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07)
  • 사실 황제의 귀에 이능이 있다는 말이 전해진다면, 엘리아는 이능 보유자로서 제국으로 귀속될 수도 있었다.

    “……흠!”

    그보다 먼저 이능을 보유했음을 제국에 신고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침착하게 대응하는 엘리아의 모습에 살짝 고개를 갸웃하던 황태자가 김이 팍, 샌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면 재미가 없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엘리아와 펠릭스에게는 또렷하게 들렸다.

    엘리아는 그 말을 듣고 험악한 표정으로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서는 펠릭스를 슬쩍 막아섰다.

    “연회가 지루하시다면, 이만 휴식을 취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엘리아는 상냥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황태자에게 말했다. 일순간 사방이 고요해졌다. 이쪽으로 최대한 귀 기울이고 있던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면, 황태자는 입꼬리를 누그러뜨리며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정적이 제법 오래 지속됐다.

    “……하, 하하. 하하하!”

    그가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호탕한 웃음이었다.

    *** “아, 이런.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웃어보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그의 말을 끝으로, 감미로운 연주가 연회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엘리아와 펠릭스는 고요한 눈빛으로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연회가 시작됐군요. 부인 말대로 저는 살짝 지루해지던 참이니, 먼저 물러나 보겠습니다. 또 뵙지요.”

    그는 엘리아에게 찡긋, 눈인사하며 뒤돌아서서 바깥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갑작스러운 퇴장에 귀족들이 한층 더 소란스럽게 웅성거렸다.

    * * *

    연회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제레미 님은 나를 더 좋아해!”

    “아니! 누가 좋은지 선택하지도 않았잖아!”

    “이거 놔, 엘라!”

    엘리아는 제레미의 이름이 불리자 얼른 고개를 돌려 아이들이 몰려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연회 때 처음 봤던 백작가 영애 둘이 제레미의 팔을 한쪽씩 잡고 당겨댔다. 그 사이에서 제레미는 애늙은이 같은 표정으로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엘리아는 천천히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일까요?”

    아이들 바로 앞까지 다가선 엘리아가 허리를 살짝 굽히며 물었다.

    그에 아이들은 당기고 있던 팔에 힘을 풀며 서로를 마주 보다가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그게 리아가 나빠요.”

    “뭐? 내 탓 하지 마! 엘라!”

    “맞잖아! 너만 제레미 님을 독차지하려고 그랬잖아?”

    또다시 둘의 말싸움이 이어졌다. 영애들은 어디서 본 건지 허리춤에 손까지 올리며 말다툼을 했다.

    그 모습이 어이없기도 하면서 사랑스러워 엘리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영애들은, 제레미랑 다른 친구들이랑 다 같이 놀고 싶은 마음이 없나요?”

    “그, 그건 아니지만…….”

    “애들이 저희랑은 안 놀아주는걸요.”

    엘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우물거리고, 리아는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 다 같이 놀까요?”

    “네? 어떻게요?”

    엘라와 리아가 눈을 반짝거리며 동시에 물었다. 그 반응에 씩 미소 짓던 엘리아가 숙였던 허리를 폈다.

    “밖에 나가서 다 같이 노는 거 어때요?”

    “그치만, 애들 다 안 나가려고 할걸요? 여긴 춥고, 눈뿐이잖아요!”

    “그게 북부의 찬란한 아름다움이기도 하지요.”

    엘리아의 말에 두 영애가 서로를 바라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제레미의 손을 잡더니, 옆에 있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자, 우리 마차 놀이 하면서 갈까요? 같이 놀러 갈 사람은 얼른 붙으렴!”

    “저요!”

    눈치를 보던 아이들 사이에서 누군가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러자, 엘라와 리아 역시 덩달아 제레미의 한 손을 반씩 붙잡았다. 모두 옆 사람의 손을 붙잡고 줄지어 연회 홀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일제히 붙잡았다. 아이들의 부모들은 서둘러 뒤따라 나섰다.

    * * *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렴.”

    아이들과 함께 정원에 도착한 엘리아는 아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기고 정원 뒤편 풀숲으로 향했다.

    풀숲에 몸을 숨긴 엘리아는 눈을 꾹 감았다가, 이능이 머리끝까지 차올랐을 때쯤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 밑부터 푸른 연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눈을 내리던 먹구름이 걷히고, 해가 드리웠다.

    “어어? 날씨가, 따뜻해!”

    “와아……. 정말이네!”

    가냘픈 빛줄기가 그녀의 뺨 위로 하나둘씩 퍼져 갈 때쯤, 아이들은 한결 누그러진 추위에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풀숲에서 나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리아는 아이들 뒤에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그녀의 눈가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북부에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며 정원 안팎으로 뛰어다녔다.

    아이들을 따라나선 어른들 역시 정원을 비추는 햇살에 놀라워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애들아! 이거 봐! 눈이 녹고 있어. 봄이 왔나 봐!”

