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이거 입을래요.”
제법 단호한 제레미의 말에 앤드류, 유리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자신들이 골랐던 의복을 주섬주섬 정리하기 시작했다.
“힝. 이것도 이쁜데!”
“도련님은 곰 가죽 망토가 딱인데, 아쉽군요.”
엘리아는 그 모습에 쿡, 웃음이 터졌다. 어느새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온 제레미가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다정스럽게 아이의 옆에 앉아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제레미, 뭐 갖고 싶은 건 없어?”
“또요?”
“응, 옷 말고 진짜 받고 싶은 선물.”
“…….”
그녀의 물음에 아이는 한참 동안 고심했다. 평생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딱히 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소원하는 게 있다면 그건 딱 한 가지였다.
‘어머니…….’
다정한 어머니가 생겼으면 했다. 그래서 아이는 대답하길 망설였다.
‘이미 다정한 어머니는 생겼는걸.’
아이는 문득 엘리아와 함께 잠을 잤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음, 그럼 다 같이 자요. 아버지랑 나랑 엘리아 님이랑.”
“어, 그게…….”
엘리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조, 좀 더 근사한 선물을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제레미?”
그녀의 말에 아이는 눈을 내리깔며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부부 사이에 각방은 가장 큰 문제래요…….”
“어? 하하, ……누가 그러니?”
“유리가요.”
“유리?”
아이의 대답에 옆에 서 있던 유리는 당황하여 양손을 좌우로 흔들며 열심히 부정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엘리아의 따가운 눈초리는 결코 피할 수 없었다.
“하아, 알겠어. 그런데 이 문제는 내가 함부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대공님께 말씀드려 볼게. 알았지?”
아이는 슬쩍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럼 요기 도장 찍어요.”
“어? 여기? 손바닥에?”
“맨날 서류에 도장 찍잖아요. 얼른요.”
아이의 재촉에 살짝 당황한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손바닥 위로 꾹 눌렀다.
“네. 잘했어요.”
아이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주 큰 일을 해낸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나 잘했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두 손 위로 얼굴을 묻은 엘리아가 이내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엘리아 님? 또 어디 아파요?”
아이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엘리아의 가느다란 금발에 손을 대보았다.
“……널 어쩜 좋니, 정말!”
고개를 든 그녀가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수, 숨 막혀요!”
아이가 그녀의 등을 콩콩, 두드리며 말했다. 그제야 그녀는 아이를 감싼 팔을 거두었다.
“네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어. 알지?”
“……몰라요! 놔요!”
아이의 볼멘소리에도 엘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었다.
이를 지켜본 사용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변 시선에 볼이 더 발그레해진 아이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서 응접실을 나갔다.
뒤에서 어디 가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방을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나 아가 아닌데! 창피하게, 에효!’
생각과 달리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레미는 제 말랑한 볼을 꾹꾹 누르며 웃지 않기 위해 애썼다.
* * *
똑똑.
엘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문을 두드렸다. 오늘은 제레미의 생일이었다.
그녀는 발등까지 내려오는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짙푸른 색의 드레스는 하늘하늘한 리넨 소재였다. 그리고 방한을 위해 작지만 두꺼운 숄을 걸쳤다.
엘리아는 조심스럽게 펠릭스의 침실 문 앞에 섰다.
‘그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와 잠을 잤는걸. 한 침대를 나누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야.’
분명 16년이라는 세월을 되돌아왔지만, 엘리아의 체감상으론 고작 몇 달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벌컥.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바로 문이 열렸다. 펠릭스는 이미 그녀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문고리를 잡고 서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금박 자수가 박힌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오늘 밤에 시간이 될까요?”
“밤에……?”
그가 그녀의 속내를 파악하듯 빤히 눈을 바라보았다. 그와 마주할 때마다 자꾸만 쿵쿵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얼마 전 나눴던 그와의 입맞춤이 떠올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네. 밤에…….”
당황스러웠던 탓일까, 아이와 약속했던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부부 사인데, 고작 이런 일로 이렇게 떨면 어쩌잔 거야…….’
자책하며 떨리는 마음을 추슬렀다.
