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07)
  • 그제야 번뜩 정신이 든 엘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벌써 시간이……. 피곤할 텐데, 푹 쉬세요. 저는, 저는 이만 가볼게요.”

    “…….”

    그는 별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허락인 듯싶어 방문 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간 그녀는 뒤돌아 방문을 닫으려다가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그의 목덜미가 다른 곳에 비해 유독 불그스름해 보였다.

    엘리아는 문을 닫자마자, 스르륵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달아오른 두 뺨을 손으로 연신 만지작거리며 열을 식히려고 노력했다.

    이미 그와 모든 행위를 다 해봤던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엘리아는 복도에 주저앉아 한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리에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작은 창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샌가 푸른빛이 걷히고, 뿌연 안개가 성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주변이 아침 햇살에 뿌옇게 밝혀지고 있었다.

    ‘혀, 혈기 왕성한 나이니까……. 내가 그의 아내이기도 하고.’

    속으로 몇 번이고 자신을 진정시키던 엘리아는 앞으로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아의 얼굴은 여전히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 * *

    제레미가 푹, 하고 연어 구이에 포크를 찔렀다. 말간 육즙과 함께 분홍빛 속살이 제 모습을 드러내며 벌어졌다.

    아이가 입속에 연어를 가득 담고 씹었다.

    우물우물, 넓은 테이블에는 아이의 오물거리는 소리밖에 나질 않았다.

    적막에 펠릭스와 엘리아를 번갈아 바라보던 아이는 평소보다 더 붉은 듯한 엘리아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아이의 생일이 곧 돌아오잖아요. 그래서 연회를 열면 어떨까 해요.”

    적막을 깬 건 엘리아였다.

    “…….”

    식사를 하던 펠릭스의 동작이 멈추었다.

    “가능하면 제레미의 또래 아이들도 초대하고 싶어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아이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포크를 툭, 하고 떨어뜨렸다.

    ‘연회!’

    아이는 기대감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기다렸다.

    엘리아가 말을 맺고도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다.

    아이는 적막이 흐를수록 걸었던 기대가 짓뭉개지는 느낌에 고개를 푹 숙였다.

    “……해.”

    “네?”

    “하라고.”

    기다림 끝에 펠릭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 생일 연회…….’

    기대감에 쿵쿵 가슴이 뛰었다.

    엘리아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볼 때마다 웃어주었고, 여태 못 했던 걸 하게 해주었다.

    ‘천사님이 분명해…….’

    아이는 헤실헤실 떠오르는 웃음을 애써 억누르며 허공에 뜬 두 다리를 흔들었다.

    요즘따라 아이의 입가에 웃음이 자주 매달렸다.

    한참 들뜬 마음에 무어라 입을 열려던 제레미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버지 얼굴 빨갛네?!’

    잔뜩 신이 난 자신과 다르게 얼굴이 새빨간 펠릭스와 엘리아를 보았다.

    ‘어, 엘리아 님도 빨개?’

    아이는 말이 없는 펠릭스와 엘리아를 보며 무언가 생각난 듯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아 님.”

    “왜 그러니, 제레미.”

    아이가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짓자 엘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엘리아 님도 아버지가 좋아요?”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좋아하면 얼굴 빨개지는데!”

    “어, 어?”

    엘리아의 얼굴이 곧 펑, 하고 터져 버릴 것처럼 더 새빨개졌다.

    “크흠. 제레미, 어른을 놀리면 못써.”

    어색한 목소리의 펠릭스가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줬다.

    “놀린 거 아니에요!”

    곧이어 돌아오는 펠릭스의 말에 제레미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앤드류가 그랬단 말이에요! 아버지도 엘리아 님 좋아하니까 얼굴 빨개지는 거라고!”

    제레미는 마지막 말을 툭 내뱉으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

    아이의 당돌한 말에 표정 없던 펠릭스의 두툼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그래, 제레미. 나 역시 대공님을 좋아해서 결혼한 거란다.”

    엘리아는 난처한 얼굴로 펠릭스 쪽을 살며시 쳐다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저, 정말요?”

    아이가 기쁨에 찬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대답했다.

