레미, 북부에 봄이 오면 이렇게 수많은 꽃이 필 거야.”

“음, 이만큼이요?”

아이는 손가락 열 개를 쫙 펴 보였다.

“후후후, 그보다 더 많이. 아마 이 성 바깥을 다 둘러쌀 정도로 필 거야.”

아이의 순수한 질문에 엘리아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봄은 꽃이에요?”

“응?”

꽃을 바라보고 앉은 아이의 분홍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살랑거렸다.

“아닌가, 눈이 녹으면 봄인가?”

“…….”

“으음……. 꽃이 피면 봄인가?”

아이가 살짝 고개를 뒤로 돌리며 엘리아를 향해 말간 눈을 깜박거렸다.

아이의 말에 말문이 막혀 잠시 정적이 흘렀다. 펠릭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너에게, 완전한 봄을 선물할 수 있을까?’

“엘리아 님도 몰라요?”

아이가 달려와 깡충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레미 봄은 말이야, 눈도 녹고, 꽃도 피고, 따사로운 바람도 분단다. 북부에 봄이 오면, 우리 다 같이 정원을 거닐면서 구경해 볼까?”

아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그녀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글쎄요.”

제레미의 고개가 기우뚱거렸다.

“이런, 제레미는 싫은가 보구나?”

“어, 그게…….”

“꼭 같이 거닐고 싶었는데, 싫다니까 대공님이랑만 구경해야겠다.”

“시, 싫은 거 아닌데…… 요.”

아이는 살짝 당황했는지 말이 엉켜 나왔다.

“어머 그럼, 좋은 거야?”

“산, 산책은 같이해 줄게요.”

“어머, 너무 고맙구나.”

엘리아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아이를 꼭 안았다.

“어, ……네.”

“우리 제레미랑 산책할 생각 하니까 기분이 벌써부터 좋아지는구나.”

아이는 부끄러운 듯 발갛게 물든 볼을 실룩이고 있었다.

‘제레미, 사랑스러운 내 아이.’

꼭 끌어안은 두 사람 곁에 선 펠릭스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 * *

생일 연회를 마친 어느 4월의 아침이었다. 엘리아는 서류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앉아 있었다.

서류 뭉치 위에 놓인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마르가리타 상단의 선박 접안 허가 서류……. 어어?”

엘리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서류가 바뀌어 왔나?”

읽어보니, 타국 상단에서 제국 수도로 넘어가기 전 북부에 잠시 선박을 댈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아르티젠에서 잠시 쉬었다가 수도로 넘어갈 모양이구나…….’

엘리아는 한참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뭔가 찜찜한 기분 탓이었다.

이 정도의 대규모 상단이 북부에 방문한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잠시 들르는 것이라고 해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무엇보다 굳이 이 춥고 척박한 곳에 머무른다는 게 이상해. 타국에서 왔다면 좀 더 편한 곳에서…….’

똑똑.

한참 고민하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봤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펠릭스였다. 엘리아는 그를 보자마자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맙소사, 설마……?’

시간이 되돌아가기 전, 엘리아가 북부에 온 지 3년이 넘었을 때쯤이었다.

‘그래. 그때 분명 어떤 상단이 방문한다고 했었어!’

하지만 정작 북부를 찾은 이들은 제국 영토 북쪽을 떠돌며 살던 게르만족인 바바리안이었다.

그 사실이 떠오르자마자, 엘리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난날의 끔찍한 악몽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

“당신, 괜찮나?”

“…….”

펠릭스의 말에 엘리아는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성큼성큼 책상 가까이 다가섰다.

“괜찮은 건가……?”

아직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바바리안의 습격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때, 펠릭스가 중상을 입었었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앞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야, 그래도 시기가 달라. 어쩌면 황태자의 태도처럼, 미래가 또 바뀔 걸까…….’

쿵쿵,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뛰었다.

바바리안이 확실하다면, 그에게 접안을 불허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오랜 세월이 지나 기억이 불분명하다는 것과 시기가 너무 이르다는 것이었다.

“엘리아!”

엘리아는 갑자기 들리는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책상 맞은편에 서 있던 펠릭스가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엘리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 참.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러는 거지?”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다른 엘리아의 모습에 답답함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그, 러니까요, 펠. 당신은 어떤 일이 의심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

갑작스러운 엘리아의 물음에 이번엔 펠릭스가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당장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다짜고짜 바바리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일을 그에게 무조건 믿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에요. 다음에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결국엔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 이야기해 봤자 헛소리나 다름이 없을 테고,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정확한 기억을 더듬어 다시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털썩, 엘리아가 의자 위에 다시금 주저앉았다. 이어 펠릭스가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엘리아는 그가 집무실 책상 위에 걸터앉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엘리아의 시선으론 그가 등 돌리고 앉아 있는 탓에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북부를, 나가고 싶다는…… 뭐 그런 건가?”

그가 다시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아니요. 전혀요. 전혀 그럴 마음 없어요. 저는 이곳이 좋거든요.”

엘리아의 단호한 대답에 펠릭스의 경직된 어깨가 살짝 누그러졌다. 엘리아의 대답에 그의 새하얀 목덜미가 살짝 불그스름해졌다.

“그럼 왜 이렇게 복잡한 표정이지?”

한참 만에야 뒤돌아 엘리아의 얼굴을 살핀 그가 물었다. 엘리아는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섣불리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다.

“흐음, 체이스 로이드 때문인가? 그 일이 그렇게 걱정돼?”

“그것도 물론, 걱정되긴 하죠.”

지금 주된 고민은 그게 아니었지만, 걱정되는 일 중 하나였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무런 대책이 없는 건 아니니까.”

의외의 답변에 엘리아는 펠릭스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책이 있단 말이에요?”

“그래. 애초에 당신의 이능을 알았을 때부터 생각해 뒀던…….”

“뭔데요?!”

벌떡 일어선 엘리아가 기대에 한껏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펠릭스는 그런 엘리아를 잠시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네?”

엘리아는 다시금 책상에 손을 짚고 그에게 가깝게 다가서 대답을 재촉했다. 그 대안이 뭔지 얼른 듣고 싶었다.

“……비밀이야.”

“비, 네?”

“하아,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은 너무 무방비한 것 같아.”

“네?”

“지금도 봐. 우리가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그의 말에 깨닫고 보니, 한껏 허리를 숙인 탓에 조금만 고개를 기울이면 그와 입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화들짝 놀란 엘리아는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그에게서 황급히 멀어졌다.

“……아무튼, 조심하도록 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뒤돌아 터벅터벅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뒤돌아선 그의 귓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엘리아는 멍한 기분에 차마 그를 붙잡지 못했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직도 그의 목소리가 방 안을 맴돌고 있는 것만 같아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

그날 밤, 엘리아는 꿈을 꾸었다. 북부가 침략을 당했던 과거의 기억 속이었다.

“당신, 괜찮아요? 서서 돌아다녀도 되는 거예요? 이렇게 얇은 차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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