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07)

“모든 게 꿈처럼 느껴져요. 제레미는, 많이 울었나요?”

엘리아는 망설이다가 제일 궁금한 것부터 차근차근 묻기 시작했다.

“펑펑 울다가 이제 잠들었지.”

“하아. 드디어 좀 친해졌다 싶었는데…….”

다음 날 제레미가 자신을 또 피해 다니지 않을까, 엘리아는 아이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좀 눕지.”

펠릭스의 손길에 따라 순순히 몸을 눕혔다. 어느샌가 어둠에 눈이 익은 엘리아는 바로 앞에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무서워요. 제레미가 또 저를 피할까 봐.”

“당신은, 온통 아이 생각뿐인가?”

*** 그의 말에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에게 몹쓸 짓을 했잖아요. 그래서…….”

“제법 둘이 친해진 것 같긴 하더군. 어쨌든, 제레미 걱정은 하지 마.”

엘리아는 펠릭스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입꼬리를 살짝 올린 표정이 어렴풋이 보였다.

“네……?”

“성격은 날 빼닮아서, 한번 마음에 든 건 잘 놓지 않더라고.”

평소처럼 말투는 심드렁한데, 이야기의 내용은 마치 위로처럼 들렸다.

‘조금쯤, 날 받아들여 준 걸까?’

어둠 속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밤의 공기는 매혹적으로 두 사람을 휘감았다.

서로의 몸이 조금 더 가까워지며 시선이 엉키었다.

“으음, 엘리아 님……?”

달아오르듯 심장이 뜨겁게 뛰던 엘리아는 갑작스러운 제레미의 목소리에 놀라며, 펠릭스의 가슴팍을 밀었다. 그가 순순히 몸을 물렸다.

“제, 제레미. 일어났니?”

“……흐윽. 미워요! 미워, 정말 정말 미워.”

아이는 일어나자마자 칭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엘리아의 몸을 아프지 않게 두들겼다.

그 모습에 이상하게 안도가 되는 한편, 아이가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것 같아 안쓰러웠다.

“……미안하구나. 많이 걱정했니?”

“……흑흑.”

아이는 훌쩍이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엘리아의 부드러운 손끝이 아이 볼에 닿았다. 축축한 물기와 함께 마시멜로처럼 말랑거리는 볼살이 닿았다.

“제레미, 미안해. 응?”

“나 두고 가지 마요…….”

어둠 속에서도 아이의 얼굴이 눈물에 푹 젖어 있는 게 전부 보였다.

아이는 엘리아의 손보다 훨씬 작은 손으로 그녀를 꼭 붙잡았다.

‘내가 대체 널 두고 어디를 갈 수 있겠니…….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두고.’

엘리아는 다시금 달아오르는 눈가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제레미. 나를 봐. 나는 절대 어디 안 가.”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몇 번이고 물어봐도 내 대답은 똑같단다.”

울컥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엘리아가 이내 제레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몇 번이고 똑같단다, 제레미. 또다시 북부가 침공을 당한다 해도, 똑같이 너를 지키다가 죽을 거야.’

아이는 그 말에 안심했는지, 두 눈을 꼭 감고 하품을 하고는 제 눈가를 비벼댔다. 엘리아는 자연스럽게 제레미를 침대 위에 눕혀주었다.

아이의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펠릭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다시금 정적이 감도는 방 안을 채워 나갔다.

“……애를 원래부터 이렇게 좋아했나?”

“그만큼 사랑스러운 아이잖아요. 제레미는.”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하며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잔뜩 부르튼 눈가와 빨간 코가 못내 마음 아팠다. 아이의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슬며시 닦아주었다.

그러다 문득,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는 시선에 뒤를 돌아보자, 펠릭스의 잿빛 눈동자가 심각하리만치 저에게 꽂혀 있었다.

‘뭐지, 어디 아픈가?’

문득 드는 생각에 엘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 펠릭스의 이마 위에 손을 댔다. 살짝 뜨끈한 이마의 감촉이 여실히 느껴졌다.

“……?”

펠릭스가 제 이마를 짚은 엘리아의 손을 잡아 내리며 의문을 띤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엘리아는 그 눈빛에 정신이 번쩍 드는 동시에 민망함이 밀려왔다.

“앗, 죄송해요. 어디 아프신가 해서요.”

엘리아의 말에 그가 몸을 움직여 침대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괜찮으신 거죠?”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어둠 속에 잠긴 펠릭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게. 정말 어디가 아픈 건가…….”