“아, 그러니까 제레미가…….”
급하게 제레미의 말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그러도록 하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엘리아는 멀뚱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처럼 어두운 머리카락을 포마드 형태로 넘긴 그는 굵직한 눈썹을 전부 드러내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전부 드러나서 그런지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눈빛이 한층 더 살벌하게 빛났다.
“네? 저는 아직 말씀을 다 드리지도 않았는데…….”
“됐어. 당신 뜻은 이미 알고 있으니,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네, 네?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한 엘리아는 연신 말을 더듬었다. 대체 그가 무슨 오해를 한 건진 몰라도 그걸 풀어줘야 할 것만 같았다.
“일단 제레미도 기다릴 테니, 서두르지.”
얄궂게도 그는 또다시 엘리아의 말을 잘라냈다.
펠릭스가 자연스럽게 엘리아의 손목을 자신의 팔 위로 올렸다. 어느 사이엔가 그녀는 그와 팔짱을 낀 모습이 되어버렸다.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펠릭스는 평소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대체, 대체 뭐지……?’
자신을 밀어내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 나오는 이러한 행동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16년을 함께 살았다지만, 그와 서로 마음이 통한 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니, 스물일곱의 펠릭스는 그녀에게만큼은 더없이 생소한 사내였다.
강제로 에스코트를 당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샌가 아이의 방 앞에 도착했다.
아이는 하녀들과 함께 방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제레미!”
한참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아이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모습조차 귀여워서 엘리아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새초롬하게 미소 짓는 아이의 모습 위로 펠릭스가 겹쳐 보였다.
둘 다 머리를 뒤로 넘기고 제복을 갖춰 입으니,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이 달라도 부자지간이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제레미. 이리 좀 와볼래?”
“왜, 왜요?”
엘리아의 손짓에 아이는 살짝 망설이는 걸음으로 그녀 앞에 섰다.
이내 엘리아가 아이의 머리카락을 망가지지 않도록 살살 쓰다듬었다.
“무척 잘 어울리는구나.”
엘리아의 말에 제레미가 수줍은 미소로 몸을 배배 꼬았다.
“엘리아 님도, 예뻐요.”
아이는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칭찬이 익숙지 않은지 귓불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 “아, 후후. 제레미에게 처음 듣는 칭찬이네?”
엘리아는 웃으며 제레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에 아이가 허둥거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결국엔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운 한편 엘리아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이를 위해서 이런 성대한 파티를 준비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레미가 아카데미에 가기까지, 아직 기회는 많으니까.’
엘리아는 그동안 제레미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많이 해볼 생각이었다.
“그만 가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펠릭스가 제레미를 한쪽 팔로 들어 올리며 안았다. 아이는 처음 있는 일인지 당황한 듯 굳어서 눈만 끔벅거렸다.
‘성격이 급해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사람 드는 걸 좋아하는 건가.’
가만히 생각하던 엘리아에게도 펠릭스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그 손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을 때였다.
“안 잡고 뭐 하는 거지? 당신도 안겨서 가고 싶은 건가?”
“……아, 그건 사양하죠.”
그녀는 서둘러 그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왼팔 위에는 제레미가, 오른팔 위에는 엘리아의 손이 있었다.
단란한 가족의 모습에 뒤를 따르던 사용인들의 얼굴에도 옅게 미소가 지어졌다.
* * *
아르티젠 북부 성 중앙홀에는 커다란 연회장이 있었다. 펠릭스는 좀처럼 발길 하지 않는 곳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곳을 굳이 처분하지도 않았다.
‘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인데, 사용하지 않는 건 아까운 일이야.’
아르티젠 성은 제국에서 가장 실력이 출중한 건축가가 직접 건설한 것으로 유명했다.
황제의 눈초리를 받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전쟁 영웅인 펠릭스에게 감격해 이 성을 건설해 주었다.
연회장의 커다란 문에는 늑대 한 마리가 높이 솟은 설산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 주변에는 금박이 덧씌워진 독수리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늑대는 펠릭스를 뜻할 터였다. 제국 사람 대부분이 펠릭스 로이드를 ‘설산을 지키는 늑대’라고 부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