    “우와 정말이네.”

    “에잇!”

    “으왓! 무슨 짓이야. 다 젖어버렸잖아!”

    한참 눈 녹은 정원에서 뛰놀던 아이들은 제복과 드레스가 젖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꺄르륵, 해맑은 웃음소리에 아이들 부모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차마 말리진 못했다.

    ‘날씨가 조금 달라진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하다니…….’

    * * *

    연회가 끝나자마자, 아르티젠은 성을 빠져나가는 마차로 북적거렸다.

    돌아가는 이들을 하나둘씩 배웅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더 어깨가 무겁고, 숨이 차는 기분이었다. 그런 엘리아의 등 뒤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닿았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

    체이스 로이드, 황태자였다. 그는 뒤돌아선 엘리아를 잠시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드디어 단둘이 대화할 기회가 생겼군요, 대공 부인.”

    “……말씀하세요.”

    묵묵히 서 있던 그녀가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대로 돌아갈 생각이니, 그리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태자의 집요한 눈빛이 고스란히 피부 위로 느껴졌다.

    “……그러시군요.”

    엘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황태자에게 대답을 건넸다.

    “부인이 무척 마음에 들어 충고를 하나 드리려고요.”

    “충고요?”

    “네, 그렇죠. 후후후, 잘 숨기십시오. 끝까지 잘 숨기셔야 할 겁니다.”

    비릿하게 웃는 황태자의 모습에 엘리아는 몸을 경직시켰다.

    ‘협박일 뿐이야. 반응하면 안 돼.’

    황태자에겐 시치미를 뗐지만, 어쨌든 이 일은 황제의 귀에 무조건 들어갈 터였다.

    ‘이전 생에선 황실에 내 이능이 알려지지 않았었지. 이 일로 인해서 미래가 바뀔지도 몰라.’

    슥.

    문득 어깨 위로 커다란 손이 닿았다. 엘리아는 조심스러운 손길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배웅은, 끝났나?”

    나직한 펠릭스의 목소리에 엘리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형님께선 잠시의 틈도 주질 않으십니다. 이리 애지중지하시니…….”

    황태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싱긋, 웃으며 펠릭스의 두 눈을 응시했다.

    “더 욕심이 생기는데요?”

    “하. 황태자는 목숨이 여럿 되나 보군.”

    “하하하, 형님. 농담을 참 진지하게 하십니다.”

    “……글쎄.”

    펠릭스의 대답에 황태자는 눈을 크게 뜨더니, 큰 웃음을 터뜨렸다. 입을 꾹 다문 펠릭스는 그의 호탕한 웃음에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아아. 정말. 이 재미를 또 몇 달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아쉽습니다.”

    “…….”

    그는 잠시 짙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펠릭스와 엘리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저는 오늘 떠납니다. 폐하께 보고드릴 것도 있고요. 그럼, 부디 오래오래 행복하시길.”

    황태자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뒤돌아섰다.

    엘리아는 잠시 황태자의 호리호리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선했던 인상은 이제 흐릿해졌고 그의 존재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졌다.

    ‘드디어 돌아가는구나.’

    황태자가 황제에게 어떤 말을 전할까. 엘리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 엘리아의 허리 부근에 작은 손이 둘렸다.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고개를 숙여 동그랗고 포실한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놀았는지, 제레미의 온몸이 잔뜩 젖어 있었다.

    “……재밌었니?”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물었다.

    “네! 재밌었는데, 애들이 다 집에 갔어요…….”

    “다음에 또 놀면 되지.”

    “……다음이요?”

    제레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능의 힘이 사라지고, 날씨가 도로 추워졌는데도 계속 놀았던 탓인지 아이의 온몸이 온기 하나 없이 차게 식어 있었다.

    “당연하지. 춥겠다. 제레미, 그만 들어갈까?”

    금세 시무룩해지며 통통한 입술을 쭉 내미는 제레미의 모습에 엘리아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우움, 싫은데…….”

    아이의 표정 하나하나가 다 사랑스러워서 어쩔 땐 꼭 끌어안고 놓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럼, 내가 뭐 하나 보여줄까? 그럼 들어가겠니?”

    “좋아요! 그런데, 아버지는요? 아버지에겐 비밀이에요?”

    손뼉을 치며 소리치던 아이가 펠릭스의 눈치를 살피며 소곤거렸다.

    제레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엘리아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음, 셋만 아는 비밀 어때?”

    엘리아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옆에 서 있던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별생각이 없는지,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가자! ……당신도, 갈 거죠?”

    잠시 망설이며 묻자, 펠릭스는 묵묵히 제레미를 안아 들었다. 어느샌가 펠릭스의 품이 익숙해졌는지, 아이는 전보다 편한 표정이었다.

    엘리아는 두 사람을 이끌고 정원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