대체 어디가 아픈 걸까. 열이 있긴 해도 미열 수준이었는데. 그럼에도 엘리아는 펠릭스의 몸 상태가 걱정되어 미간을 좁혔다.

“의원이라도 부를까요?”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펠릭스가 엘리아의 손목을 쥐고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그 역시 엘리아 옆에 누웠다.

“……하룻밤 자면, 괜찮아질 것 같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도 자신을 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친 엘리아는 어쩐지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얼굴을 머쓱하게 쓸었다.

“어, 얼른 주무세요. 아무래도 오늘 일이 많아서 그런가 봐요…….”

엘리아는 후다닥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묘한 기분에 달아오른 뺨이 도저히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긴장감에 심장이 뛰었다.

“그래. 어서 자. 내일 연회에서 꽤 피곤해질 테니.”

“네? 그게 무슨…….”

“머리 아픈 건 내일 생각하도록 하지.”

“그, 그래요.”

펠릭스의 말에 엘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옆에 있을 때가 제일 마음이 편하군.”

중얼거리는 펠릭스의 목소리가 적막을 뚫고 울렸다.

쿵, 쿵.

엘리아는 심장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결국, 함께 자는구나.’

제레미 쪽으로 몸을 돌린 엘리아가 멍하니 생각했다. 등 뒤쪽으로 그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모든 게 다 꿈같아. 당신과 제레미가 내 옆에 있다니…….’

벽난로가 켜져 있는데도 방 안은 추웠다. 하지만 엘리아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포근하고, 따뜻했다.

그날 그녀는 한 편의 시 같은 꿈을 꾸었다. 북부에 봄이 찾아오는 꿈이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 그녀는 아르티젠 북부의 푸르른 풀밭을 맨발로 걸어 다녔다.

* * *

이틀 동안 진행된 연회는 마지막 날에도 많은 귀족으로 북적거렸다.

엘리아는 연회장에 들어선 뒤 어제 펠릭스가 했던 말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이거구나.’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태자 전하와 대공 부인은 도대체 무슨 사이…….”

“어제 분위기가 정말…….”

다들 황태자와 엘리아의 관계에 대해 추측하기 바쁜 모습이었다.

호기심 가득한 사람들의 반응에 그녀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안 그래도 아팠던 머리가 더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어 황태자가 연회장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한층 더 심해졌다.

황태자의 입술은 뻔뻔스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엘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직도 정신이 지배되는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 그런 짓을 벌이고도…….’

황태자가 한 걸음씩 발을 옮길 때마다 울컥한 마음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괜찮나?”

펠릭스의 염려 섞인 목소리와 함께 손등을 움켜쥐는 시원한 체온이 느껴졌다.

“펠……?”

“…….”

그는 말없이 떨리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더는 당하고만 살지 않기로 했잖아. 당당해지기로.’

엘리아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목을 빳빳하게 치켜세웠다.

그리고 바로 앞까지 다가온 황태자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았다.

펠릭스는 엘리아의 등을 감싸듯이 섰다. 어쩐지 그가 지켜주고 있는 것만 같아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어젯밤은, 푹 주무셨습니까?”

엘리아는 웃고 있는 황태자의 얼굴에 아무렇지 않게 마주 웃어주었다.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하.”

황태자는 엘리아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아, 오늘 밤 역시 북부에 비가 내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선약이 있어서 말입니다.”

엘리아에게 다가서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모습에 이목이 쏠렸다.

“체이스 로이드. 그쯤 하지.”

펠릭스가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경고했다.

“하하, 형님께서는 기분이 안 좋으신가 봅니다. 왜일까요?”

황태자는 피식, 비웃듯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펠릭스와 황태자가 서로를 대적하듯 마주 보며 섰다. 그 사이에 엘리아가 웃는 낯으로 끼어들었다.

“전하, 북부는 사시사철 눈이 내리기로 유명한 곳인데 제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흐응? 그래요.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엘리아의 말에 황태자가 어깨를 으쓱한 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아가 비를 내렸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는 상태였다. 황태자에게 이능이 있다고 실토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제 말을 전해 들은 폐하께서 대공비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해하실 것 같군요.”

눈썹을 위로 들어 올린 황태자가 엘리아의 속내를 떠보듯 말을 이었다.

“……그게 어떤 말인지 저도 궁금해지네요.”

엘리아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그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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