    “그럼. 정말이지.”

    엘리아는 당황스러움을 감추며 앙증맞은 분홍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음, 제레미?”

    엘리아의 손길에 아이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네?”

    제레미는 엘리아의 부름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 오늘 연회 때 입을 옷 고르러 갈까?”

    연회라는 말에 아이의 눈이 더 초롱초롱 빛을 냈다.

    “연회복이요?”

    아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아주 멋진 옷으로 골라보자.”

    “……그런 건 애들이나 신경 쓰는 건데…….”

    얼굴은 흥분하여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갈 것 같은 표정이면서, 마치 관심 없다는 듯 어른스럽게 점잖은 대답을 하였다.

    “음 그렇구나, 하지만 난 이런 거 너무 해보고 싶었거든.”

    “…….”

    “제레미는 하얀 연미복 입어도 멋질 것 같고 파란색 정장도 이쁠 것 같고, 여러 가지 옷 입혀보고 싶었는데.”

    엘리아는 살짝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 어 그게…….”

    “……아, 너무 해보고 싶다.”

    “그, 그럼 해요.”

    그 모습에 아이는 당황해하며 빠르게 말을 뱉었다.

    “응?”

    “옷 입는 거 해줄게요!”

    생색내듯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제레미의 심장이 콩닥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연회!’

    그 한마디가 아이에겐 설렘과 기대감으로 다가왔다.

    *** 방 안에는 세 사람에게 둘러싸인 의상 디자이너가 난처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이건 어때요?”

    “에이. 이게 훨씬 낫죠, 마님.”

    “제레미 님께서는 이 프릴 달린 셔츠가 어울립니다.”

    엘리아, 유리, 앤드류가 디자이너가 가져온 의복을 바라보며 각자의 주장을 펼쳤다.

    결국, 세 가지 후보의 연회복 중에서 제레미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제레미가 입어보고 고르렴.”

    엘리아의 말에 제레미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유모와 함께 커튼 뒤로 들어갔다.

    주섬주섬 하녀들이 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유리가 고른 옷으로, 양털로 이루어진 재킷과 검은 슬랙스 바지였다.

    “자, 첫 번째입니다!”

    유모가 커튼을 걷으며 소리쳤다.

    “어머나, 마치 새끼 양 같아요…….”

    다들 옹기종기 모여서 제레미를 향해 눈을 빛내며 사랑스럽다는 말을 앞다투어 꺼냈다.

    ‘부, 부끄러워.’

    난생처음 받아보는 열렬한 시선에 아이는 두 뺨을 붉혔다.

    “어서, 다음 옷을 입혀보십시오!”

    어느샌가 합류한 앤드류가 얼른 유모를 재촉해 댔다.

    유모를 따라 커튼 막 뒤로 이동한 제레미는 두 번째로 금박 장식으로 도배된 하얀 제복을 입고 그 위에 곰 가죽 망토를 둘렀다.

    “두 번째입니다!”

    유모가 뿌듯한 미소를 지은 채 아이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커튼이 걷히고, 다들 소란을 떨기 바빴다.

    “어머, 이 모습을 남기고 싶을 지경이에요. 그렇죠, 마님?”

    “아쉽구나. 초상화라도 남기면 좋을 텐데…….”

    유리의 말에 엘리아는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휙.

    부끄러운 나머지 아이는 볼살을 부풀리며 커튼을 휙 쳐버렸다. 그 너머로 아쉽다는 듯한 사람들의 탄식이 들렸다.

    세 번째는 엘리아가 고른 옷이었다. 푸른 계열의 제복과 늑대 가죽으로 이루어진 세련된 망토가 포인트였다.

    “세 번째입니다.”

    이윽고 엘리아의 시야에 푸른 제복을 차려입은 제레미가 들어왔다.

    ‘에효. 엘리아 님도 참.’

    엘리아의 두 눈에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제레미의 모습에 감탄한 엘리아는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나, 나는 이게 맘에 들어!”

    제레미는 엘리아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소리쳤다.

    “정말?”

    엘리아가 좋아하는 거라면 제레미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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